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4월, 테오화랑에서는 노상동(Noh Sangdong)과 홍성덕(Hong Sungduck)의 2인전, 《벌판 한복판에 꽃나무 하나가》를 선보이고 있다. 노상동, 홍성덕은 각각 서예, 사진 장르를 본령으로 삼아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독자적인 작업 세계의 구현을 위해 분투해 온 작가이다.
이들의 작품 세계는 서예와 사진이라는 영역에서 전통적, 보편적으로 통용되고 추구되어 온 관념, 형식, 기법 등의 경계를 넘어 확장이나 결합, 또는 전환의 새로운 차원을 창출해냈다는 점에서 우선적으로 이번 2인전의 기획 아래 놓인다. 아울러 두 작가 공히 한지 위의 작업이라는 점, 한지 고유의 흰빛을 배경으로 먹(색)의 색채적, 형태적 구현이 주요 작업이라는 점 등에서 유사점을 갖는다.
물론 노상동, 홍성덕은 벌판 한복판의 꽃나무 한 그루처럼 다른 이와 나눌 수 없는, 혼자의 길을 걸어온 작가이다. 노상동은 전통 서예가로 시작하였다. 그러다 한 시절, 정신의 극한에 이르기까지 ‘한 일(一)’ 자 한 자의 해체와 재구축에 매달리게 된다. 작가는 “긋고 세우고, 찍고 그리고, 문지르고 눕히고, 당기고 후비고, 품고 흔들”며 오직 이 한 글자와 씨름했음을 말한다. 서예의 정신과 근본 원리, 즉 본질을 알고자 했던 이러한 노력은 파자(破字) 이후의 단계들을 통과하여 획은 물론 글자의 의미로부터 자유를 얻은 현재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작가 스스로는 이러한 도달점을 ‘추상서예’라는 새로운 장르로 지칭하며, 이는 여전히 서예에 대한 강조점을 거두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근현대 회화에 등장한 ‘문자추상’, ‘서체추상’과 구분된다. 그러나 이 3월, 작가가 선 곳이 ‘쓰다’와 ‘그리다’의 경계인지, 혹은 ‘쓰다’에서 ‘그리다’로 한참 나아간 경지인지, 두 행위를 구분하여 따져 묻는 일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이번 전시의 공간을 채우는 작가의 작품들은 이미 동시대 현대미술의 영역 속에 오롯이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에서 소개되는 노상동의 연작들은 단 한 글자의 한자 제목을 갖는다. <파(波)>, <무(無)>, <산(山)>, <애(愛)>, <인(人)>이 그것이다. 이 작품들에서 작가만의 고유한 표현으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화폭의 배경을 이루는 듯 보이는 무수한 필선일 것이다.
<파(波)>에서는 가로 방향으로, 주묵의 색채감이 강렬한 <인(人)>과 같은 작품에서는 곧추선 세로 방향으로, 마치 빗줄기이듯 그어진 이 필선들은 공중에서 내려 그은 획의 결과이다. 또한 이는 작가의 인식이 집약되는, 점, 선, 면의 합일이자 ‘한 일(一)’ 자의 바다이다. 그러나 9개의 큰 작품이 연이어 배치된 <파(波)>에서 이 필선들은 어쩌면 작가의 거처가 위치한 바로 그 고장, 드넓은 울진 바다 그대로이기도 할 것이다. 따라서 관람자는 그 물결에 그저 편안히 마음을 풀어놓아도 좋을 것이다.
홍성덕의 <사관(史官)> 연작은 사진에 대한 작가의 사유가 집약되어 표현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이라는 매체가 한순간이나마 피사체의 진실을 드러낸다는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작가는 사진의 진실성이야말로 허구이며, 우리 인간의 보는 행위 또한 자연스럽고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며 시대적인 것이라 말한다. 즉, 작가는 사진의 본질과 본다는 행위, 두 가지 모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런데 그의 경우, 여타의 사진 작업들이 사진 매체 및 시각에 대해 갖는 불신의 정도보다 훨씬 높은 정도의 그것을 보여주며, 이는 작업의 주제로 전이된다. 관람자는 <사관(史官)> 연작을 대면하여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먹색 부분보다 적은 면적으로 환하게 드러나는 조각 풍경–돌담, 지붕, 전통 창호 등–과 그 윤곽에 눈길을 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연작에서 작가의 강조점은 의외로 먹의 세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사관(史官)>은 그 특유의 먹색을 통해 사진가의 존재, 즉 사진에서 무엇을 드러내고, 드러내지 않을지 선택하고 결정하는 주체가 엄연히 존재함을 암시한다. 이는 사진가, 또는 사관의 존재를 빌려 사진 매체가 필연적으로 드러내는 속성을 화면에 극대화하여 구현한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연작은 먹색에 대한 작가의 추구가 오랜 기간의 시도 끝에 고유의 차원을 획득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홍성덕은 한국 수묵화의 먹 작업에서 전해지는 수묵의 정신을 사진의 한지 인쇄를 통해 표현하고자 일찍부터 실험적인 작업들을 진행해 왔다. 입자가 고르지 못한 한지 표면에 사진을 옮기는 일에는 상당한 기술적 어려움이 따랐기에 원하는 결과를 얻기까지 많은 노력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홍성덕의 사진 작업의 미학은 단순히 피사체의 포착 과정만으로 진단되지 않는다. <사관(史官)> 외에 이번 전시에서는 연작 중 1점을 함께 선보인다.
전시 《벌판 한복판에 꽃나무 하나가》에 꽃나무를 그린 그림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 <꽃나무>에서 시적 화자는 꽃나무가 스스로 생각하는 꽃나무에게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이상스러운 흉내는 그의 몫이 된다. 관람자가 본 전시에서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를 열심히 생각하는 것처럼 열심히 꽃을 피워 가지고” 선 두 세계를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본 전시의 제목은 이상(李箱)의 시 <꽃나무>(1933)에서 빌려온 것임을 밝힌다. 시는 다음과 같다. : 벌판 한복판에 꽃나무 하나가 있소 근처에는 꽃나무가 하나도 없소 꽃나무는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를 열심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열심으로 꽃을 피워가지고 섰소. 꽃나무는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에게 갈 수 없소 나는 막 달아났소 한 꽃나무를 위하여 그러는 것처럼 나는 참 그런 이상스러운 흉내를 내었소.
2023. 03. 24 자료제공 : 테오화랑 <전시정보> 노상동·홍성덕 2인전 《벌판 한복판에 꽃나무 하나가》 전시기간 : 2023년 3월 18일(토) ~ 4월 9일(일) 전시장소 : 테오화랑 (서율시 성동구 성수동2가 559-4, B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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