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매거진 글씨21은 2월 1일부터 2월 7일까지 인사동 백악미술관에서 <글씨21을 빛낸 중진·원로작가 10인展>, <글씨21초대 청년 정예작가 3인展>을 개최했다. 찬바람 부는 미술계, 그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현실에 직면해 있는 서예, 문인화계에 아름다운 전시회가 열린것이다.
이번 전시는 서단과 화단에서 내로라하는 대가들이 작품 20점을 기증하여, 그 기증된 작품의 판매금은 미래의 주역인 청년작가의 후원금으로 사용된다. 백악미술관 1전시실에는 대한민국 서화단의 중진·원로작가 구지회, 김영삼, 박용설, 박원규, 백영일, 이일구, 정하건, 정해천, 조성자, 황석봉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이어 2층 전시실에는 글씨21에서 진행되었던 ‘청년정예작가 선발 공모’를 통해 선발된 청년 3인 이완, 이정, 정준식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지난 2월 1일 오픈행사에서는 많은 내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광호(팔령후 회장)의 사회로 진행되었고, 중진·원로작가의 대표로 송천 정하건 선생의 인사말씀이 있었다.
사회자의 진행으로 후원을 받는 청년작가 3인이 중진·원로작가에게 큰절을 하는 등 훈훈한 오픈행사 분위기를 이어갔다. 석태진(글씨21 대표)은 “2017 한 해 동안 글씨21에서 기획한 ‘이 작가의 思생활’, ‘원로에게 길을 묻다’라는 인터뷰에 흔쾌히 응해주시고 또, 이번 의미 있는 후원전에 선뜻 작품을 후원해주신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를 인사를 드립니다.”라고 전했다.
후원전과 초대전이 동시에 이뤄지는 전시인 ‘아름다운 동행’이 많은 분들의 관심으로 인해 단발성이 아닌 지속적인 발전이 있길 바란다. 오는 주말 인사동 백악미술관에 들러 1층과 2층에서 주는 색다른 느낌을 감상해보길 바란다.
2018. 2. 2
글씨21 편집실
書를 보는 세 가지 시선
평문을 쓰기에 앞서 우선 이번 전시의 배경을 밝히고자 한다. 지난해 11월, ‘글씨21’에서는 45세 이하의 젊은 서예가를 대상으로 작가 선발 공모를 시행했다. 정예작가의 발굴과 지원이라는 의미와 함께, 한국서예의 현재를 짚어보고 미래를 예견하고자 하는 기획이었다. 선발작가에게는 전시개최의 특전을 부여하기로 했고, 여기에 소요되는 비용은 함께 열리는 중진·원로작가의 전시를 통한 수익금으로 충당하고자 했다. 응모한 수십 명의 작가 가운데 선발한 3명의 정예는 이완, 이정, 정준식이다. 이들이 응모한 작품에서는 고전에 대한 치밀한 이해력과 자기화, 현대 예술사조에 대한 감각, 타 장르와의 조응성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선발된 세 명의 작가는 두 달이 채 안 되는 기간을 통해 전시를 준비했다. 우선 분주한 일상과 생활 속에서 시간을 쪼개가며 진지한 작품을 제작한 작가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이들이 제작한 작품에서는 우리 시대 젊은 정예작가들이 바라본 서(書)에 대한 시선들이 각각의 언어로 드러나 있으며, 향후 한국서예의 방향성이 감지된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아볼 수 있겠다.
1.
이완(李完)은 원광대학교에서 서예를 전공하고 국내외에서 여러 번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동인전 등을 통해 꾸준히 활동하고 있는 작가이다. 서예는 물론 전각 방면에서 이전과는 다른 자신만의 영역을 모색하고 있다. 이번에 선보인 작품들의 특징은 우선 다양성에서 찾을 수 있다. 한글과 한문 등 문자가 등장하고 탁본과 전각은 물론, 먹을 갈아 종이 위에 중첩한 미니멀한 작품들도 눈에 띈다. 이러한 다양성에도 전체가 하나의 덩어리로 느껴지는 이유는 먹과 붓, 한지라는 재료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가 쌓아올린 문자에 대한 조형의식과 허실(虛實)에 대한 일관되고 치밀한 계산 때문이다.
우선 한글을 쓴 작품으로‘개조심’이 눈에 띈다. 작가는 일상에서 마주하는 상투적이고 비루한 언어들을 한지 위에 채워 넣었다. 수천 년 써왔던 고상한 글귀만이 서예의 소재인가, 서예가가 아닌 사람의 글씨는 서예가 아닌가, 서예가 서예가들만의 전유물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이를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먹을 주제로 한 연작이다‘. 마묵(磨墨)’‘묵왈(墨曰)’‘고묵경마만궤향(古墨輕磨滿几香)’등인데, 먹에 대한 근래의 사유를 담았다. 요즘은 묵즙을 사용하는 방식이 부끄럽지 않은 일이 돼버렸지만, 그는 아직도 손수 먹을 갈아 쓴다. 작가가 재료에 대한 통찰의 시간을 갖는 일은 어쩌면 당연하지만, 서예가에게 먹은 재료 이상의 가치를 가진다‘. 사람이 먹을 가는 것이 아니라 먹이 사람을 가는 것’이라는 소동파의 말처럼 그는‘먹을 간다’는 서예가로서의 기본적인 행위를 통해 마치 수행자처럼 자신을 다듬는 중이다. 먹에 대한 사유는 작가로 하여금 자연스레 먹과 한지라는 물성(物性)에 집중하게 했고‘, 무제’와 같은 작품으로 연결시켰다. 그는 먹과 종이라는 재료를 통해 행위·색채·형태·구성을 극히 단순화하여 근본적인 질문으로 환원해 나갔다. 한지 위에 먹이 쌓이면 무엇이 될까, 서예가 반드시 읽혀야 하는가, 먹과 한지의 물성만으로 서(書)가 갖는 의미와 감정을 담을 수 없는가에 대한 고민이 녹아있다. 이완이 출품한 이번 작품에는 먹과 한지, 그리고 서예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고민이 담겨있기에 이 작가가 보여줄 앞으로의 행보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2.
이정(李禎)은 계명대학교에서 서예를 전공하고 성균관대학교 동양사상문화학과에서 석사를 마쳤다. 2010년부터 1년에 한 번 이상 개인전을 열고 있는 무서운 작가다. 대학 시절부터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서병오서예상·청년석재작가상을 수상하고 국립현대미술관, 대구문화예술회관, 대구중구보건소 등에서 작품을 소장한 영예는 최근에서의 일이다. 아직도 남성 중심의 서단에서 몇 안 되는 빛나는 여성 정예작가다.
이번에 선보인 작품은 출품한 작품 수인 숫자 7에 집중했다. 모두 100호가 넘는 대작들로, 작가가 선호하는 재료와 조형, 운필, 구성 등을 통해 흥미로운 개념들로 채워졌다. 우연히 떠오른 1~7이라는 숫자에 대한 생각은 각 숫자가 의미하는 동양적 사유로 옮겨갔고, 일관된 흐름의 연결 고리처럼 이어졌다. 작가가 풀어낸 숫자의 의미는 이렇다.
1; 태초의 하나는 일획의 선에서 연결되어 하나의 큰 덩어리가 되고, 2; 그 덩어리는 흑과 백, 음과 양처럼 둘로 나누어진다. 3; 그 둘은 사람이 하늘에 기원하듯 별과 연결되어 셋이 되었다. 4; 동서남북, 나누어짐의 의미를 가지며, 먹의 조각들로 표현하였다. 5; 화수목금토 오행의 특성에 걸맞은 의미의 문자들로 이어졌고, 6; 십간십이지로 음양오행설과 결합하여 만물의 길흉을 판단하는 데 쓰인 육십갑자로, 7; 기원을 나타내는 북두칠성을 나타내고, 결국 그것은 간절한 기원으로 또다시 하나가 된다고 한다.
작가가 풀어낸 숫자의 의미들은 모두 다른 것 같지만 결국 하나의 순환 고리로 이어진다. 여기에는 도가 사상의 핵심인 ‘도(道)’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도'는 모든 것의 처음이자 근원으로, 모든 만물은 여기서 생겨난다고 본다. 이 개념은 작가가 작품에 담아온 꽤 오래된 주제이기도 하다.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도는 1을 만들었고, 1은 2를 만들었고, 2는 3을 만들었고, 3은 만물을 만들었다.)
-『도덕경』42장 -
자연의 이치인 도는 하나에서 시작하고, 하나로는 생성되지 않으므로 음양으로 나뉘었으며, 음과 양이 화합한 이후 만물이 생성되었다는 논리이다. 이렇게 생성한 모든 만물은 끝없이 변화하지만 결국은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마치 자연에서 태어난 모든 생명이 결국은 소멸하고, 그 자리에서 다시 생명이 태어나는 순환의 고리처럼 말이다.
이정 작가는 요즈음 글씨를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난 채 화면을 개념들로 채워나가고 있다. 작가가 사유하는 개념을 중시하여 언어적 의미와 제작이념이 화면의 전면을 지배하고 있다. 서예의 재료와 기법, 그리고 개념미술의 접합에 대한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슬아슬해 보이는 서예의 전통과 작가가 바라본 개념 사이의 줄타기에서 그가 안착할 세계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3.
정준식(鄭埈植)은 대전대학교에서 서예를 전공하고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원에서 서예·동양미학을 전공하여 석사과정을 마쳤다. 이미 국내의 여러 공모전에서 대상을 거머쥐며 등단하였고, 여러 동인전을 통해 참신한 작품을 발표해오고 있다. 또한 ‘캘리공작소’를 운영하며 서예의 대중화를 모색 중이다. 그는 한글, 한문 등 고전서예에서 놀라우리만치 유려한 필치를 구사하고 있으며, 특히 문인화 방면에서는 치밀한 전통을 확보하면서도 새로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는 문인화단의 몇 안 되는 청년작가이다.
그가 선보인 이번 작품은 모두 매화이다. 전통시대 군자의 표상으로 여겨 문인적 이념미를 나타낸 식물을 보다 회화성 짙은 방향으로 끌고 나왔다. 먹과 순지라는 기본적인 재료를 선택했으며, 화면의 전면에 등장하는 매화 둥치는 먹과 여러 재료를 혼합한 자신만의 안료를 만들어 썼다. 전통적으로 매화의 둥치는 화면 밖에서 시작하여 안으로 들어와 자리 잡는 방식이 상례이지만 작가는 과감히 화면 안으로 들여와 둥치의 무게감과 양감을 극대화하고 있다. 바로 이 점이 작품을 더욱 회화성 짙게 만든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번 작품의 또 하나의 특징은 문인화와 매화의 두 가지 요소인 화제와 꽃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우선 화제의 부재에 대해 말하자면, 문인화의 양대 축이라 할 그림과 화제에서 불필요하다고 느낀 하나를 과감히 제거해 버린 셈이다. 이러한 작업태도에는 ‘화제를 쓰지 않으면 문인화가 아닌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했다. 작가는 문인화에서 화제를 쓰면 관객은 그 화제를 읽고, 이를 통해 작품을 분석하려는 심리를 알았다. 작가는 그림을 봐주길 원했지만, 글씨만 읽고 더는 그림을 보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그래서 화제를 완전히 제거하고 그것이 갖는 언어적 의미는 화면 곳곳에 은밀히 숨겨놓은 전각으로 대신하는 방법을 택했다.
두 번째 특징으로 그의 매화에는 꽃이 없다. 전통적 매화그림의 특징으로 거친 질감의 둥치와 섬려한 꽃의 대비를 통해 매화가 갖는 문인적 기상을 드러내는 방식이 주류를 이뤄왔지만, 그는 이번 작품에서 꽃을 과감히 생략해버렸다. 인고의 계절인 겨울을 이겨내고 향기로운 꽃을 피워내는 매화의 기본관념을 벗어던지고 있다. 화면에서는 매화가 피는 계절인 봄에 한정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계절을 확장시키는 장치로써 꽃을 제거한 것이다. 정준식이 내보인 이번 작업은 문인화의 본령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함께 시대미감에 대한 의미 있는 질문들로 채워져 있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