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 21

글씨와 놀다. 매거진 '글씨 21'

서예·캘리그라피

[Interview]

2018-08-06
이 작가의 思생활, 황방연


서예는 나에게 오만과 겸손을 

느끼게 해준 고귀한 존재 

- 성재 황방연 

 



전북 고창 출신인 석전 황욱 선생은 수전증을 극복하기 위해 악필법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자기극복과 정진으로 노년에 마지막 예술혼을 꽃피운 그는 전북 서예의 맥을 잇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황욱 선생은 슬하에 삼남일녀를 두었었으나 사상 문제 등으로 인해 월북하여, 곁에 남아있던 막내에게서 얻은 장손인 성재 황방연에게 집착하였다.

 

성재 황방연은 어릴 적부터 이어온 조부 황욱 선생의 관심 속에서 서예를 시작하였으며, 갑작스러운 사고로 잠깐의 방황의 시간 속에서도 그를 이끌었던 것은 바로 황욱 선생이었다. 서예, 문인화 등 한 가지에 몰입하는 성향이 강한 황방연은 서예에 도취되어 오만함을 느끼다가도 서예로 인해 겸손함을 느끼게 되는 등 인생에서 서예란 행복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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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선생님의 호인 성재는 깰 성()자에 재계할 재()를 사용하고 있는데요, 자세한 뜻과 사용하시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원래 호라고 하는 것은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여 쓰는 것은 아니라고 알고 있어요. 저의 호(성재)는 작고하신 석전 조부께서 지어주신 호입니다. 제가 철없던 시절에 과음을 하는 것은 몇 번 보시고는 그것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지어주셨지요. 후담으로는 30대 초반에 저를 부르셔서 호를 바꿔야겠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이제는 네가 술을 그리 조심하지 않아도 되겠다.’라고 하시면서 사슴록(鹿)에 샘천()자를 써서 녹천(鹿泉)을 지어주셨는데, 저는 왠지 지금의 호를 일찍부터 사용해서 그런지 성재(醒齋)’가 마음에 들어서 감히 거부를 했었죠. 그 이후에는 줄곧 지금의 호만을 사용했습니다.

 

Q. 서예를 시작하시게 된 계기가 조부이신 석전(石田) 황 욱(黃旭 1898~1993) 선생님께 있을 것 같습니다. 조부로서의 황 욱 선생님과 서예 스승으로서의 황 욱 선생님의 다른 점이 있으셨는지요?

 

절대 나눠질 수 없습니다. 불가분입니다. 조부께서 서예를 사랑하셨던 것과 늦게 본 장손인 저를 사랑하셨던 마음은 차이가 없었어요. 조부께서는 31녀를 두셨었습니다. 당시 유난히도 사상 문제가 많았을 때였는데, 그때 장자와 둘째 아들을 다 잃으시고, 막내아들에게서 얻은 아들인 제가 장손이 되었죠, 더구나 어린 장손에게 서예의 재주를 느끼시고는 장손에 대한 집착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곤 결국 저도 모르는 사이에 서예에 빠져들어있던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20대 초반에 국전에 입선을 하거나 전라북도에서 상을 받으면서 자신감이 생기고, 오만함까지 곁들여져 서예를 꼭 해야겠다는 운명같이 느껴졌습니다.

어릴 때부터 석전 할아버지께 공부를 배웠는데, 할아버지께서는 기법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주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그분이 하시는 것을 옆에서 따라 쓰고 모습도 많이 보고 공부했어요.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그렇게 공부를 했습니다. 제가 처음 국전에 입선할 때도 실은 석전 할아버지가 쓰셨던 체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거기에서 벗어나 제 것이 따로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여초 선생님께서 서법에 대해 여러 가지를 논하시곤 할 때였는데, 그때부터 서법에 대한 서책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예술원 회원이신 일랑 이종상 선생님께 문인화 공부를 2-3년 동안 했습니다. 그 선생님께 배우면서 가장 크게 느꼈던 것은 어떤 것을 공부하고, 또 어느 것을 통해 내가 공부할 방향을 설정할 것인가에 대해 많이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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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명가서품전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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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갑작스러운 사고가 있으셨다고 들었습니다. 팔을 다치신 후 다시 서예를 시작하기 힘드셨을 것 같은데요. 그때의 일을 이야기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갑작스럽게 사고를 당해 오른쪽 팔을 다치게 되었지요. 당시 저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웬만한 사람이라면 모두 손으로 붓을 잡을 수 없는 상태가 됐어요. 그래서 방황을 하게 되었어요 다른 방황이라기보다는 이제 서예를 못하게 된다는 것에 큰 방황을 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후 전주에서 서울로 와서 당시 유명한 동방연서회에 여초 김응현 선생님께 공부를 하며 여쭤봤습니다. ‘제 손이 이런데 글씨를 쓸 수 있습니까?’하고 여쭤보니 여초 선생님께서 그게 무슨 상관이냐라고 답하셨습니다. 그분은 항상 붓을 잡는 방법에 대해 깐깐하게 말씀하시고 지도하시곤 했었는데 저한테 그렇게 말씀을 해주셨지요. 그래서 그때부터 다시 서예에 천착해도 되겠다 하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지요.

 

Q. 1993년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예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으십니다. 이외에도 여러 큰 상을 수상하셨는데요, 젊은 시절 상을 수상하던 시절의 선생님과 시간이 꽤 지난 현재의 선생님이 달라진 점은 무엇입니까?

 

제가 93년도에 대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석전 할아버지께서 건강이 위독하실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때 전시장을 가보지도 못했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생각이 드는 것이, 제가 그때만 하더라도 초서에 깊이 천착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행서에 주로 많이 중점을 두고 공부를 할 때였어요. 그 순간에 초서를 공부할 때가 되었다고 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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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한서예가30인전 2010


Q. 원광대,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등 후학들을 양성하는데 힘써주고 계십니다. 강의할 때 후학들에게 특히 강조하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습니까?


지금은 강의를 하고 있지 않지만, ‘예전에 어떻게 수업을 했을까하는 생각이 들면서 또 지금 하게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학교라는 것은 학교 나름대로의 특성이 있어서 학교가 요구하는 바가 있습니다. 학부나 대학원에서 똑같은 것만 나열하게 되면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서예라고 하는 한 가지 목표점을 가지고 이야기할 때 반드시 빼놓지 말아야 할 것들은 있습니다. 바로 인내’, ‘소양입니다. 소양이 없는 사람은 억지로 그것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소양이 있다면 또 인내가 꼭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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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서예가협회전2011(제4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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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선생님께서는 특히 초서에 일가견을 가지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초서란 어떤 예술인가요?

 

초서를 어떤 예술이라고 답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서예는 자를 쓰긴 쓰지만 서예를 예술이라고 하는 것에도 논란이 있습니다. 하물며 초서라는 것을 무조건 예술이라고 묶어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문제가 있죠. 초서를 원래부터 예술이라고 표현하기보다는, 서예 중에 초서라는 분야가 가지고 있는 예술성을 가지고 논할 수 있습니다.

글자를 표기하기 쉽게 간략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 초서입니다. 초서에는 지금 우리가 말하는 초서의 형태만이 초서가 아닙니다. 예서에서 획을 생략하여 만든 것도 초서이고, 전서에서 획을 생략하고 간편하게 한 것도 초서이며, 초서의 시작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해서나 예서와 초서를 음악적으로 비교해보면 4/4박자나 6/4박자 등의 박자 개념과 같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음악적으로 봤을 때 얼마나 놀기 좋은지의 문제이죠. 또 시로 본다면 산문시나 운율이 있는 시의 차이를 보면 이해가 쉽겠죠. 이렇기 때문에 서예 중에서 초서가 예술적으로 가장 근접하기 때문에 우리가 예술이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더 예술적으로 표현하기로는 사람의 개성, 감성, 희로애락, 자연의 모든 형상 등을 표현하기에 가장 편리한 것이 초서라고 할 수 있겠고, ‘예술이라고 말하기가 가장 무난하다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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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연명 歸田園居 70x205


Q. 위의 질문에 연계하여 초서는 어떻게 쓰는 것인가에 대해 시청자들에게 그 핵심을 얘기해 주시겠습니까?

 

초서는 초서답게 쓰면 되겠지요?(웃음) 이 질문은 제가 가르치고, 또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많이 들어봤습니다. 초서라는 것은 절대 익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무엇보다 자연스러움 속에서 해야 합니다. 당대에 장언원이라는 화가가 말하길 망상, 형상을 잃어버려야 하고 학이, 내가 생각하는 이치에서 멀리 떠나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말하는 것은 쉽지만 실제 몸으로 행 하기는 쉽지 않지요. 무엇이든 보고, 알고 하는 정도를 떠나서 보지 않고도 상상이 되는 정도가 되어야 초서를 쓸 수 있습니다.

만고의 서예 역사 속, 초서에 있어서는 당나라에 두 사람이 있습니다. 뒤집어지는 욱이라 하여 장전(張顚)이라고 불렀던 장욱과 미친 듯이 썼다 하여 회소, 이 두 사람이 초서를 완성할 때 그 과정을 표현한 것이 있습니다. 장욱의 여러 표현 중에 하나는 어느 폭포가 있는데 굵은 물줄기의 폭포가 중간에 어느 바위에 부딪혀 깨지고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 내려오고 또 부딪혀서 깨지고 또다시 모여서 내려오는 것을 보고 자신의 필법을 개발했다고 합니다. 또 회소는 스님인데, 검무를 하는 사람들이 검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것을 보고 착안하여 자신의 필법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이 취한 후에 더 좋은 작품이 나왔다고 합니다. 한유라는 대문장가가 장욱에 대해 쓴 글 중에 가장 첫 부분에 장욱이 초서로 지금 시대까지 유명한 것은 아주 취한 뒤에 쓴 글이 마음에 들어 술이 깬 후에 다시 쓰려고 했으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것은 물아망상, 나와 그 대상을 잊어버린 후에 해야 한다. 어디에 메어서 하면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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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이면서 심사위원장을 역임하셨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전부터 각종 공모전과 휘호대회의 문제점을 지적해왔으며, 지금까지 개선하고 발전해온 것 같습니다. 현재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문제점은 무엇이며 해결방안을 제시해본다면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제가 20년 전까지는 문제점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 이후부터 문제점을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제도권 자체의 관행이나 형식에 대해 잘 알지 못했어요. 제가 미술협회에 분과위원이나 이사가 되면서 관여를 하게 되었고, 그런 과정을 통해 그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알게 되고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지금에서야 후회스럽게 생각되는 부분은 너무 잘 알지 못했던 것도 있고, 어느 정도 느끼게 된 부분을 고치려고 나서거나 강력하게 반발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제 와 문제점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강력한 강제권을 가진 쪽에서 관여를 하여 약간의 강제성을 부여하지 않고서는 어렵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느냐하면, 국전이라고 하는 것은 국가단체에서 하는 것인데, 이것이 88년도에 민간단체로 넘어오게 되면서 한국예총이란 곳으로 넘어오게 되었는데 그 당시 예술인들의 소망은 국가적 관리차원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것인데 거기에서 벗어나 시간이 지나고 나니 이런 불협화음이 생겨난 것이죠. 그렇다면 이 문제는 다시 강제성이 필요할 것입니다. 아니면 단체 내에서 강력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누구한테도 다 지지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나서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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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한묵전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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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서예일품전2018

霽月鳶飛 30x180x2


Q. 선생님과 수 십 년 함께 해온 서예가 이젠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된 것 같습니다. 오랜 시간 공부해온 만큼 서예라는 것이 싫으셨을 때도 있을 것 같은데, 언제 가장 힘드셨습니까?

 

서예라고 하는 것은 아시다시피 예전에도 직업으로 삼았던 적은 없었습니다. 국가에서 녹봉을 받고 그림을 그리는 화공은 있었지요. ‘서예라고 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저에게 석전 할아버지께서 서예를 하면 잘 살 수 있다고 하셨을 때 믿지 않았고, 좋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직업으로 삼을 때도 갈등이 많았습니다.

내가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서예는 예술가만 하는 것이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느새 남들을 가르치고 있었죠. 이것으로 경제적인 부분은 해결이 되었어요, 한때 있었던 서예의 붐으로 인해 예전에 가졌던 갈등은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가르치는 것을 하다 보니 제 스스로 하는 예술에 대해 등한 시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고, 제 공부에만 빠져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스스로 오만했던 때였습니다. 하지만 오만하면 반드시 후회하게 됩니다. 그런데 제가 가지고 있던 오만함이 서예로 인해 위태로운 경계에서 조절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지금은 후회하기보다는 고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도 서예를 하는 자체가 좋고, 아직 공부할 것이 남아있다는 것에 희열을 느끼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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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후배 청년 작가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조언이 있으시다면?

 

절대로 서두르거나 조급해하면 안 됩니다. 시대적인 흐름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공부한 것은 내 스스로 빨리 밝히려고 할수록 숨게 됩니다. 중용에 보면 나타내려고 하는 자는 자꾸 숨게 되고, 감추려고 하는 자는 밖으로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서예와 아주 잘 맞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실력을 보이려고 할수록 결점이 많이 보이게 되고, 가진 것을 있는 그대로 보이려고 할 때, 장점과 결점이 나뉘어 보이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보다 더 좋게 보이려고 하면 그것은 본인에게만 그렇게 보일 뿐 다른 사람에게는 결점만 비추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 과한 것이 걱정됩니다. 어느 정도 격을 깨뜨리는 것은 필요하지만 너무 과하면 안 됩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너무 과한 것 같습니다. 대부분 회화적인 것이 강합니다. 초서에는 회화성이 필요합니다. 회화성과 모든 구도가 알맞게 잘 맞춰져야 하는데 초서 자체가 회화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존재위치를 너무 넘어버리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난해한 것이 훌륭하다는 개념은 벗어나야 합니다. 난해한 것은 말 그대로 어려운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상당히 진중하게 열심히 꾸준히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행복이라는 것이 다가 올 것입니다.

 

Q. 선생님께서는 후대에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습니까?

 

의도적으로 어떻게 되어야겠다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다만 몇 십 년 살아보니 내가 참 바보같이 서예만 해왔다는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부이신 석전 할아버지의 호 뜻이 풀이 그대로 돌 밭입니다. 밭에 돌이 많아 밭 갈기가 쉽지 않다는 거죠, 평생 돌을 주워내고 갈아내고 헤쳐나간다는 뜻입니다. 제 인생을 할아버지의 호처럼 돌밭을 가는 마음으로 살고자 함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제 서예작품도 너무 유별난 것보다는 오랫동안 천착해서 평생 서예를 사랑하고 애써왔던 것이 묻어나는 작품을 했던 작가로 기억되면 훌륭한 작가보다 더 의미가 있고 좋을 것 같습니다.

 

이번 인터뷰에서는 성재 황방연 작가의 서예 인생 중 일부를 보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가 지닌 예술관과 초서의 예술성을 느껴볼 수 있었다. 또한 이어지는 이영철 교수(동방문화대학언대학교)가 들려주는 서평을 통해 성재 황방연 작가에 대해 더욱 깊이 들여다보자.

 

2018. 8. 6

인터뷰 김지수 기자

 

 



아속(雅俗)과 전통(傳統)의 조화(調和)에서의 창신(創新)


-성재(醒齋) 황방연(黃邦衍)의 

서작(書作)에 대하여-


1.

성재(醒齋) 황방연(黃邦衍)은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비범한 재능을 보였다. 서예가였던 조부(祖父)의 가르침으로 지식에 눈을 뜬 그는 서예에 큰 포부를 품게 되었고, 10대 초반에 당시(唐詩) 1백수를 암송할 수 있었다. 조부의 가르침 속에 다양한 분야를 섭렵한 그는 성장과정에서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비롯한 한시(漢詩), 그리고 설문해자(說文解字)와 세계 각국의 문화예술 서적들을 두루 읽었다. 아울러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옛 선비(先儒)들의 고의(高義)와 문학의 체계를 배웠다.

그의 조부인 석전(石田) 황욱(黃旭, 1898~1993)선생은 가학(家學)으로 어려서부터 한학(漢學)을 배웠으며 1920년 금강산 돈도암(頓道庵)에 들어가 왕희지(王羲之)와 조맹부(趙孟頫)의 법첩을 중심으로 서예에 정진하였다. 193032세 때 고향인 고창으로 돌아와 15년간 신위(申緯)를 사숙하며 서예를 익히고, 더불어 육예(六藝)를 배우고 율계를 조직하여 가야금에 망국의 슬픔을 달래며 은둔(隱遁)하였다. 이때부터 그와 친교가 있던 정인보(鄭寅普)와 김성수(金性洙) 등은 그의 행서(行書)를 격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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蕩滌鄙吝 70X46


1960년경부터 오른손 수전증으로 붓을 잡기 어렵게 되자, 왼손바닥으로 붓을 잡고 엄지로 필두(筆頭)를 눌러 운필하는 악필법(握筆法)을 개발하여 1970년 악필전(握筆展)을 열었다. 1980년부터는 우수(右手)마저 힘들어 85세 이후 좌수(左手)악필로만 글씨를 썼다. 이때부터 역대 서예의 기교를 초월한 기세(氣勢)의 웅강(雄强)함과 순박함, 그리고 초탈함의 특징을 지닌 그의 악필 행초서(行草書)가 세상에 회자(膾炙)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무기교(無技巧)와 육예에 의한 탈속의 초연한 인품에서 유래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부친 유당(由堂) 황병근(黃炳槿, 1934)선생은 석전 선생의 3남으로 사단법인 성균관유교총연합(成均館儒敎總聯合) 전북본부회장을 거쳐 성균관장(成均館長) 직무대행을 수행하였다. 그는 일찍부터 우리의 전통문화 발전에 관심을 같고, 현실의 물질문명 노도(怒濤)에 밀려 우리의 수 천년동안 숭상했던 도덕적 가치윤리를 회복하는데 혼신은 다하였고, 더욱 선친이신 석전의 작품을 비롯한 수많은 문화유품(文化遺品)을 박물관에 모두 기증하였다. 이는 그의 평소 소신인 문화가 있고, 신의(信義)가 있는 올바른 세상을 이룩하기 위한 몸부림의 일환이었다.

이처럼 조부와 선친의 서예와 유학(儒學), 그리고 육예를 아우르는 가학은 그대로 성재(醒齋)에게 전해졌다.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조부의 작품 활동을 곁에서 도와 드리며, 왕희지(王羲之)<낙의론(樂毅論)>을 비롯해 구양순(歐陽詢)와 조맹부(趙孟頫)의 법첩(法帖)을 익히고, 진보적인 사고를 배양하였으니 성재의 사상과 작품의 품성, 그리고 문화를 일깨워 준 스승은 조부와 부친임이 틀림없다.

 

2.

()와 속()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는 억지로 꾸며 부자연스럽고 어색하며 교활하지 않는 것을 이른다. ()와 속()은 상대성과 역사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구체적인 함의는 꾸준히 발전하고 변화되는 중이다. 고대에는 아()와 속()을 둘러싼 대립이 심한 편이었으나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환경에서 아()와 속()의 대립과 구별은 계속 사라지고 있다. 고대에는 정(), 즉 후세에게 남길 수 있는 사물을 아()라고 했다. 문예방면에서 아()는 보통 품위가 높고 우아함을 가리킨다. ()의 이상적인 모델은 사상적 함의가 넓고 크며 숭고하고 심오하며 선진적이고, 상상이 풍부하고 아름다우며 경계가 고결하면서 우아하다는 것이다. 반면에 속(), 또는 통속적인 것은 주로 문학예술 가치의 세속화 경향을 대변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는 어떠한 심오한 사상적 함의(含意)를 추구하지 않고, 알기 쉬우면서 많은 사람이 받아들이기 쉬운 방식으로 만족을 추구한다. 또한 대중에게 보편적이고 광범위한 예술적 취향을 만들면서 매력적인 오락적 색채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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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年 -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예부문 대상


그러나 아()와 속()은 동태적 파악의 역사 범주로 시간, 장소, 조건의 변화에 따라 바뀌어갔다. 문학예술발전사에서 당시 속()하다고 여겨진 것들은 후대에 아()한 것이 된다. 다시 말해서 아()와 속()에 대한 관념의 발전과 변천 과정을 통해 이들은 상호 의존하는 두 개의 문화 취향(趣向)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함이 없으면 소위 말하는 아()함도 없고, ()함이 없으면 속()함도 없는 법이다. ()의 문화는 속()의 문화와 상호의존하면서 서로 포함되고, ()문화가 속()문화에서 영양분을 흡수하지 못하면 아()한 문화는 생길 수 없고 성장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속()문화는 모든 아()문화를 배양하는 어머니라고 할 수 있다. ()문화는 이전의 속()문화에서 발전된 것이며, 모든 속()문화는 아() 문화로 발전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하나의 문화가 문화사에 오래도록 기억되려면 반드시 속() 단계에서 아()의 단계를 거쳐야 하며 최초의 상태에서부터 정형화(定型化), 다양화(多樣化), 추상화(抽象化) 과정을 겪어야 한다.

엄격히 말하면 아()와 속()의 판단은 심미적 대상과 심미적 주체 사이의 객관적인 관계에 달려있으며, 사물의 유용성과 감상자의 가치관에 따라 달라진다. ()와 속()에 대한 개별적인 판단은 감상자와 감상 대상의 가치 관계만 반영할 뿐, 심미적 대상의 아름다움()과 추()함을 결정지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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博觀約取 厚積薄發 180X32


옛 것은 질박하고 지금의 것이 아름다운 것은 정상적인 순리이다.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고 질박한 것을 경시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손과정(孫過庭)내용의 질박함은 시대의 발전에 따라 생기고 형식의 아름다운 꾸밈은 풍속의 변화로 인해 바뀐다. 비록 최초의 문자가 말을 기록하고자 생겨났지만 시대의 풍조가 바뀜에 따라 나중에 글자도 자연스럽게 순박하고 인정이 두터운 곳으로부터 천박한 곳으로 흐르고, 서풍(書風)도 질박함에서 아름다운 꾸밈으로의 변화를 여러 차례 거듭했던 것이다. 앞사람을 계승하면서도 또한 변혁을 이루니 만사의 발전 법칙이란 항상 이런 것이다. 옛사람을 배우고 계승하면서도 시대의 기풍에 어긋나지 않고, 또 당대의 사조에 순응하면서도 현세의 병폐에 동화되지 않는 것을 숭상할 수 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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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한서예가30인전 2010



서예는 고의(古意)’고기(古氣)’를 강조한다. 이는 금석기(金石氣)를 바탕으로 다변(多變)을 말하는 것이다. ‘고의를 숭상하고 고기를 숭배하는 것은 우리의 전통문화의 본성 중 하나이다. ()대의 조맹부(趙孟頫)는 고의설(古意說)을 제창했고, ()의 왕탁(王鐸)과 부산(傅山) 등도 옛 것을 숭상했다. 금석기(金石氣)의 주요 심미적 특징은 기백이 있어 힘차고 박력이 있다는 것이다. 금석기는 일종의 강건한 아름다움으로 서양 미학에서 말하는 숭고함에 가깝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금석기는 남북조(南北朝)와 그 이전의 금석비각(金石碑刻) 서예에서 표현한 심미적 특징 또는 미적 흥취이다. 이는 소박하면서 온화하고 웅장하면서 그윽한 기운과 거칠고 호방한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금석기를 지닌 작품의 선은 힘이 매우 넘치고, 입체미와 율동미가 풍부해 포세신(包世臣)그 결구(結構)가 기이하면서 뛰어나고 풍성하면서 조밀하며 변화가 다양하고 자연스러우며, 그 풍격은 고상하면서 힘이 넘치고, 기운은 소박하고, 골육(骨肉)은 풍성하고 아름다우며, 천진난만하고, 당당하면서 완전무결하고, 그 풍부한 함의와 낭만적인 분위기가 아무리 보아도 싫증나지 않게 한다고 말했다. 서예에서 질박한 선, 험준한 결구, 역동적인 기세, 고상하면서 순박한 품격 등은 모두 금석기를 표현하는 말이다.

유희재(劉熙載)글씨는 그 학식과 같고 그 재능과 같으며, 그 취향과 같으니 결국에는 그 사람과 같을 뿐이다고 하였다. 이는 서예가와 예술작품 간의 상호 관계를 강조하는 말이다. 서예작품의 고하(高下)는 서예가의 학식, 재능, 취향 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후 강유위(康有爲)는 옛사람들의 언급을 바탕으로 무릇 글씨란 형학이다(蓋書形學也)”라고 하며 廣藝舟雙楫에서 고인(古人)들은 글씨를 논하며 세()를 우선으로 삼았다. 중랑(中郎)구세(九勢)’라 하였고 위항(衛恒)서세(書勢)’라 하였으며, 희지(羲之)필세(筆勢)’라 하였다고 말했다. 따라서 세()는 형()의 뒷받침을 벗어나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심지어 형()이 있다고 해서 꼭 세()가 있으리란 법은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세는 형을 바탕으로 해야 비로소 자유로이 모습을 바꿀 수 있고, 형과 세의 상호 의존과 대체 불가능한 관계는 형신겸비(形神兼備)’의 미적 이념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는 분석 판단으로는 개념(槪念)이외의 지식을 얻을 수 없으며 진정한 창조적인 지식은 전부 종합 판단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서예 학습도 이러한 종합적인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은 전통 서예를 토대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유일한 방법이면서 노력하고 실천하여 증명해낸 진리이기도 하다.

 

3.

성재의 서품(書品)에는 ()’()’이 내재되어 있다. 아울러 필기(筆氣)’체기(體氣)’가 어울러졌으며 원방(圓方)이 함께한다. 그의 서예는 소박하면서 무게가 있는 필기와 조밀하고 웅장하며 행기(行氣)가 구애 받지 않고, 순박하면서 온화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체기가 있다는 말이다. 필력(筆力)필기이다. ‘필기’, 필력 표현에 대한 감상은 구체적으로 필획의 풍성함과 빈약함, 운필 리듬의 빠르고 느림 등에 대한 심미적 인상이다. 그의 글씨를 보면 필기가 매우 소박하면서 힘이 넘친다. 이는 부산(傅山)의 예술 형식과 심미적 효과에서 놀라울 만큼 일치한다. 운필(運筆)에서의 공통된 특징은 직필(直筆)은 둥글고, 측필(側筆)은 네모지기 때문에 대부분의 필획이 원필(圓筆)이다. 운필에서 제필(提筆)’법을 많이 활용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부산의 필법을 약간 바꾸고 있음이다.

서예의 미묘함은 전부 운필에서 비롯된다. 성재작품의 각진 획은 돈필(頓筆)을 활용하고, 둥근 획은 제필(提筆)을 활용한다. 제필은 중함(中含)이고, 돈필은 외탁(外拓)이다. 중함을 활용하면 소박하면서 힘이 있고, 외탁을 활용하면 웅장하면서 강하다. 중함은 전서의 서법이고, 외탁은 예서의 서법이다. 제필은 부드럽고 완곡하고, 돈필은 정교하면서 또렷하다. 원필은 쓸쓸하면서 고상한 반면, 방필(方筆)은 단정하면서 침착하다. 제필은 힘이 넘치고 돈필은 조화롭다. 원필은 한데 얽혀있는 것이고 방필은 펼쳐지는 것이다. 원필에서 한데 얽혀지지 않으면 위축된 것 같고, 방필에서 펼쳐지지 않으면 정체된 것 같다. 원필이 가파르면 기세가 강해지고, 방필이 반듯하지 못하면 거센 느낌이 든다. 제필은 허공에 떠있는 가느다란 거미줄과 같고, 돈필은 웅크리고 앉은 사자와 같다. 미묘한 점은 방필과 원필을 동시에 활용하는 것이다. 각이 지지도 않고 둥글지도 않게, 각이 졌으면서도 둥글게 보이는 원방필(圓方筆)의 조화가 눈에 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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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는 그의 행초서(行草書)에서 전필(篆筆) 또는 원필(圓筆)을 사용했기 때문에 소박하면서 힘이 있고, 고상하고 속되지 않은 심미적 효과가 느껴진다. 그는 원필, 삽행(涩行)의 운필 방식을 많이 활용하였기 때문에 필획이 웅대하면서도 소박한 힘이 느껴진다. 이러한 필력의 속도는 매우 느리지만 과감하고 결단력 있으면서 막힘없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그의 글씨는 기백이 넘치고 힘찬 심미적 특징이 보다 충분하게 구현될 수 있었다.

그는 역대 초서 작품 가운데 부산(傅山)의 작품을 좋아한다. 그러나 본인의 행초서 작품에서는 전서(篆書)를 인용하여 행초서로 들어가는 방법을 활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행초서에서 전필(篆筆)을 많이 사용했고 필기가 자연스럽고 입체감이 풍성한 필획을 썼다. ()의 형태가 둥글면서 자연스러운 전서의 특징, 점과 획이 소박한 예서의 특징, 점획이 다변하는 해서의 특징, 필획이 역동적인 행서의 특징 등 그의 필세(筆勢)는 웅장하면서 강한 필력, 역동적인 기세, 소박한 모양, 다양하게 변하는 모습 등의 심미적인 특징이 종합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므로 작품의 전체적인 효과를 보면 광활함과 당당함, 그리고 수려함과 강건한 기상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는 결자(結字)와 장법(章法)을 매우 중시했다. 등석여(鄧石如)가 제시한 계백당흑(計白當黑)을 통해 글자의 짜임새와 구조의 핵심을 깨달았고 장법을 강조한다. 특이 위비(魏碑), <석문명(石門銘)><정문공(鄭文公) 등의 마애(磨崖)의 독특함과 고상함을 좋아한다. 그의 소소밀밀(疎疎密密)’의 장법은 여기에서 기인하였을 것이다.

또한 그는 행기(行氣)’를 중시했다. 행기(行氣)는 필세(筆勢)의 감성을 드러낸 것이자 필세에 관한 심미적 인상을 일컫는다. 서예는 일회성이므로 모든 서예 결과물은 연속적인 운필 활동을 통일시켜 하나의 유기적인 존재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구체적으로 필적에 나타나며 필획과 필획, 글자와 글자 사이에서 선후연결과 조화 등 필순화(筆順化) 현상과 시간적인 관계를 드러낸다. 그러나 그 본질은 필력(筆力)의 연속적인 움직임과 그 표현이다. 이렇게 작품 형식 안에서 비춰지고 체험하는 연속적인 움직임이 바로 행기이다. 서예에서 행기는 이어짐과 끊어짐이 있다. 행기의 이어짐은 필획과 필획, 글자와 글자 사이에서의 연결로 나타나며, 행기의 끊어짐은 필획과 필획, 글자와 글자 사이에서의 돈좌(頓挫)로 나타난다.

성재 작품에는 행기의 일탕(逸宕)함이 있다. 여기서 ()은 글씨를 쓸 때 운필이 힘이 넘치고 거침없이 들어가며 필세가 강하다는 뜻이고, ()은 글씨를 쓸 때 필획이 굳세고 도도하며 법도를 잃지 않음을 뜻한다고 소식(蘇軾)은 말했다. 바꿔 말하면 글씨를 쓸 때 필기(筆氣)의 움직임에 따라 붓을 사용하여 필세(筆勢)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성재 서예작품의 전형적인 유형이다. 운필은 역세삽진(逆勢涩進) 방식을 활용하였다. 그래서 행필(行筆) 도중 필력이 가로막히고 필획이 멈추려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때 필호(筆毫) 자체의 탄력이 계속 나타나기 때문에 필획이 끊어지지 않는 현상이 나타난다. 필호의 탄력이 지면의 마찰력을 극복하면서 필봉(筆鋒)은 다시 앞으로 움직이는 릴레이 경주 같은 느낌이 들게 한다. 이처럼 그가 새로운 힘을 추가하는 곳에서 필호는 압박을 받기 때문에 탄력이 증가한다. 그래서 필호의 탄력이 다시 생겨나고 필호가 한층 더 전진하는 곳에서 필획 위에는 예상치 못한 절점(節點), 즉 필획형태의 우연성이 생겨난다. 이렇게 쓴 필획은 뜻밖에 생기기도 하지만 이러한 현상이 바로 필세(筆勢)의 생동감 있는 표현, 즉 행기(行氣)의 존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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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순박하면서 온화한 분위기가 그의 서예의 또 다른 특징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소박하면서 힘이 있는 필기(筆氣), 조밀하면서 웅장한 체기(體氣), 아무 것에도 구애 받지 않는 행기(行氣), 부조화의 매력을 지닌 장법(章法), 농담(濃淡)이 적절한 묵법(墨法)에 따라 달리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그의 서예 작품은 대부분 행기(元氣)가 왕성한 심미적 인상을 준다. 소박하면서 웅장한 힘과 기이하고 변화무쌍한 형태와 역동적인 기세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고상함과 소박함, 그리고 편안하고 웅대함, 자연스러운 생동감과 당당하고 강인한 심미적 효과를 갖추고 있다.

성재는 금석기(金石氣)를 기초한 강건한 기운이 이끄는 중화(中和)의 미()를 강조한다. 중화미(中和美)에는 순박하면서 예스러움과 소박하면서 힘이 넘치고, 웅대하면서 자유분방함과 질박하면서 온화함, 그리고 고상하면서 중후함과 웅장하면서 소박함이 뒤섞여 이루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서 성재의 작품에서 태허(太虛) 기운이 움직이는 금석기와 중화미에 바탕한 원기(元氣)가 넘치는 숭고하고 존엄한 아름다움의 풍격이 보여 짐은 여기에 있다.

물론 그의 서예작품 모두가 지고지선(至高至善)하지는 않을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말하면 다소 어지러운 점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룬 새로운 형식의 초서는 완전무결의 경지로 나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의 서예 작품은 웅장하고 강인한 기백과 소박하면서 온화한 분위기가 느껴지지만 정교한 예술 형식이 결핍된 경우도 있다. 말하자면 그의 글씨는 변체(變體)에서 정체(正體)로 되돌아가기 위한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성재 서예의 중대한 의의는 바로 여기에 있다. 신서체(新書體)를 창조하려는 서예가는 반드시 이전의 정체를 포기하고 용감하게 이러한 과도기 상태 변체를 뛰어넘어야 하며, 새로운 정체를 창조하는 부정(否定)의 부정과정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그가 추구하는 서예의 새로운 길은 더 많은 계승자가 참여해야만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4.

황방연(黃邦衍)은 진보적인 사고를 가진 서예가로 인품의 절개와 지식의 함양을 중시한다. 조부 밑에서 체득한 성현대도(聖賢大道)에 대한 깨달음은 그의 성향과 서법창작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어릴 적부터 훌륭한 가학과 타고난 천성(天性)에 기초한 박학다식(博學多識)함은 그의 서예로 여실히 증명되었다.

본고는 성재의 서예작품에 대한 통시적(通時的)인 단편(斷篇)에 불과하다. 그의 서작(書作)이 적지 않고, 일찍이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는 등 많은 수상과 경력을 갖고 있어 일일이 평가하는 데는 필자(筆者) 능력의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본고의 미흡한 부분에 대해서는 모두다 필자의 아둔함에 기인되며 동도자(同道者)로서 건강하고 계속된 훌륭한 작품을 창신(創新)할 것을 간곡히 바라며 글을 맺는다.

 

東方文化大學院大學校 敎授 李永徹 두손모음

20188

 

<약력>

성재(醒齋) 황방연(黃邦衍) 약력

 

1954年 生

서예가 서예 전각 서각

전주대학교 학사

 

원곡 서예상 수상(93)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예부문 대상 수상(93)

자랑스런 향토인상 수상(94)

원광대학교 서예과 출강

원광대학교 동양학대학원 겸임교수 역임

동방대학원대학교 지도교수 역임

대한민국 서예대전 심사위원장 역임

국제서예학술연구회 부회장

유예회 주재

서실 : 서울 종로구 인사동 417. 건국빌딩 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