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 21

글씨와 놀다. 매거진 '글씨 21'

서예·캘리그라피

[Review]

2025-11-04
먹을 벗하는 사람들 / 전시 10.16-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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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벗하는 사람들, 

글씨와 삶을 나누는 서예인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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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완연한 기운 속에서 ‘먹을 벗하는 사람들’전이 서울 인사동 백악미술관 2층에서 2025년 10월 16일부터 22일까지 열렸다. 이번 전시는 한국서예협회 서울특별시지회 중구지부 주최로 진행되었으며, 지난 2007년 ‘6人展’으로 시작된 이래 올해로 제10회를 맞이한 전통 깊은 서예 모임의 결실이다. 18일 오후 5시에는 운재 이승우 선생과 출품 작가들이 함께한 초대 행사가 열려 관람객들과 서예의 의미를 나누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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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 최강희(以江 崔江姬) / 愛蓮 애련 80×50cm


‘먹을 벗하는 사람들’이라는 이름에는 단순한 필획의 연습을 넘어, 먹과 붓을 통해 내면의 세계를 교감하고자 하는 작가들의 철학이 담겨 있다. 지도자인 운재 이승우 선생은 초대의 글에서 “검은 먹물의 붓을 통해 ‘내용’을 전달하는 고전의 방법이 달라져야 할 시점이 왔다”고 말하며, 서예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회화적 감성과 미감으로 승화된 예술이어야 함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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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는 헝가리 예술가 라슬로 모홀리-너지(Laszlo Moholy-Nagy)의 말을 인용해, “미래의 문맹자는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지를 모르는 사람일 것이다”라는 구절로 현대 서예의 변화를 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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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재 이승우(韻齋 李承雨) / 遊于藝 유우예 30×70cm


운재 선생은 오늘날의 서예를 “새로운 문화에 부단히 적응하며 애써 살아가는 시대의 예술”이라 표현했다. 그의 글에 따르면, 이는 마치 개미들이 물 위에 떠 있는 ‘개미 뗏목(Ant raft)’을 만들어 생존하듯, 서예가도 전통 위에 새로운 형태의 표현을 구축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를 안고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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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는 그러한 철학을 반영하듯, 형식과 내용의 실험을 통해 문자예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가 두드러졌다. 붓의 속도와 여백, 먹의 농담을 통해 언어와 감정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들이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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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곡 이재철(韻谷 李在喆) / 誰云泰山高 수운태산고 35×135cm


이번 전시에는 김남숙, 김병진, 김영석, 김필남, 박정희, 이순남, 이재숙, 이재철, 이현숙, 최수영등 수십 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각자의 개성이 담긴 작품 속에는 한글과 한자의 조형미, 추상적 선묘, 그리고 문학적 감흥이 어우러진 다양성이 돋보였다.
한글 서체의 구조를 파격적으로 해체한 실험적 작품부터, 전통적 서체로 고전 시를 담아낸 작품까지, ‘먹을 벗함’이라는 주제의 폭넓은 해석이 이어졌다. 일부 작품은 강렬한 붓 터치로 현대 추상화의 느낌을 주었고, 다른 작품들은 고요한 수묵화와 함께 서정적 정취를 자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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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재 이승우 선생은 말미에서 “단단한 내공으로 심오한 내면의 세계를 이끌어 만인에게 심금을 울릴 작품을 기대한다”고 밝히며, 서예가 단순히 옛 문화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삶을 반영하고 미래로 향하는 창조적 언어임을 강조했다.
그는 또한 “시작하는 젊은이들이 개인의 역량을 조심스레 발휘하며, 있는 그대로의 진정성과 절제가 주는 힘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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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빈 하명희(迎彬 河明希) / 네 곁에 있어 50×80cm


‘먹을 벗하는 사람들’전은 전통 서예의 본질을 지키면서도 시대와 호흡하려는 새로운 시도로 평가받고 있다. 이번 전시는 단순한 전시회를 넘어, 먹과 붓을 매개로 사람과 사람,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문화적 장(場)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조용한 붓끝에서 피어나는 검은 선들은 관람객에게 오래 머무는 울림을 남기며, “먹을 벗한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게 한 전시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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