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 21

글씨와 놀다. 매거진 '글씨 21'

서예·캘리그라피

[Column]

2017-09-20
성인근의 글씨를 읽다 - 4

예술가의 현실인식

 


노무현 정부 초기인 2003.

덕수궁미술관에서는 당대 한국과 중국 문인서화가의 거장 장우성(張遇聖)과 리커란(李可染)2인전이 열렸다. 당시 리커란은 이미 돌아가신 후였고, 장우성은 92세의 노경이었다. 그러나 두 분 모두 한국과 중국이 겪었던 격동의 현대사를 교수이자 화가의 신분으로 살았다는 점과, 세상에 시서화 삼절의 거장으로 칭해진다는 공통점이 있다.


당시 전시에 출품한 작품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한 점의 그림이 있었다. 장우성의 2003년 작 아슬아슬이다. 이 그림이 눈에 띈 이유는 거장의 그림이라 하기엔 왠지 어린애 같은 치졸(稚拙)함 때문이었던 것 같다. 불안한 선조(線條)와 구성. 색도 넣지 않은 단순함, 유치원생의 스캐치북에서나 보았을 법한 그림이었다.


월전60_아슬아슬_2003_41x63.5cm_종이에 수묵.jpg

월전 장우성 - 아슬아슬 (2003)


90대의 노대가가 왜 이런 불안한 그림을 그렸는지는 그림 아래 써놓은 몇 줄의 시를 어렵사리 읽어내고서야 알게 되었다.

 

無心乘新車 動輒之字驅

滿座人皆駭 肝膽小如豆

相問運者誰 始知初步手

狂走向何去 恐將斷崖墜

(二千三年夏 老月畵)

 

무심히 새로 탄 버스, 갈지자로 몰고 가네.

승객들 모두 놀라 간담이 콩알만.

운전수가 누구냐며 수군수군, 초보임을 알겠네.

미친 듯 어디로 달려가나, 낭떠러지 떨어질라.

(2003년 여름 노월(老月) 그림)

 

시를 읽고 그림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버스 바퀴 3개는 지면에서 떨어져 있고, 승객들은 잔뜩 웅크리고 있었으며, 운전사만 앞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작가는 진보 성향의 새로운 대통령을 운전기사에, 자신을 포함한 국민을 승객에 빗대어 당시의 형국을 이렇게 표현했다. 작가는 당신이 본 현실인식을 이렇게 유머러스하게 그려냈다. 아마도 90 넘은 노화가의 눈에는 진보와 개혁 성향의 대통령이 진행한 국정 초반이 이렇게 불안해 보였나보다.


노무현대통령에 대한 공과는 여기서 언급할 주제는 아니다. 그러나 그는 선거에서 기적 같은 승리를 이뤘던 만큼 준비가 부족했고, 무슨 일을 해도 DJ정부와의 성격과 차별화하기 힘들었다. 또한 그가 독기 오른 보수언론과 보수 세력은 물론, 내부의 적들과도 진보라는 이름으로 힘겹게 싸워야 했던 점은 분명해 보인다.


나는 14년 전 그림을 들여다보며 문인화의 본령을 다시 질문해 본다. 전통시대 직업화가가 아닌 문인들이 자신의 시심(詩心)을 사물에 의탁해 그려낸 문학적 회화가 문인화의 본령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우리시대의 문인화란 무엇일까를 반문할 수밖에 없다. 문인이나 무인 등의 신분개념이 사라진지 오래인 우리시대의 문인화 말이다.


문인화를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들도 전통시대 군자의 표상이라는 식물들의 관념적 외형을 답습하고 있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일까. 어쩌면 우리시대의 문인화는 형해화한 유산의 수분 빠진 껍데기만 달여 먹고 있는 게 아닐까. 우리시대의 정서를 대변할 소재 개발과 확산은 넘봐서는 안 되는 주제인가.


예술이란 결국 작가의 현실인식에서 태동하기 마련이다. 시대의 현실인식에 발을 딛고 선 문인적 시심을 회복할 때다. 장우성처럼 어린아이 같은 그림일지라도 작가가 무엇을 응시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는 문인화를 보고 싶다.

 

2017. 6. 15

성인근(본지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