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정(이하 김) | 제가 류정청(劉正成) 선생님을 처음 만난 때는 1994년 북경 중앙미술학원에서 석사연구생 때입니다. 중국서법가협회에서 주관하 신화사통신사가 후원한 국제학술토론회가 있다고 하여 방청하러 새벽부터 갔었습니다. 당시 열띤 토론회 장면과 선생님과 나눴던 이야기들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런 자리에서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리우정청(이하 劉) | 반갑습니다. 24년의 세월이 지났군요. 중국에는 “현대의 사람은 현대의 역사를 쓸 수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24년이라면 거의 한 세대라고 할 수 있으니, 이제는 그간 중국 서단에 있었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 | 먼저, 리우정청 선생님을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선생님은 중국 현대 서단을 반석위에 올려놓은 분이라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1986년 중국서법가협회 부비서장으로 부임한 이래 약 20여 년 간 큰 업적 세 가지를 꼽을 수 있습니다. 첫째, 중국서법가협회의 기관지인 《中国书法》을 발행하여 고대서예와 현대 중국서단에서 모범이 되는 작가와 작품들을 선양함으로써 서예의 올바른 방향을 잡아가면서 중국현대서단을 활성화 시킨 점입니다.
둘째는, ‘전국중청년서법전각작품전(약칭 中靑展)’을 기획하고 실행한 점입니다. 직접 심사위원장(평위회주임)도 맡아 공정하고 정의롭게 진행하여 공모전의 모범을 만들어 놨습니다. 참고로, ‘중청전(약칭)’ 중국서단의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 25세~55세까지 참가할 수 있는 서예공모전입니다. 특히 기업의 스폰서를 받아 행사를 치룬 것으로 알 고 있습니다.
셋째는, 전국의 학자와 작가들을 결집하여 《中國書法全集》 총100권 씨리즈를 편찬한 일입니다. 각 권마다 이론가와 작가들이 맡아서 정리하였는데, 중국 서법사에 등장하는 작품들과 작가들을 정밀하게 고증하고 정확하게 기술하여 매우 권위 있는 책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작가는 이론에 대해서 깊이 연구하게 되었고, 이론가들에게는 작품에 대해서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 하나씩 자세한 설명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김 | 먼저, 《中国书法》은 劉正成 선생님께서 사장이자 주편으로 계시면서 매월 발행한 중국서법가협회 기관지입니다. 이 책에서는 고대 서가와 작품도 소개가 되지만, 주로 현대 작가들의 작품과 평론을 많이 싣고 있습니다. 이 잡지에서 추구하는 방향과 내용의 특징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劉 | 18년 동안 《中国书法》 주필을 맡아 발행했습니다. 처음 중국서법가협회에 부임했을 당시 치공(啓功) 선생님이 주필을 맡고 계셨습니다. 4년 동안 3기를 발행했었고, 제가 제4기부터 맡아 발행하였습니다. 치공선생님께서 주편을 맡고 계셨지만 실제적인 일은 다른 두 분이 계셨습니다. 여기서 실명을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 당시 내용은 당대 서예가들은 소개하지 않았고, 대부분 옛날 명가들만을 소개하는 정도였습니다.
특히 중청년 서예가들의 활동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소개하지 않았습니다. 미술잡지나 문학잡지 등은 대부분 당대 작가들과 작품을 소개하는데, 유독 서예잡지에서는 현존하는 작가들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제가 맡으면서는 서예고전과 원로작가보다는 현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중청년 작가들에 각별히 관심을 갖었습니다. 당대 잡지는 무엇보다도 당대 작가들과 작품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본 잡지가 이러한 기획의도의 전환은 중국서법계에 커다란 전환을 하였습니다. 본 잡지는 서예계 뿐만 아니라 미술계, 문학계, 철학계, 미학계, 고문자학계 등등 서예와 관련이 있는 여타의 학술과 예술분야를 망라하여 원고를 실었습니다. 마흔총이라는 미학자께서는 서예가 왜 예술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철학적(미학적) 문제를 다룸으로써 중국서단에 서예에 대한 관념(인식)을 전환하고 인식을 명확히 하게했습니다.
야오종이(饒宗頤) 선생은 대학자입니다. 제가 직접 방문하여 서예에 관하여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또 현재 중국서법가협회 부주적으로 계신 당시 중국미술학원 교수 천젼리엔(陳振濂) 선생이 주도하는 ‘학원파’ 서예에 대해서도 잡지에 실었습니다.
당시 ‘학원파’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사람들이 많았으나, 이에 관한 문장과 작품도 소개하여 공론화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실은 이유입니다. 제가 주관하기 전에는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 대한 관심을 두지 않았고, 특히 현대서예와 관견 된 문장이나 작가들에 대해서는 좀처럼 소개되지 않았습니다.
김 | 다음은 중국서법가협회와 《中国书法》잡지사가 주관한 ‘전국중청년서법전각전(약칭 中靑展)’의 기획 배경과 방법, 그리고 현대 중국 서단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요?
劉 | 내가 중국서법가협회에 부임한 다음 해에 ‘중청전’을 주관하였습니다. 예전에는 젊은 작가가 두각을 나타내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프로작가로 등단하기까지는 먼저 자기가 사는 지역부터 시작해 시와 성을 순서대로 거쳐 점점 전국에 이름을 알렸습니다. 이 때쯤이면 이미 늙어버립니다. 게다가 당시의 국전은 아무나 출품할 수도 없었습니다.
자신이 활동하는 지방에서 추천을 받고, 심사를 거친 후에야 출품 자격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자격을 얻어 출품하게 되지만, 서단의 보수적인 분위기로 인해 작품의 수준이나 개성보다는 누구의 서풍을 닮았느냐를 먼저 보고 입선 낙선이 결정됐습니다. 예컨대 구양순·안진경과 같은 고전적 서풍이나 치바이스(齊白石), 치궁(啓功) 등과 같은 유명한 서풍의 글씨라야만 인정받아 입선할 수 있었습니다. 북위서체나 간독 글씨, 갑골문 서체 같은 익숙치 못한 서풍의 작품은 낙선되기 일쑤였죠.
하지만 새롭게 시작한 <중청전>은 지역의 추천이나 유명인사의 추천을 받지 않고도 누구나 직접 출품할 수 있고, 개성이 뚜렷해도 입선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혁신적이었습니다. 벽촌에 사는 이라도 좋은 작품만 할 수 있다면 바로 입선을 하고, 전국에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김 | 심사방식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劉 | 심사위원의 경향이 심사를 결정하기 때문에 심사위원은 매우 중요합니다. 또 심사위원을 구성하는 일은 서단의 방향을 어떤 쪽으로 이끌고 가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전에는 대부분 북경에 있는 유명한 서예가들이 심사를 맡았습니다. 하지만 <중청전>의 심사위원 구성은 매우 획기적이었습니다. 심사위원진의 변화에는 치궁(啓功) 선생의 도움 컸습니다.
치궁선생님은 <중청전>을 기획하던 당시 중국 서단에서 중요한 위치에 계셨습니다. 그래서 운영위원장으로 모시고자 말씀 드리니까, “청년들의 일은 청년들이 알아서 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을 고문으로 모시고, 당시 대부분의 원로작가들을 고문으로 모셨습니다. 운영위원장으로 당시 60세가 안되셨던 션펑(沈鵬) 선생을 모셨고, 운영위원이나 심사위원들은 55세 미만이었던 중청년들이 맡았습니다. 제2회에서는 저도 심사위원으로 참가했는데, 제 나이가 40세였고, 가장 젊은 심사위원이었던 천전리엔 교수는 불과 30세였습니다.
또한 북경에 있는 작가에 국한 하지 않고 전국 각지에서 실력 있는 작가들을 심사위원으로 모셨습니다. 지역과 유파 나이를 초월하여 오직 실력에 따라 심사 위원장-부위원장-심사위원을 맡겼습니다.
김 | 이러한 변화들이 실제로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요?
劉 | 제5회에서 이른바 ‘광시(廣西) 현상’이라 불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심사위원들 투표를 통해서 수상작을 뽑고 보니 1등상 수상자 10명 중 4명이 광시성(廣西省) 출신이 됐습니다. 그중에는 아직 대학을 졸업하지 않는 수상자도 있었습니다.
모두가 깜짝 놀랐습니다. 광시성은 중국 외곽 지역으로 서예가 번창한 곳도 아니었고, 그 지역 출신이 심사위원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이유를 알고 보니 수상자들이 위진남북조 시대의 위진잔지(魏晉殘紙)의 서체와 서풍을 참고해서 작품을 했는데, 여태껏 공모전에서 볼 수 없었던 신선함 때문에 심사위원들이 그들에게 표를 던진 겁니다.
에피소드 하나만 더 소개하겠습니다. 1986년 <제2회 중청전>에 현대파 서예를 등단시켰던 일입니다. 본인은 전통서예 뿐만 아니라 현대파 서예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현대파서예는 서예라고 취급해주지도 않았기 때문에 <중청전>에서도 현대파 서예가 입선에 들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현대파 서예학회에 10명의 현대파 서예 작품을 뽑아 추천해주면 입선시켜주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심사에 에서는 심사장에서 저를 안아서 밖으로 던져버리고 자기들끼리 심사를 다시 하여 모두 낙선시키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제가 심사위원장이었기 때문에 이미 결정된 심사결과를 다시 번복할 수 없다고 하여 입선을 시킨 일이 있었습니다. 이렇듯 우여곡절 끝에 오늘날과 같은 다양한 서풍이 등장하고 획기적인 작품들이 자리 잡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김 | 세 번째로 『중국서법전집』 총 100권 시리즈를 펴내셨는데요, 그 배경과 과정이 궁금합니다.
劉 | 서예나 미술은 실기와 이론이 구분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실기를 하지 않은 채 이론에만 치중하다 보면 학술적 깊이가 본질에 닿지 못하기도 합니다. 순수 서론만 하는 학자들은 서예작가를 따라가기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중국서법전집』의 저자들은 중국 전역에서 이론을 겸비한 우수한 서예가들을 주로 발탁했습니다. 서예가인 동시에 학자라고 할 수 있는 분들입니다.
예를들어 진한대(秦漢代) 저자 중 한 분인 왕용(王鏞) 선생은 오랫동안 진한대의 서예에 천착해왔고, 서예술 역시 진한대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니 누구보다 높은 안목으로 예술성 있는 작품을 선별할 수 있는 셈이죠. 이렇게 하여 중국 서단에 학술적 분위기를 더할 수 있었습니다.
김 | 중국 현대 서단에는 고전주의·신고전주의·서법주의·학원파서법·민간서법 등 다양한 주장이 존재합니다. 이에 대한 생각을 여쭙고 싶습니다.
劉 | 송대의 법첩인 『순화각첩』 에 수록된 진(晉) 시대의 글씨는 전반적으로 비슷합니다. 중국서예사에서 지금처럼 수많은 유파가 존재했던 적이 없습니다. 이는 1980년대 중반부터 꾸준히 성장해온 중국서예의 현재를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느 파가 좋다 나쁘다는 지금 단계에서 말하기 어렵습니다. 오래 살아남는 것이 좋았다고 할 수 있겠죠.
김 |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더욱 건강하시고 우리나라도 자주 찾아주셔서 서예 발전에 공헌해주시기 바랍니다.
2018. 4. 30
정리 김희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