전쟁의 상처와 예술의 치유 - 오창석(吳昌碩)의 명월전신(明月前身) -
몇 년 전 지인에게 오창석이란 사람을 아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는 엉뚱하게도 아침드라마에 나온 주인공 아니냐며 내게 되물었다. 오창석이란 이름의 배우가 있다는 사실을 모른 나는 인터넷을 찾아 말끔하게 잘 생긴 그를 확인하고 적잖은 이질감을 느껴야 했다. 내가 아는 오창석은 사실 잘생김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똑같은 이름을 이야기해도 전혀 다른 이미지를 떠올리는 일은 잦으며 간혹 당혹스럽다.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숨을 내쉬고 있어도 한 사람이 살아온 경험의 축적은 이승과 저승만큼이나 멀다.
오창석, 60세의 초상과 자찬(自讚)
돌이켜 보면 아마도 내가 처음으로 사랑한 중국인이 바로 오창석이 아닌가 싶다. 서예를 배우던 초기에 그의 전서를 보고 한눈에 매료되었고, 글씨, 그림, 전각으로 확장하면서 일관된 정신의 흐름에 인간적인 매력으로까지 빠져들게 되었다. 나보다 한 세기 이상나 먼저 사람이고 국적도 다르지만 그를 느끼고 애호할 수 있다는 일은 즐거운 행운 이상이라 하겠다. 지금도 나는 한가할 때면 다락에 숨긴 단지처럼 그의 인보(印譜)를 꺼내보곤 한다.
『오창석인보』
그가 남긴 인영(印影) 가운데 눈길을 끄는 한 방의 전각이 있다. 그의 나이 66세 때인 1909년 작 ‘명월전신(明月前身)’이다. 인문은 전(田)자형 계선(界線) 안에 소전풍 양각으로 4글자를 새겼는데, 획 안에 쌓인 밀도가 매우 높고 탄탄하다. 특히 직선과 곡선, 글자와 변(邊), 매끄러움과 거침의 조화가 절묘하다.
‘明月前身’ 인영
그는 인면을 새기고 난 후 인신(印身)의 상단에 기유년 2월 오(吳)에서 66세에 새겼다(己酉春仲 客吳下 老缶年六十有六)는 간략한 기록을 남겼다. ‘明月前身’ 관지
또한 인신의 한 측면에는 음각으로 도려낸 공간에 한 여인이 서 있는 모습을 새겼다. 마치 감실(龕室) 속의 부처를 연상케 한다. 또 다른 한 측면에는 세로 6자, 가로 3자로 총 18자의 글자를 양각으로 새겼는데, 마치 북위(北魏) 때의 조상기(造像記)를 대하는 듯 금석기(金石氣)가 짙다. 여기에 그는 이런 내용을 남겼다. “元配章夫人夢中示形 刻此作造像觀 老缶記” “원부인 장씨가 꿈속에 나왔길래 이 돌에 조상(造像)을 새겨 만들고 기록하다.” ‘明月前身’의 조상(造像)과 조상기(造像記)
이 전각의 배경은 그의 나이 16세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850년부터 1864년까지 중국 대륙에서는 ‘태평천국의 난’이라는 대규모 내전이 일어났다. 교전은 만주족 황실의 청나라 조정과 기독교의 구세주 사상을 기반으로 한 종교국가 ‘태평천국’ 사이에 일어났다. 전란의 주요 무대는 강소성, 절강성, 안휘성, 호북성이었으나, 14년간의 긴 전쟁 동안 북서쪽 끝의 감숙성을 제외한 모든 중국의 성을 최소한 한 번 이상 태평천국군이 지나갔다. 이 내전으로 적어도 2천만~7천만 명이 사망했고, 난민 신세가 된 사람도 수백만 명에 달한다. 오창석이 살던 절강의 안길현(安吉縣)도 이 전쟁을 피해가지 못했다. 그의 나이 16세 되던 1860년, 태평천국군과 청군은 이곳에서 참렬한 전란을 치렀다. 오창석은 당시 집안 어른의 주선으로 안길현 과산촌(過山村)에 살던 장씨(章氏)의 딸과 약혼을 한 상태였다. 늘 그렇듯 전쟁이 났을 때 가장 취약한 사람들은 여성과 아이들이다. 전쟁의 속성은 예상치도 못한 광기를 수반할 때가 많으며, 특히 다 큰 처자들은 적군의 위험에 노출되기 십상이다. 장씨는 그의 딸을 예비 사위집으로 보내 급박한 형국을 피하고자 하였다. 교전이 심해지자 당시 오창석 일가는 피난을 갈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 그런데 약혼녀가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오창석의 모친이 장씨의 딸을 보호하며 집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오창석과 그의 부친은 호북성과 안휘성 등을 전전하며 난을 피해 유망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진정되어 돌아온 고향은 폐허가 되어 있었고, 오창석의 자매들은 죽거나 흩어져 생사조차 확인할 길이 없었다. 약혼녀 장씨 또한 병고와 기근으로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살아남은 모친의 말로는 그녀의 시신을 뜰 안의 계수나무 아래에 묻었다고 한다. 오창석은 죽은 장씨를 위해 제대로 된 무덤이라도 만들 생각으로 계수나무 아래를 파보니 이미 유골조차 찾을 수 없었다. 살아남은 자로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던 그는 참담한 마음으로 부인을 가슴에 묻을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나 66세 되던 해에 장씨가 꿈에 나타나 주었다. 그는 마음속에 참담한 생각이 일어 그녀를 위해 이 작은 인장을 새겼다. 인문에 보이는 ‘명월전신(明月前身)’은 사공도(司空圖)의 《이십사시품(二十四詩品)》․〈세련(洗練)〉에 나오는 한 구절로 ‘유수금일(流水今日) 명월전신(明月前身)’의 부분이다. 문학에서 가장 정결하고 순수한 경계를 나타내는 언어이다. 그는 50년 전 잃은 아내의 모습을 꿈속에서나마 보고 정결과 순수의 상징어인 ‘명월전신’에 그녀를 비유했다. 또한 무덤조차 만들 수 없었던 처참한 현실에서 전각의 형식을 빌어 조상(造像)과 조상기를 제작하여 불교적 장례를 치렀다. 그는 50년 동안 가슴에 묻어두었던 원부인에 대한 처참한 마음의 상처를 이렇게 스스로 치유한 것이 아니었을까.
성인근(본지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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