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거나 튀지 않고 묵묵히 성실한 삶을 살라며 이응백 교수(서울대 명예교수1923~2010)께서 초민(艸民)’이라는 호를 지어주셨다고 한다. 실제로 초민 박용설은 서예인생에서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며 어둠속에서 영롱한 빛을 내는 반딧불처럼 빛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열정은 실제로 발열 없이 빛나는 반딧불이 아닌, 태양과도 같은 빛이었다. 그 빛을 조명하여 초민 박용설의 서예인생과 교육철학에 대해 집중 인터뷰를 하고자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 오는 11월,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개인전을 앞두고 총망(悤忙)함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쪼개어 할애해 주었다.
그는 ‘초민’이라는 호 말고도 ‘고윤실’이라는 당호가 하나 더 있다. 육당 최남선 선생님의 글을 보고 ‘옛것을 잘 이어 새로운 것을 창조해보자’라는 뜻으로 지은 ‘고윤실’은 문자의 근본을 중시 여기는 초민 박용설의 뜻이 가득 담겨있다. 오늘날의 기형적인 획을 구사하는 서예나, 캘리그라피 작가들이 근본을 간과하고 만들어내는 문자의 오류들을 상기하며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Q. 서예와의 인연이 어떻게 시작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또 본격적으로 서예를 시작함과 동시에 학남 정환섭 선생님의 문하에 있으셨는데 학남 선생님의 서예 교육법은 어땠나요?
대학교(사범대)에 들어가서 과에 적응을 잘 못하고 방황하던 차에 교양과목으로 서예과목이 있는 것을 보고 수업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 열심히 잘한다고 칭찬을 해주셨던 것이 발단이 되어 이후 방학 내내 글씨 쓰는 것을 더욱 열심히 하게 되었고 그것이 서예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대학 4년 동안 서예에 묻혀 살다시피 하다가 문득 서예를 제대로 배워야겠다고 생각하여 군대를 다녀온 후 학남 선생님 문하에 들어갔습니다. 학남 정환섭 선생님은 서울 미대 1회 졸업생으로 동기로는 산정 서세옥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대가인 학남 선생님을 처음 뵈었을 때, 글씨가 처음이냐며 그 앞에서 글씨를 써보라고 하시는데, 저는 몇 년을 공부하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이라고 말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論語句 60x53cm
그리고 ‘구양순’부터 법첩위주로 공부하라고 말씀하셔서 책을 보고 똑같이 쓰려고 열심히 썼습니다. 서법책을 바꿀 때는 어떤 서체를 어떻게 학습해야 하는가를 상의하고 잘 설명해 주시면서 공부의 방향성에 대해 알려주셨죠.
학남 선생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요즘 사람들은 자전이 많이 나오다 보니 법첩은 열심히 공부하지 않고 집자를 해서 바로 작품을 쓴다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음식중에는 김치와 홍어가 있는데 그런 것들은 곰삭아야만 제대로 맛을 내듯이 법첩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완전하게 습득하도록 노력해야만 한다고 말씀하셨죠.
陽村先生 獨樂堂記 句 35x140cm
Q. 어느 한 서체에 치우치지 않고 5체 두루 능통하신 것 같습니다. 이러한 것이 ‘박습(博習)’하는 학서 과정을 중시하는 것과 연관이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도 제대로 잘 하는 것이 없습니다. (웃음) 예전에 서예는 실용으로 일상생활에서 붓글씨를 써야했기 때문에 해, 행, 초 순서로 글씨를 배웠지만 현재에 와서 굳이 해서부터 가르치고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지요.
문자의 발전 과정에 의해 그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문자의 어원을 살피면서 배우면 재미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전서, 예서 순으로 공부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죠, 또 그렇게 공부하는 것이 나중에 해,행,초 작품에 전예의 필의(筆意)가 옮겨져 좋은 작품이 나올 것입니다. 또 자기의 개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한 서체를 잘하게 되면 다른 서체에도 잘 전이가 되어 다른 서체 모두 격이 높아집니다. 시대별로 서체가 변천되는 그 과정을 보면 가장 큰 이유는 ‘실용성’입니다. 즉 수평으로 긋는 전,예가 약간 우측으로 올라가는 획이 나오는 해,행,초의 서체로 변하는 것은 실용성의 바탕으로 쓰기쉽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처음 해서를 가르치면 오히려 갈고리나 파임에 막혀 중도 포기를 하는 경우가 많죠, 붓을 세우고 역입하고 중봉운필, 회봉하는 것을 터득한 후 나중에 해서를 학습하는 것이 훨씬 용이하다고 생각합니다.
篤藝 28 x 51
Q. 서예와 함께한 일생은 어떠셨나요?
저에게는 글씨 쓰는 것 자체가 기쁜 일이었습니다. 날밤을 새우며 글씨를 쓰는 그 자체가 좋았지요. 결과적으로 저희 세대에는 글씨 쓰는 것으로 어느 정도 경제력이 해결이 되어 괜찮았습니다. 그리고 가정적으로 보았을 때, 제가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이 자식들에게 본보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런 모든 것이 기쁨입니다.
Q. 요즘 현대서예에서 볼 수 있는 재료의 다양성과 사용법은 무궁무진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기본 재료만으로도 전통서예의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텐데요, 재료를 사용하는 독특한 방법이나 아끼는 재료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일상생활에서 옷을 고르거나 글씨를 쓸 때 종이에 배색을 하는 것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얀 화선지에 다양한 검은색의 먹으로 글씨 쓴 후 빨간 인주로 낙관을 찍어 완성하는 일련의 과정 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붓에 대해 간단하게 얘길 하자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붓의 종류가 ‘양호장봉이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에 가서 보면 정말 여러 가지 동물의 털(토끼, 돼지, 말, 소, 양 등 )들을 다양하게 사용합니다. 이런 부분을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재료를 다양하게 접하고 사용하면 좋은 효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정판교 시 70x70
Q. 작품 활동하시는 것을 보면 전통서예의 정통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통서예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고전에 빠지는 것만으로도 좋습니다. 고전에 깊이 천착하게 되면 무언가 내면의 것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직까지도 새로운 것을 시도 한다는 것이 크게 마음에 내키지 않아서 전통서예를 더 깊이 연구 해야 한다고 생각하죠, 요즘 작가들을 보면 튀고자 하는 작가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서예는 문자의 약속을 지키는 조형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허신의 설문해자를 보면 소전 9353자가 표제자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전에 나오는 것은 거의 5만자가 됩니다. 나머지 4만여 자의 전서는 없지 않습니까? 그것을 요즘 사람들이 해서를 가지고 만들어서 전서를 씁니다. 하지만 그것은 틀린 방법이라 볼 수 있습니다. 기존에 있는 전서로 가차해서 써야하는데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서 쓰는 작가들이 많은데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한자의 육서중 전주가차는 한자를 응용해서 쓰는 방법을 말하는데, 그것을 잘 공부해서 올바른 전서를 쓰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설문해자(說文解字)』는 1만(萬)여 자에 달하는 한자(漢字) 하나하나에 대해, 본래의 글자 모양과 뜻 그리고 발음을 종합적으로 해설한 책
구양수 학서 70x200
Q. 초민 박용설이란 이름 뒤에는 왠지 ‘작가+교육자’ 라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선생님만의 교육철학, 지도방법에 대해 들려주세요.
저는 사범대를 나와서 그런지 교육과정이라는 학습단계를 잘 체계화하여 가르치면 쉽고 빠르게 공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예를 들어 수학을 배울 때에도 더하기를 배우고, 빼기를 배우고, 그 다음에 곱하기, 나누기를 배우고 난 후 1,2차 방정식을 배우는 식으로 학습단계대로 잘 습득해 나가면 많은 것을 잘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근본을 중시합니다. 따라서 전서를 공부하고자 하면 처음에는 좀 지루하겠지만 540부수를 다 공부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설문해자에 모든 문자를 540부수로 분류 했기때문이죠. 예를 들어 王(임금왕)자를 자전, 옥편에서 찾을 때 王(임금왕)자는 자획이 4획입니다. 그런데 정작 찾는 것은 5획인 玉(구슬옥)변인 5획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강의자전이 214개의 부수로 문자를 분류하다보니 전서의 540부수를 압축시켜놓아 그런것이죠. 그러니 올바른 전서를 쓸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렇게 공부하기를 원합니다. 연필로 우선 부수를 익히면서 머리에 넣어야 합니다. 글씨는 가슴에 있는 것을 손으로 표현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사람들은 눈으로만 보고 손으로 표현하려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공부가 잘 되지 않아요
전서 뿐 아니라 예서 같은 경우에도 그냥 214부수를 공부하고 그 다음에 글자를 쓸 수 있도록 하며, 행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무목 변을 보면 좌변이나 우측 방에 올 때, 밑에 올 때 매번 다른 모양으로 오게 되죠. 이런 모든 것들을 다 가슴으로 익힌 다음에 붓으로 쓰게 되면 훨씬 체계적으로 익힐 수 있고 그 후에 글씨를 쓰게되면 자기정리가 됩니다.
그렇지만, 재미있게 공부해야 합니다. 부수에 대한 자원, 글자에 대한 자원을 공부하게 되면 옛사람들의 놀라운 지혜가 그 문자 속에 있기 때문에 빨리 익혀지고 재미있게 할 수 있습니다.
최승로 선생 시 88x88
Q. 훌륭한 후학들을 많이 길러내셨습니다. 제자들과의 인연은 어떤가요?
제자들과의 인연에 대해서 얘기 드리자면, 삶은 만남의 연속입니다. 제자들과의 인연이 같은 시대에 끝까지 좋은 인연으로 남으려면 선한 인연이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따라서 가슴과 가슴으로 만나야 그 관계가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죠. 인격 대 인격으로 서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좋은 인연을 유지할 수 있는 겁니다. 저는 강요하기보다는 스스로 방향을 찾아 갈 수 있도록 지도합니다.
Q. 한자 문화권인 한 · 중 · 일에서 유독 한국의 서예가들이 마땅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러 요인들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가장 큰 요인은 무엇인지, 또 어떠한 인식변화가 필요한지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제 생각에는 중국과 일본은 한자가 없이는 생활 할 수 없는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인데, 어느 날부터 한글 전용으로 인해 한문서예가 너무 난해하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한문서예작품을 집에 걸어놓았는데 손님이 와서 집주인에게 글씨의 뜻에 대해 물어봤는데 갑자기 생각이 안나서 난감해 하는 등 한자의 사용이 잦아듦에 따라 서예가 우리나라에서 미술품으로의 가치가 낮아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긴 역사를 보더라도 한글이 전용이 되어 사용하게 된 것은 한글이 창제된 것이 600년, 해방 이후에 한글 운동이 왕성하게 일어났습니다. 그 이전 까지 역사의 모든 기록은 다 한문이었어요. 한문은 중국문자가 아니라 동양문화의 문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고전도 모두 한문이기 때문에 한글의 우수성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우리 동양문자인 한문 공부에 요점을 두었으면 좋겠습니다. 현재 전통문화연구원에서 노력하고 있지만, 국민 전체의 한문에 대한 이해 부족이 서예문화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이어지고 디지털 문화의 속도에 밀려 한국 서예의 위기가 초래된다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한글 창제 이전의 고전에 대한 접근의 중요성과 동양문화의 세계화에 서예의 높은 문화가치를 높혀나간다면 우리 서예인들의 위상이 회복되리라 여겨집니다.
야은 선생 시50x135
Q. 한글서예의 발전과 우려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앞으로 한글서예의 비약적인 발전을 예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연구를 잘하여 앞으로 서예하면 한글서예가 기본으로 여겨질 만큼 발전 했으면 합니다. ‘한글서예’하면 판본체나 서간체등의 많은 작품들을 하지만 근본적으로 훈민정음 해례본을 전부 잘 읽어봐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치읓(ㅊ), 히읗(ㅎ)을 쓸 때, 첫 획을 가로획이 아닌 위에서 내려 긋는 세로획으로 써야합니다. 궁체를 쓸 때는 점으로 쓰지만 판본이나 고체를 쓸 때는 점이 아닌 획으로 구분하여 써야합니다. 또 디귿(ㄷ), 티읕(ㅌ)도 마찬가지로 세 획이 다 붙어야 하는데 한 획을 떼고 디귿(ㄷ)으로 쓴다든지 하는 것은 근본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쓰는 겁니다. 문자는 약속이니까 약속의 범주 내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쌍시옷(ㅆ)을 볼 때 좌우로 배치해야 하는데 위아래로 쓰면서 기발하고 좋은 듯 여기며 쓰는 것은 오류라고 봅니다.
한글은 회화문자가 아닙니다. 표음문자이지 표의문자가 아니기 때문에 마음대로 확대해석하여 쓰는 것은 올바른 행동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자 같은 경우에는 사물의 형상을 단순화시키거나 추상화시켜서 표현하지만 한글은 천지인 인 점, 가로획, 세로획 으로 모음을 삼고 입술과 입안의 모양을 가지고 만든것이기 때문에 상형화 한다는 것은 그 사람만의 재미일 뿐입니다.
Q. 예술과 감성은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습니까?
학남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경쾌한 글씨를 표현하고 싶다면 비발디의 사계를 틀어놓고, 장중한 글씨를 표현하고 싶다면 베토벤의 운명과 같은 음악을 틀어놓으신다고 하셨습니다. 클래식을 매우 좋아하셨지요, 모든 것이 그렇겠지만 가슴과 손이 하나가 되었을 때 좋은 작품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저는 항상 음악을 듣습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녀서 음악과 가까이 해왔는데, 듣는 것과 하는 것 둘 다 좋아합니다.왕희지가 취흥이 도도한 가운데 썼다는 난정서가 있지요, 그 이후로 서예가들이 술을 좋아하고 마시고 하는데 어느 정도 취하게 되면 잘 쓰고 싶다는 욕심을 버리고 흥취에 이끌려 무작위서의 경지에 들어가지 않나 생각합니다.서예도 분명히 감성이 필요하기 때문에 저는 그것을 음악을 통해서 합니다.
Q. 첫 개인전을 준비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소감을 전해주세요.
그 동안 초대전이나 그룹전 등 1년에 십여 차례를 전시해왔는데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보여줄 것이 없는데 어떻게 개인전을 할까’라는 생각에 있다가, 이제야 처음 개인전시를 하게 되었어요. 겸손한 마음으로 그 동안 공부했던 것들을 정리하는 마음으로 임하고, 또 후학들에게 혹시 도움이 될까하여 준비하고 있습니다. 대작으로 30~40점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Q. 평소에 작품 활동 시 시제를 어디에서 찾으십니까?
주로 책을 많이 읽으면서 가슴에 와 닿는 문장이나 시를 선택합니다. 특히 고문진보에 나오는 시나 문들이 가슴에 와 닿는 글들이 많아요. 시는 재주있는 사람이 잘 지을 수 있다고 합니다. 요즘 한문 시를 많이 지어서 쓰기도 하지만 한문을 제대로 공부하는 사람은 드문 것 같아요 좋은 문장을 쓰는 사람은 인격이나 그 외 모든 것이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도연명, 소동파의 글들을 위주로 보고 있습니다.
우암 선생 시 46x136
Q. 한국서예의 미래에 대해서 후학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한국서예가 발전하려면 한문공부에 천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근본을 해결하고 다지지 않고서는 발전할 수 없죠, 또 새로운 젊은 작가들도 가슴속에 온축이 된 것을 꺼내야만 좋은 작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문자학에 대한 공부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예를 들면, ‘시라카와 시즈카’라는 일본에 유명한 문자학자가 있는데 그분은 일본의 국보라 불리우는 사람입니다. 그분이 쓴 책이 우리나라에도 많이 번역되어있습니다. 자서(字書) 삼부작인 자통(字統), 자훈(字訓), 자통(字通)은 아주 명저입니다. 자원을 밝히는데 중국에 어느 문자학자보다도 깊이 있습니다. 한자의 세계, 갑골문의 세계, 금문의 세계 그런 것들을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재미있습니다.
옛사람들의 지혜가 어떤 사물을 추상화내지 간소화시켜서 문자가 된 근거를 잘 밝히고 있죠, 그걸 깊이 있게 공부하면 나아갈 방향을 잘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분의 책을 열심히 공부하시길 부탁합니다.
무엇이든 공부하는 법을 제대로 알고 접근해야 한다는 초민 박용설의 교육철학은 그의 70년 서예인생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한문을 배울 때 제일 먼저 부수를 이해하고 다음 단계로 가는 것, 서예를 배울 때 전서의 필의를 먼저 알고 다음 단계로 가는 것 등의 기초 교육은 초학자가 배움에 어려움을 느끼고 중도 포기를 하지 않게 할 수 있으며, 후에 글씨의 이해도를 수준 높게 할 수 있는 결과를 낳는다.
인터뷰를 정돈하며 하나 둘, 이야기들을 가슴속으로 되새기던 중 초민 박용설의 인생철학이 하나로 모아지는 느낌을 받았다.
‘무엇이든 제일 먼저 그 근본에 접근하고 시작해야 하며, 가슴을 통하여 밖으로 배출되어야 한다.’
이러한 그의 철학과 반듯한 서예인생은 서예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한 그는 어떤 인연이든 가슴과 가슴으로 나누고, 이야기해야 오래도록 유지하며 돈독해 질 수 있다고 당부했다. 그의 정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필히 서예를 하는 젊은 청년, 중년층이 함께 고민하고 실천에 옮겨 마음속 깊이 느낄 수 있길 바란다.
인터뷰 김지수 기자
<艸民 朴 龍 卨>
약력
-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전 출품(87‘, 91’)
- 동아미술제 심사위원·운영위원 역임(동아일보사)
- 서울대학교 / 이화여자대학교 / 성신여자대학교 서예강사
- 대구예술대학교 서예과 겸임교수 역임
- 추사김정희 선생 기념사업회 고문
- 예술의전당 자문위원
- 고윤서예 주재
艸民 朴龍卨, 柔韻·正氣· 雅美의 書藝美學 追究
鄭泰洙(韓國書藝史硏究所長)
초민 박용설 작가는 누구인가?
우리나라 현대서예계에서 우아하고 세련미 넘치는 작품으로 많은 호응을 얻고 있는 초민(艸民) 박용설(朴龍卨)(이하 작가로 호칭) 선생. 현재 서예계에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중진작가로 평가받는 그는 군더더기 없는 작품세계를 보여준다. 일찍이 당나라 손과정은 『서보(書譜』에서 서예공부의 사이클을 평정(平正)에서 험절(險絶)로 다시 평정(平正)으로 돌아간다고 말한 바 있다. 현재 작가의 작품을 손과정의 논리에 견주어 보면 마지막 평정의 초입에 들어섰다고 살펴진다. 그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오늘에 이르렀을까. 우리는 그의 학서과정에 대해 궁금증을 갖게 된다.
작가는 경동고등학교 재학시절 인사동의 고문화 거리에 살게되면서 서예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 관심은 군에서 재대한 뒤 서울사대 재학시절에 학남 정환섭 선생의 문하에 입문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서예에 몰입했는데 대학미전에서 특선을 할 정도로 필재를 보이기 시작했고, 대학 3학년 때는 인사동 학남선생의 서실에 주야로 출입하면서 미협에서 개최한 대한민국서예공모전에 출품하여 학생신분으로 대상을 수상했다. 그 뒤 이화여고에서 15년 동안 교사로 근무하면서도 지필묵은 작가의 손에서 떠나지 않았다. 미술대전에서 8번의 입선과 2번의 특선을 거친 뒤 1986년 초대작가로 선정되면서 서예계에 자신의 필명을 널리 알렸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통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공모전이나 단체전에 본인이 자신있는 하나의 서체로 출품하는데 반해 작가의 경우 공모전에 출품할 때부터 한문 오체를 골고루 출품하였으니 그것은 폭넓게 공부하기 위한 소신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의지는 제자들에게 그대로 전수되어 제자들의 모임인 고윤서회(古胤書會)가 작품전을 개최할 때는 매년 각 서체별로 돌아가면서 진지하게 연구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예컨대 작가 스스로 전서를 공부하려면 214부수가 아닌 540부수를 완전히 암기하고 있어야 변통의 길이 열린다는 뚜렷한 학습관을 견지하고 있다. 이렇게 일차적으로 폭넓게 공부한 뒤 이차적으로 깊이 있게 파고드는 공부분위기 때문에 고윤서회 회원들의 작품 또한 어느 서숙에서 보지 못한 다양함이 엿보인다.
이규용의 해동시선에 ‘박이정(博而精) 정이박(精而博)’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어떤 사람이 격식이나 무엇을 선정하는 기준이 넓고도 정밀하며, 정밀하면서도 넓은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여러 방면으로 널리 알뿐만 아니라 깊게도 앎을 의미하니 나무도 보고 숲도 본다는 뜻이다. 작가는 서예공부를 함에 있어 자신이 공부해 왔던 그대로 제자들에게 전수하면서 바로 ‘박이정(博而精) 정이박(精而博)’의 공부방법을 제시했던 것이다. 최근 작가의 작업을 보면, 여러 방면으로 널리 알 뿐만 아니라 깊게도 알아야 되는 박이정(博而精)의 학서방법에 따라 농익은 작품세계가 펼쳐지고 있어 서예계 내외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작가의 작품에서 어떤 요소와 어떤 풍격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응을 받고 있을까. 그런 의문을 가지고 이번에 발표되는 작가의 작품과 과거 서론에서 말한 풍격을 견주어서 살펴보는 것도 좋은 감상방법이 될 듯하다.
부드럽고[柔), 바르며[正] 우아한[雅] 멋을 추구하는 작가
오랜 서예역사에서 서예가의 서예풍격을 형성한 가장 근원적인 요인은 개인의 기질· 사상· 감정· 교양 등의 결합으로 형성되었다. 곧 서예가는 개인의 인격적 특성과 같은 독특한 자신만의 서예풍격을 지니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예는 조형적인 면에서 음양·허실·흑백 등 상대적인 대대요소(對待要素)의 조화미를 통해 작가의 조형적 풍격을 표현하는 의상(意象)예술이다. 다만, 수많은 대대요소 가운데 이 글에서는 서예의 풍격을 강(剛)과 유(柔), 정(正)과 기(奇), 아(雅)와 속(俗) 등의 제한된 몇 가지 요소를 통해 작가의 작품을 살펴보려고 한다. 비록 제한적이긴 하나 이러한 세 가지 갈래의 서예풍격을 작가의 작품에 대입하여 조망해 보면 작가의 작품풍격을 대략적으로 가늠할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부모 자르듯 분명한 선을 긋는 것은 두 가지 요소가 하나로 융화된 작품의 경우에는 한계가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첫째, 강(剛)과 유(柔)는 흔히 양강과 음유의 미로 거론된다. 주지하듯이 양강의 미는 골(骨), 힘, 형세 등이 강조되는 요소로 장사가 칼을 차고 있는듯한 기세가 엿보이고, 모나고[方], 곧고[直], 급하고[急], 마른[枯] 등의 미적 분위기를 추구한다. 반면에 음유의 미는 운치, 맛, 정취 등을 강조하면서 평담하거나 소산하면서도 고요한 경지를 추구하는 것이 연상되므로 둥글고[圓], 감추고[藏], 굽고[曲], 윤택함이 있는 것[潤] 등을 드러내는 편이다.
예컨대 작가의 간독(簡牘) 작품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를 보면, 방필과 거침없는 강한 필세를 느끼게 된다. 전형적인 양강의 작품으로 백척(百尺)이나 되는 장대 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라, 그러면 비로소 새로운 세계가 그 모습을 보인다는 의미로 죽음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오직 죽음뿐이라는 가르침을 전하는 작품이다. 모든 번뇌를 놓아버리고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의미를 붓 끝에 담아 휘호함으로써 50년의 견고한 필력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이와 반대로 연암 박지원 선생의 <법고이지변(法古而知變) 창신이능전(創新而能典)>을 전서 대련으로 쓴 작품을 보면, 청말 전서명가들의 필의를 이어받아 능숙하고 유려하게 휘호하니 음유미가 강하게 발산된다. 작가는 둥글고 윤택함이 있는 부드러운 선을 통해 평담하면서 고요한 음유의 맛을 잘 드러내 보인다.
둘째, 정(正)과 기(奇)는 정통적인 규범과 비규범의 구분으로 보면 될 듯하다. 즉 정(正)은 상식적이며 규범을 잘 지키고, 기(奇)는 상식에 반하며 규범으로부터 멀어진다. 서풍에 있어 정(正)이란 필법과 결구에서 평정, 균칭을 중시한다. 이런 글자를 보는 사람의 인상은 친밀감이 있다. 이에 반해, 서풍상 기(奇)는 그 용필과 결구가 신기(新奇)를 추구하고, 인상은 모두 다르다. 서예는 자연으로부터 기(奇)를 얻는다. 글자의 본질을 연구해 기(奇)를 얻고 옛사람들의 굳은 틀을 부수어 독자적인 기(奇)를 개척한다.
예를 들면, 작가의 예서 대련작품 <춘풍득의(春風得意)>는 간독필법이나 비교적 정(正)의 형상을 유지하고 있다. 자간과 행간도 분포를 고르게 하고 시각적인 균형감을 잃지 않고 있어 결구에서 안정감을 느끼게 한다. 이에 반해 계사년에 휘호한 <장사전 시(蔣士銓 詩)>는 금문으로 기(奇)의 맛을 풍기고 있다. 비대칭에 변화를 가함으로써 평정과 균칭에서 멀어져 보이나 기울어진 불균형 가운데 균형의 조화를 보이며 운치를 자아낸다.
셋째, 아(雅)와 속(俗)은 쉽게 말해 우아함과 속됨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서예는 우아함[雅]의 예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문자를 소재로 하는 서예작품은 문학, 그림, 음악 등 아(雅)의 활동과 결합한다. 다른 하나는, 대개 서예를 하는 사람은 독서인이고 따라서 학자적, 학문적 분위기를 띄고 있기 때문에 이것도 아(雅)의 맛을 가지고 있다. 서예역사에서 아(雅)를 추구하는 의식은 진대(晋代)에서 일어났다. 진대 사람들은 고아자연(古雅自然)과 표일탈속(飄逸脫俗)을 중시했다. 그로부터 700년이 지난 송대(宋代) 사람들도 아(雅)를 추구했다. 황정견과 미불이 그들이다. 미불은 선인의 서예를 평가할 때 아(雅)를 중요한 표준으로 삼았다. 예를 들면 서예의 새로운 형식을 추구한 안진경이나 유공권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이 두 사람에 대해서는 속품(俗品)이라고 단정하고, 추하고 괴이한 악필(惡筆)의 시조라고 폄하하였다. 그러나 속됨[俗]은 아(雅)의 변화이고 상호 대립과 공존의 보조인자가 된다. 현대 미국에서 팝아트가 유행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다시 돌아와 작가의 작품을 보자. 작가의 임진년 초서작품 <다산선생시(茶山先生詩)>를 보면 천의무봉의 거침없는 필세와 절주감이 녹아있고 세련된 아취(雅趣)가 물씬 풍긴다. 이 정도의 서사력을 보여주려면 하루아침에 가능하지 않다. 이 작품을 통해 작가의 50년 필력을 가늠할 수 있고, 수많은 법첩을 익혔다는 것을 읽을 수 있으며, 왕희지의 글씨를 얼마나 열심히 임서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예서작품 <오월춘추(吳越春秋) 구(句)>는 간독작품으로 동세가 심하고 글자의 크기와 글자 사이의 공간이나 기울기가 차이가 나기 때문에 속(俗)의 형상이 두드러져 보인다. 동병상련은 ‘같은 병을 앓는 사람끼리 서로 가엽게 여긴다.’라는 뜻으로 선문(選文)을 통해 이웃을 생각하는 작가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다.
서성(書聖) 왕희지의 초서는 아(雅)의 극점에 도달했다. 그러나 이 극아(極雅)의 풍격은 바로 그의 단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의 아들인 왕헌지가 지적했다. 왕헌지의 글씨는 속(俗)의 대표격으로 그는 왕희지에게 “아버지의 서체는 기세가 부족하고 자유스럽지 못합니다.”라고 말했다. 즉, 왕헌지는 속(俗)으로 아(雅)를 엷게 하여 새로운 아(雅)를 한층 강조하고 새로운 서체를 만들어 내려고 하였다. 아(雅)를 지향하면서 되새겨 볼 대목이기도 하다.
과거 왕희지는 아(雅)의 궁극이자 서예인의 목표점이었으나 최근 국내 서예계 일각에서 첩파를 중시하는 일군의 작가들은 아(雅)를 경시하는 경향이 없지 않아 보인다. 물론 역사상 아와 속은 상보적으로 작용하여 새로운 변화서풍을 창출해 왔지만 여전히 서성(書聖)이 추구하던 아(雅)의 절대성은 상존하고 있다.
법고창신(法古創新)을 지향하며
지금까지 우리는 초민 선생의 서예풍격을 살펴보면서 부드럽고[柔), 바르고[正] 우아한[雅] 특성이 상대적으로 강(剛), 기(奇), 속(俗)의 요소보다는 우세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바로 작가만의 풍격이자 작가가 선호하는 서풍이라고 읽혀진다.
필자는 작가의 평소 삶의 모습이 이와 매우 근접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아랫사람에게도 매우 유순하고 심지어 제자들에게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을 여러 번 목격하였다. 이런 작가의 삶이 그대로 글씨에도 투영되어 부드러움[柔]을 보여준 것이다. 또한 작가는 매사에 언행이 일치하고 약속을 수행함에 있어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그렇기에 글씨 또한 차분하고 빈틈이 없고 세련미를 지켜나가고 있으니 바름[正]을 선호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무엇보다 작가의 서풍은 수많은 법첩을 섭렵한 뒤 아름답고 친근한 우아함[雅]을 굳게 지켜나가면서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있으니 올곧은 선비의 우아한 자태를 보는 듯하다. 왕우군이 3체에 능하였으나 5체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다. 이제 작가는 왕우군이 보여주지 못한 나머지 두 가지 서체에 간독과 금문의 필의까지 보여주고 있으니 앞으로 그의 끝없는 변주에 더욱 기대를 걸게 된다.
폴구젤이란 사람은 『예술에 관하여』란 저서에서 “예술 중의 추(醜)를 허위나 고의로 만들거나, 내면을 표현하지 못하고 외관만 빛나게 한 것은 부자연한 웃음과 같아서 엉터리일 뿐이다”라고 말하였다. 억지로 강하게 보이게 하거나 멋으로 기울어지게 하거나 일부러 속되게 보이도록 연출하는 것은 어쩌면 부자연스러운 옷을 걸치는 것과 같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따라서 작가가 추구하고자 하는 부드러운 운치[柔韻], 바른 기운[正氣] 우아한 아름다움[雅美]을 추구하려는 작품세계는 역사에서 일시적이지 않고 영속적으로 평가받을 가능성이 충분해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작가가 항상 염두에 두고 있는 글귀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이다. 옛 것을 본받으면서도 변화할 줄 알고 새 것을 만들어도 법도를 그르치지 않는다. 모름지기 옛것을 본받고자 하는 사람은 낡은 것에 매달리는 것이 흠이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는 사람은 전통에 의거하지 않는 것이 걱정이다. 진실로 옛것을 본받되 개변시킬 줄 알아야 하며, 새로운 것을 창조하되 전통에 의거할 줄 알아야한다. “이것이 진정한 법고창신(法古創新)이 될 것”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법고창신을 지향하는 작가의 예술행로에 행운이 있길 기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