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 21

글씨와 놀다. 매거진 '글씨 21'

서예·캘리그라피

[Review]

2018-10-01
가람 신동엽 회갑기념 개인전 개최


가람 신동엽 개인전

가람유묵사십재(伽藍游墨四十載)”





맑은 정신, 맑은 삶 선경에 이르는 길

이영신(시인)

 

사람에게 인품이 있듯이 서예에는 서품이라는 말이 있다. 둘의 관계는 뗄 수 없는 관계로 여겨진다. 글씨는 곧 그 사람, 서여기인 書如其人이라고 한다. 작가가 써 놓은 글자 한자에는 그 마음이 보인다는 뜻으로 일자견심一字見心이라고 한다. 또한 한나라 때 양웅(楊雄)이라는 사람이 글씨는 마음을 그려놓은 것이다 서심화야書心畵也라고 했단다. 그 말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갈래로 나눠질 수 있겠으나 서품과 인품의 상관관계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렇게 쓰다 보니 서예가 다른 예술과 달리 작가의 순수한 내면세계를 아주 중요시하는 예술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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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엽선생의 아호는 가람伽藍, 가람嘉嵐이며, 당호는 지주산방 砥柱山房이라고 쓴다. 伽藍의 어원은 승가람마僧伽藍摩에서 온 것으로 승려들이 도를 닦는 곳을 의미한다. 嘉嵐은 깊은 산 봉우리를 은은하고도 아름답게 감싸고 있는 이내, 그 모습을 뜻하는 듯하다. 지주 砥柱란 중국 황하에 있는 기둥 모양의 돌을 가리킨다. 위가 판판하여 숫돌과 같은데,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도 우뚝 솟아 꼼짝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어려운 시절을 의연히 살아가는 선비의 상징이다. 셋 다 모두 선생을 잘 아는 분들이 선물한 호인데 참 딱 들어맞는다. 마치 승려가 사찰에서 구도의 길을 추구하듯이 매일 붓글씨를 쓰고,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한 눈 한 번 팔지 않고, 묵묵히 서예인의 길을 걷고 있는 모습이 그대로 담겨있다. 은은하게 빛이 나는 듯해서 보기가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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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 선생은 획을 구사하는 능력이 뛰어나며, 조형적 미감이 탁월한 작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왜 아니겠는가? 이미 11살 때 학교에서 붓글씨를 써내고서 최고라는 칭찬을 받았다. 그 때를 서예 입문기로 친다면 근 50년 서예의 길을 걸어왔다. 고교시절엔 서양미술에도 심취하여 석고데생으로 줄리앙, 비너스를 그리면서 수채화, 유화를 완성하였다. 마티스를 좋아하고 고흐를 흠모하고 피카소를 통해 아프리카 미술에 관심을 갖고 게르니카작품을 통하여 역사의식에도 어렴풋이 눈을 떴다. 20대 초반에는 서양화 개인전을 하고 국전에 출품한 이력도 있다. 그러다가 우연이었는지 필연이었는지, 한 서실을 방문하여 묵향에 매료되고 글씨에 반하는 일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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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본격적으로 서예의 길에 들어서서 서예가로서의 탄탄한 기반을 닦고 초대작가가 되고 예술세계 이외의 다른 길에는 곁을 주지 않았다. 그러던 중 중국현대작가의 작품전에서 중국의 마백락馬伯樂 화백의 작품을 접하고는 수묵화의 화법을 익히는 시간을 갖는다. 2002년에는 마화백과 2인전을 열기도 하였고 지금까지도 교류를 이어오고 있다. 서화동원書畫同源이라고, 글씨와 그림의 근원이 같다고 하니 어려서부터 익혀온 다양한 필체며 미술에 대한 기본기, 탄탄한 필력이 더해져서 오늘에 이르러 조형 미감에 있어서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것이리라.

늘 겸손하고 어느 자리에서나 상대방을 배려하는 가람선생은 여러 해 전에 작고한 구상 시인과 교류하면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배웠다고 말하였다.

인간 존재와 우주의 의미를 탐구했던 구상 시인의 시 한 편을 보자.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 오늘전문

 

우주 전체에서 보자면 지구는 조그마한 별 하나다. 모래알만큼 조그마한 별, 여기에서 사람으로 목숨을 받고 한 사람과 인연을 맺고 오늘 하루를 산다는 것은 기적과 같다. 시를 읽다 보니 가람선생의 생활태도와 인생관이 오롯이 담겨있는 것 같다. 두 사람이 마음을 나누고 서로 격려하며 예술가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공감대, 마음을 내려놓는 한없이 겸손한 자세와 오늘을 잘 살고자 했던 의지로 인해 가능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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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선생은 또한, 조선후기 대학자이자 예술가로 160년 전에 이 땅에 살다간 추사 김정희의 문자향 서권기文子香 書卷氣를 늘 가슴에 품고 있다. ‘가슴속에 만권의 책이 있어야 그것이 흘러 넘쳐 그림과 글씨가 된다는 말을 좋아한다. 가람선생은 늘 글을 가까이하고 시를 좋아하고 철학을 탐구한다. 그뿐이 아니다. 바둑을 즐기는가 하면 수선화를 기르고 꽃봉오리가 하늘을 밀어 올리는 듯한 고아한 정취를 음미한다. 그러고 보니 절해고도 제주에서 9년 동안이나 귀양살이 하던 시절의 추사가 떠오른다.

산과 들판에 피어나는 수선화를 보며 흰구름이 질펀하게 깔려있는 듯’ ‘흰 눈이 쌓인 듯하다며 마음을 달래던 추사는 수선화를 보며 아름다운 선비를 생각했다. 추사가 그리워했던 선비는 바로 오늘에 이르러 가람선생 같은 분이 아니었겠나 싶다. 가슴에 담긴 고아한 뜻은 시대를 떠나 서로 통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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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속의 청경우독淸耕雨讀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듯 보이는 글귀가 진리처럼 다가온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밖에 나가 일을 하고, 비 오는 날에는 호박부침개라도 부쳐 먹으면서 책을 읽는 정경이 얼마나 여유로운가? 요즘 식으로 바꿔보자. 열심히 일하고 쉬는 날에는 맥주도 한 잔하고 막걸리도 한 잔 하고 재미있는 영화도 보고, 조그만 집이라도 내 몸 쉴 곳이 있으면 좋은 것, 어떠한가? 세상살이가 어렵다고 한탄하기보다는 소소한 행복을 찾아 스스로 즐거움을 누려보는 것은 어떠할까?

상유이말相濡以沫莊子 내편 대종사에 나오는 말이다. 심한 가뭄으로 연못이 말라가고 있었다. 점점 더 연못은 말라가고 있는데 물고기들이 한데 모여 거품을 내어 서로를 적셔주고 있었다는 얘기다. 어려울수록 힘을 합하여 극복해나가야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암시해 주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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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하나하나 감상하며 보고 있으니, 내 마음 속이 마치 백지와 같이 깨끗하고 고요해짐을 느낀다. ‘예술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라고 말했던 독일의 작가 헤르만 헤세가 말했던 의미를 이 작품들에서 깨달았다. 서예는 흑백의 예술로 순수한 내면세계를 표출하는 예술이다. 서예를 의 세계라 일컫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가람선생이 추구하는 종극의 경지는 맑은 정신, 맑은 마음, 맑은 삶을 통하여 선경仙境에 이르는 것이다.

가람 선생 덕분에 한 작품 한 작품 보면서 행복감에 푹 빠졌음을 고백한다. 전시회를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2018. 10. 1 

글씨21 편집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