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 21

글씨와 놀다. 매거진 '글씨 21'

서예·캘리그라피

[Preview]

2018-06-11
초민 박용설 성경 서예초대전



배꽃의 흰빛처럼 청정한 삶과 예술

 

장지훈(경기대학교 예술대학 교수)

 

고전읽기를 좋아하고 옛 것을 즐기며 글씨 쓰는 것 자체를 기쁨으로 여기는 서예가 초민 박용설(이하 초민). 70평생 단 한 번의 개인전만 치렀을 만큼 세간의 이목을 끄는 데에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스스로를 담금질하며 묵묵히 한 길만 걸어왔던 그가 젊은 시절 몸 담았던 이화여고에서 초대전을 갖는다. 초민은 한국서단에서 내로라할 정도의 실력파로 알려져 있지만 좀처럼 나서거나 판을 벌이지 않는 서예가이다. 다만 불과 몇 개월 전 첫 개인전에 이어 또 전시회를 연다니 다소 의아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그 취지가 참으로 초민답다. 개인전도 그렇고 이번 초대전 또한 후학들을 위해 작품판매수익을 모두 기증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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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로서는 황금기인데 예나 지금이나 그의 마음에는 서예를 통한 영욕과 탐욕이 전혀 없어 보인다. 선현들이 붓을 함부로 휘둘러 뽐내거나 작품을 남발하지 말라는 차원에서 석묵(惜墨)을 중시했던바, 초민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진정한 석묵을 실천하고 있는 선비다운 서예가가 아닐까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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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瑪太福音) 7장 13절-14절 │ 46×44cm


초민은 온유하면서도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이다. 평소 과묵할 정도로 말 수가 적다. 하지만 말을 내뱉으면 항상 상대방을 배려하여 따뜻하고 넉넉하면서도 꼭 필요한 말 외에는 사족을 달지 않는다. 말은 마음의 소리요 글씨는 마음의 그림이라고 하듯, 그는 현란한 소리를 극도로 절제하는 삶 속에서 묵묵히 글씨로써 마음과 뜻을 표현하는 데 주력해왔다. 이는 곧 말은 간결하고 뜻은 심오하게 하라[辭簡意深]’는 지혜를 몸소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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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達腓立比人書) 4장 11절 │ 46×35cm


그래서 초민의 작품은 그의 성품처럼 요란스러운 문자조형이 아니라 군자의 향기처럼 은은하다. 그는 평소 자신의 삶을 이끌어준 동양고전과 성경의 잠언들을 소박하고 순수한 심획(心劃)에 담아 허위나 꾸밈이 없는 내면의 정서를 진솔하게 표현해왔다. 이번 성경 서예초대전 또한 이러한 삶의 연장선상에 있다.

 

작품은 충실한 전통의 바탕 위에 참신한 현대성이 공존한다. 선보이는 55점의 작품은 두 가지 측면의 관전 포인트가 있다. 하나는 전통에서 스스로 길을 찾는 서예의 품격이며, 다른 하나는 전시의 취지와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작품의 내용과 형식이다. 서예품격은 그가 평생 지향해온 서예의 본질세계라면, 내용과 형식은 성경과 서예가 만나서 이 시대에 어떠한 울림을 전할 수 있을까 하는 감상자를 위한 고민이다. 서체별로 보면 전서(篆書)10, 예서(隸書) 18, 해서(楷書) 1, 행서(行書) 8, 행초서(行草書) 8, 한글 한문 혼용작품 8, 한글고체 12점이다. 성경이라고 하면 대체로 한글을 떠올리게 되는데 초민은 많은 부분을 한문으로 된 성경서예를 선보인다. 성경의 내용만으로도 그 의미가 남다르지만, 한문오체에 통달한 서예가답게 오체를 다양하게 운용함으로써 성경구절의 의미를 온축된 서력으로 극대화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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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詩篇) 18편 1절 │ 35×60cm


한문 작품 가운데서도 오래된 전서체와 예서체로 쓴 작품이 많은데, 이는 초민이 서예의 근원으로 삼는 문자의 원류에 대한 이해와 평생 옛 것에 대한 탐구의 결정체이다. 전서작품에서는 갑골문 · 금문 · 소전 · 구첩전 등 다양한 자형의 이해를 바탕으로 성경구절의 의미를 회화성이 짙은 기하학적 조형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때로는 고박하게, 때로는 세련되게, 때로는 해학적이며 때로는 정갈한 그의 전서체는 문자예술의 근원과 생동하는 필획에 대한 철저한 학습과 예술적 감성이 응축되어 있다. 침착하면서도 통쾌한 예서작품은 고예· 목간 · 팔분예를 두루 구사하면서 간혹 전서의 자형을 혼용하는 등 고전의 바탕 위에 변화무쌍한 서풍을 형성하고 있다. 그의 행초서는 전통서예의 천착을 기반으로 자기만의 독자적인 서체미학을 이루고 있는데, 역동적이고 유려한 가운데서도 절제의 미가 있고 화려함 속에서도 속된 기운이 없는 이른바 창경발속(蒼勁拔俗)’의 경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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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箴言) 13장 4절 │ 66×34cm


한문과 한글을 혼용한 작품을 일부 선보이고 있는데, 이는 마치 한복과 양복이 한 자리에서 어우러지게 하는 것과도 같아서 자칫 이질감을 자아낼 수 있다. 그러나 초민은 한문과한글을 상하로 배치하여 신선한 장법을 응용하였고, 두 문자의 이질감을 탈피하기 위해 일관된 필세와 필의를 혼융함으로써 일체감 있는 완성도를 보여준다. 초민의 한글 작품은 대체로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방정한 자형을 다양한 필획과 결구의 응용으로 단조로움을 탈피하였으며, 성경내용과 글꼴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어 경건하면서도 부드럽고 방정하면서도 여유로운 운치가 두드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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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達帖撤羅尼迦人前書) 5장 16절-18절 │ 70×70cm


특히 한문 성경의 경우 원문을 그대로 옮기지 않고 핵심적인 단어와 상징적인 문구를 가려서 의미에 대한 전달력을 극대화한 점은 성경과 서예가 만나는 지점에 대한 초민의 미학적성찰과 고민이 서려있다. 아울러 소품 위주의 작품은 감상자들에 대한 배려가 돋보인다.


기성의 서예전시는 오늘날 가옥구조와 무관하게 여전히 대작(大作)을 선호하는 편이다. 이는 서예의 특성상 필획과 글씨가 크면 클수록 필력과 웅장함을 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실질적으로는 소품이 더 어려운 법이다. 그런데 초민의 이번 작품은 소품이 주를 이루면서 작품 하나하나의 진면목을 살펴보면 마치 대작인 듯 필력이 온전하게 살아있다. 한 점 한 획에도 소홀함 없이 정미(精微)한 가운데서도 웅혼하고 표일한 기상이 서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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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達哥林多人前書) 13장 13절 │ 35×43cm


소품이지만 마치 대작을 마주하는 듯 작지만 메시지의 전달력과 예술성은 풍부하다. 초민의 작품은 전반적으로 간결(簡潔)하고 고아(古雅)하며 소박(素朴)하고 담백(淡白)한 느낌을 준다. 평담한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섬세하고 무성한 의취를 머금고 있다. 지극한 아름다움은 평담함 속에서 드러나듯, 필획과 글자 하나하나가 지니는 윤택하고 담담함 속에서 지극한 아름다움을 형성하고 있다. 성경의 주옥같은 내용처럼 그가 추구하는 삶과 정신이 작품과 일치되고 있다. , 배꽃의 흰빛처럼 청정한 삶과 예술세계가 작품마다 곡진하게 녹아있다.

 

서예란 붓을 잡고[] 말을 하되[], 내면의 세계를 문자로써 아름답게 전달하는 예술이다. 아름답게 서사된 글씨는 형상에 해당하지만, 그 형상을 온전하게 하는 것은 곧 마음과 관련된다. 역대로 서예를 심학(心學)’이라 칭하면서 단순한 문자예술이 아니라 마음을 담아내는 예술로 그 마음의 중요성이 강조해왔다. 그래서 서예는 본질적으로 마음의 그림[心畵]’이라는 명제에서 출발하여 글씨와 그 사람을 동일시 여기는 사고[書如其人]’를 계승해왔다. 그렇다보니 정성스러운 마음은 행실로 나타나듯 마음이 바르면 글씨도 바르다[心正則筆正]’는 심서일원(心書一元)의 사유로 이어졌다. 초민 또한 평생 서예가의 길을 걸어오면서 마음과 손의 합일[心手合一]’을 화두로 삼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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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손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모든 서예가에게 적용되는 의미일 수 있지만, 어떠한 마음을 지니는가에 따라서 그 차원은 달라진다. 서예의 역사상 성인으로 불리는 왕희지(王羲之)학식에 통달한 사람이거나 뜻있는 선비가 아니면 배워도 도달할 수 없는 것이 서예라고 언급한 바 있다. , 서예는 숙련된 기교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학문과 덕행을 겸비한 선비같은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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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 서예가는 헤아릴 수 없고 예술적 성취가 뛰어난 경우도 많지만, 학문과 덕행을 두루 겸비한 자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이러한 차원에서 평생 주일무적(主一無適) 서예에 정진하며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고, 선비다운 고결한 정신을 지켜온 초민은 지() · () · ()를 두루 겸비한 서예가다운 서예가이다. 때문에 초민이 붓을 잡고 마음을 토로하면 소박한 가운데서도 군자의 향기가 울려 퍼진다. 초민의 서예를 고귀하게 여기고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2018. 5. 23


<전시 정보>

이화여고 발전기금마련 

초민 박용설 성경 서예초대전

"배꽃에 흰 빛처럼 맑고 깨끗하라"

기간 : 2018. 5. 23 ~ 6. 5

장소 : 이화아트갤러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 B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