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 21

글씨와 놀다. 매거진 '글씨 21'

서예·캘리그라피

[Criticism]

2019-01-30
山下 尹鐘得의 「산하야죽도」展

山下 藝術魂 - 대나무를 통한 野生回復追求

 

權 允 熙(哲學博士·東洋美學)


 

 

바람이 능선을 스칠 때 산들은 윙윙 울었다. 귀 기울이면 바람에 쏠리는 고원의 소리는 다가왔다가 또 떨어졌다. 바람이 가파른 봉우리에 앞으로 부딪칠 때 산들은 둔중한 소리로 울면서 수직의 회오리를 일으켰고 바람이 낮은 능선을 따라서 옆으로 스칠 때 산들은 높은 소리로 울었고 눈보라가 능선을 따라서 길게 흘렀다. 우는 소리가 다가오면서 눈보라의 틈새가 열리면 흐르고 먼 산들이 다가왔고 바람에 날려서 눈보라가 멀어지면 멀어지는 소리에 따라서 산들이 멀어졌다. 눈이 쏟아지는 날에 고원의 가장자리에서는 흐려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귀를 기울이면 보인다. 겨울 고원의 가장자리에서는 시선들이 닿지 못하는 곳을 귀를 기울여 더듬게 되는데 귀로 더듬은 세상의 모습은 종이 위에 그려지지 않는다김훈, 내 젊은 날의 숲, 문학동네, p.302~303.

 

눈보라가 치는 우리 반도 겨울 산의 모습을 어느 소설가는 이처럼 읊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정경이다. 이는 겨울의 야생(野生)이다. 날씨가 차가운 겨울의 야생은 추위와 굶주림의 상징이다. 또한 스산함과 긴장감이 함께 있다. 야생은 꾸밈이 아니다. 야생은 원시이며 순수이다. 이는 곧 자연이다.

 

 

··전각가인 산하 윤종득(山下 尹鍾得, 이하 산하’)은 야생을 화두로 삼아 전시를 열었다. 대나무를 소재로 한 <산하야죽도(山下野竹圖)> 이다. 왜 하필 야생을 주제로 삼았을까? 그는 야생의 회복이 예술의 바탕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야생은 생명력이 특징이다. 여기에는 역경과 시련이 함께 있고, 허기와 굶주림도 있다. 그런데도 그는 야생을 꿈꾸고 이를 화두로 삼았다. 야생은 생명이 중심이고 생명의 출발이며 원초이다. 生命이란 살아 있는 것이다. 산하의 야생은 예술에서 생명력의 회복을 도모한다. 이를 통해서 자신의 예술 세계의 바탕을 굳건히 하기 위했음이리라.

<산하야죽도> 전의 소재인 대나무는 우리에게 너무 친숙하다. 유가 문인사회에서 대나무는 문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특히 덕성(德性) 있다 하여 비덕물(比德物)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매화·난초·국화와 함께 사군자(四君子)라 한다. 또한 세한삼우(歲寒三友삼청우(三淸友청우(淸友한우(寒友오우(五友)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대나무의 별칭(別稱)으로 차군(此君투모초(妬母草포절군(抱節君존자(尊者고인(故人) 등이 있다. 중국 元代의 문인 식재 이간(息齋 李衎)은 대나무를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대나무라는 식물은 풀도 아니고 나무도 아니며, 무질서하지도 않고 떨어져 있지도 않다. 비록 출처는 다르나 대개는 모두 일치한다. 종자가 흩어져서 나와도 장유(長幼)의 차례가 있고, 모여서 나올 때도 부자지간의 친밀이 있다. 빽빽하면서 번잡하지 않고, 성글면서도 조잡하여 추하지 아니하며 마음이 비어 있으면서도 고요하고, 묘수(妙粹)하고도 영통하니, 가히 군자에 비유 할만하다.

, 全德品」『竹譜詳錄卷三. “竹之爲物 非草非木 不亂不雜 雖出處不同 皆一致 叢生者有長幼有序 衆生者有夫子之親 密而不繁 疎而不陋 冲虛簡靜 妙粹靈通 其可比于全德君子矣


대나무는 이처럼 군자로 불릴만하다. 이는 대나무가 본래 가진 덕성 때문이다. 일찍이 명대의 화가인 왕리(王履, 1332?)는 회화창작 과정에서 형()과 의()는 하나의 범주 내에서 서로 연계되어 있음을 다음과 같이 보여주었다.

 

그림은 비록 형을 그리는 것이나 의를 주로 하여야 한다. 의가 충분히 표현되지 못하면 형이 아니라고 해도 될 것이다. 비록 그러하나 의는 형에 있는 것이니 형을 버린다면 어디에서 의를 구하겠는가? 그러므로 형을 얻으면 의가 그 형에서 흘러나오지만 그 형을 잃는다면 어찌 형만을 잃은 것이겠는가?

王履, 華山圖序, “畵雖狀形 主乎意 意不足 謂之非形可也 雖然 意在形 舍形何以求意 故得其形者 意溢乎形 失其形者 形乎哉

 

이는 대나무의 그림도 당연히 형과 의가 중시되어야 함을 말한다. 따라서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되어서는 아니 된다. 그렇다면 산하의 대나무 그림은 어떠한 경지일까?

 

 

대나무는 그리기가 쉽지 않다. 이는 많은 관찰과 숙달이 필요하며 손에 익어야 나올 수 있다. 청대의 대나무 그림의 명인이었던 판교 정섭(板橋 鄭燮, 1693~1766)은 대나무 그림을 위하여 대나무에 천착해야 함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여름날이면 대나무 숲 한가운데 작은 침상과 같은 자리를 마련해 놓고 누워서 대나무 죽순이 자라는 것을 바라보며 녹음이 사람에게 주는 청량하고 쾌적한 감정을 체험하고 깨달았다. 가을이나 겨울날이면 대나무 줄기로 격자를 만들고 그 위에 깨끗한 흰 종이를 붙여서 바람을 막았다. 날씨가 맑은 날 달이 떠오를 때 창문에 붙여진 종이 위에 비친 대나무 그림자를 보며 천연으로 이루어진 도서를 관찰했다.

 鄭板橋, 墨竹圖」『鄭板橋文集, “夏日新篁初放 綠陰照人 直一小榻其中 甚凉適野 秋冬之際 取圍屛骨子 斷去兩頭 橫安以爲窓 用均薄溪 白之紙糊之 風和日暖 凍蠅觸窓紙上 冬冬作小鼓聲 於時一片竹影零亂 豈非天然圖畵乎


여러 대나무 그림의 名人 大家들도 이와 같이 대나무에 천착하였다. 산하의 대나무 그림은 그 만의 대나무 그림이다. 대나무에 깊이 천착한 뒤에 나온 그의 대나무는 어디에서도 출처를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린 대나무는 시선을 당기는 특이한 그림으로 다가온다. 휘어 뿌리 인 듯도 하고 때로는 줄기인 듯도 하며, 어찌 보면 난초인 듯도 하다. 묵색은 청묵으로 했는지 시종일관 맑기만 하다. 그의 대나무는 자연의 생명력을 보고자 함이었을까? 아니면 대나무의 절개보다는 안락과 쉼을 찾아보고자 하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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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윤종득, <野生竹葉圖> 148×210cm


<1> <야생죽엽도(野生竹葉圖)> 이다. 대나무를 소재로 한 148×210cm의 대형 작품이다. 산하는 대나무로 커다란 화선지 위에서 마음껏 노닐었다. 화폭에 반쯤 공간은 댓잎으로 채워 넣고 나머지 반은 공간으로 비워두었다. 커다란 화선지에 펼쳐진 댓잎은 소소밀밀(疏疏密密)이 주조(主潮) 로 되어 있다. 산하의 대나무는 이미 대나무가 아닌 대나무가 되었다. 청대의 판교는 대나무 그리기는 체격(體格)에 얽매이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요체는 마음 깊게 입신함에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는 대나무 자체보다 대나무의 정신이 중요함을 이른 것이다. 산하는 자신의 대나무를 그렸다. 이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자신의 대나무이다. 그는 자기 식으로 그렸다. 판교의 말처럼 대나무 그림은 대나무의 정신이 중요하다. 마치 산하의 대나무는 이를 보여주는 것 같다.

鄭燮, 題畵」 『鄭板橋集, “畵竹之法 不貴拘泥成局 要在會心人深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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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윤종득, <野生竹葉圖> 60×94cm


<2> 는 세 그루의 대나무를 그린 <야생죽엽도>이다. 대나무 세 그루는 화락(和樂)의 모습이다. 미풍도 불지 않아 평화로우며 댓잎은 조화롭다. 한편으로는 격정에 의한 힘으로 그린 기세도 보인다. 그러나 포근함과 서늘함이 함께 있어 댓잎의 기운은 맑기만 하다. 일찍이 청대의 문인 장경(張庚: 16851760)기운은 먹에서 나오는 것이 있고, 붓에서 나오는 것이 있고, 뜻에서 나오는 것이 있고, 무의(無意)에서 나오는 것이 있다. ‘무의에서 나오는 것이 최상이고, ‘에서 나오는 것이 다음이며, ‘에서 나오는 것이 그 다음이며 에서 나오는 것이 최하이다.라 한 바 있다. 장경의 말대로 <2>는 이미 무의에서 그려진 것 같다. “무의에서 나온다.는 것은 작가의 정신과 정감이 자연스럽게 발휘되는 것이 제일임을 보여준다. <2> 도 이처럼 산하의 흉중(胸中)이 자연스럽게 드러난 그림이다.

張庚,浦山論畵, “氣韻有發于墨者 有發于筆者 有發于意者 有發于無意者 發于無意者爲上 發于意者次之 發于筆者又次之 發于墨者下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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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윤종득, <野生竹葉圖>, 55×45cm


<3> 은 마치 버드나무가 늘어지듯 그려진 작품이다. 두 그루의 대나무가 중심이며 그 사이로 작은 줄기를 세워 밸런스를 유지하였다. 늘어 질대로 늘어진 가지와 댓잎은 이미 형해화(形骸化) 되어 버렸다. 구조의 소밀(疏密행필(行筆)의 완급(緩急)을 통하여 정감을 표현하였다. 오른 하단부의 공간은 청대의 화가인 단중광(笪重光,16231692)()와 실()이 서로 어우러지면 그리지 않은 곳도 모두 묘경(妙境)을 이루게 된다.”고 말한 것처럼 묘경을 보여준다.

笪重光, 畵筌, “虛實相生 無畵處皆成妙境


송대 대문호인 소동파는 문동(文同, 10181075)은 대나무를 그릴 때 대나무만 응시할 뿐 사람은 쳐다보지 않았다. 어찌 사람만을 의식하지 못할 뿐인가? 심지어는 자기 자신의 존재마저도 망각해 버림과 동시에 자신의 몸이 대나무와 같이 되어 버리니 그 경지는 무궁한 청신이다.”라 한 바 있다. , 이는 무아의 경지에서 부지불식간에 그려야 최고의 대나무 그림이 그려지게 되는 것을 보여준다.

蘇軾, 紀評蘇文忠公詩集29 四部叢刊, "與可畵竹時 見竹不見人 豈獨不見人 若然遺其身 其身與竹化 無窮出淸新"


<3> 은 화선지에 먹물이 잘 발려 그려진 그림이 아니다. 순지나 한지에 그렸는지 뻣뻣하고 앙상한 뼈마디 같다. 사각사각 붓이 지나가는 흔적이 보인다. 이를 통해서 산하는 그만 아는 붓 맛을 느꼈을 것이다. 이 붓 맛은 그를 무아지경으로 만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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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윤종득, <野生竹葉圖>, 60×138cm


 <4> 는 한 그루 낙낙장송을 보는 듯한 <야생죽엽도>이다. 하늘은 마치 12월에 눈이 내릴 듯 음산하다. 댓잎과 잔가지가 서로 휘감겨 있다. 담묵으로만 잘 짜인 구도이다. 구성에 있어 빈틈도 없다. 넓은 공간도 허허실실 하모니를 이루고 있다. 기법도 독특하다. 아교를 섞어 그렸는지 번짐도 유연하다. 투박하며 질박함이 아니라 세련되고 현대화된 그림이다. 또한 크기도 대작이다. 엄동설한의 야생의 자연에 놓인 대나무이다. 소나무가 독야청청서 있듯 이 대나무도 독야청청의 서 있는 모습이다. 얽히고설킨 가지와 댓잎은 앙상블을 이루고 있다. 댓잎의 사운 대는 소리가 들리듯 하엄동설한에 댓잎 부서지는 소리는 듣기만 하여도 맑고 서늘한 청량제같다. <4> 는 이를 보여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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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윤종득, <野生竹葉圖>, 60×40cm


<5> 는 횡으로 길게 누운 와불 모습의 <야생죽엽도>이다. 소소(蕭蕭)한 대 바람이 사르락 사르락 댓잎 부딪치는 소리를 낼 것 같다. 댓잎은 비정형을 이루며 상하좌우에 엇갈려 있다. 옆으로 누운 대나무는 생경하기만 하다. 이는 획일(劃一)과 범상(凡常)을 넘어 일탈을 보여준다. 이는 대나무지만 이미 아닌 듯하다. 산하가 노니는 대나무이다. 휘어진 줄기로 보아 거센 바람이 일어난 듯도 하다. 어디에서 바람이 불어왔는지도 보인다. 마치 칡덩굴이 자연스럽게 뻗어가는 듯한 모습이다.

 

 

산하는 그 만의 대나무를 그렸다. 그는 야생을 그렸다. 그의 본질은 야생이다. 야생은 원시이며 생명력의 바탕이다. 산하의 야생은 대나무를 통하여 도모하였다. 그가 도모한 야생은 그의 예술 인생의 자각과 구축에 있다. 그러나 그가 그린 대나무는 그만의 끼와 운율이 함께 있었다. 거기에는 법칙과 규율뿐 아니라 조화와 질서도 같이 있다. 이는 미학적인 측면에서 고려하여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형태론적 측면과 창작론적인 측면, 심미론적 측면에서 구분하여 심미할 수 있다. 예술에 대한 심미는 대체로 주관성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다양한 측면에서 심미가 가능하나 필자의 입장에서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산하의 <야생죽엽도>는 형태론적 측면에서는 소산간원(疏散簡遠)의 미학으로 심미하여 볼 수 있다. 소산(疏散)과 간원(簡遠)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측면에서의 심미이다. 소산과 간원은 원인과 결과의 미학이다. , 소산함으로 인하여 간원함이 드러난다. 산하의 대나무는 야생을 탐하고자 설정된 소재이다. , 대나무를 통한 야생의 탐색이다. 대나무가 가지는 선비정신이나 기개나 맑음이 목적이 아니다. 그보다는 야생에서의 생존이 더욱 중요하다. 소산과 간원의 미학은 그의 야생을 담아내기 내기 위한 방법이다. 이는 형태적인 측면에서의 미학이다.

 

둘째로 창작론적인 측면에서는 정유리무(情有理無)의 미학이다. ()과 리()는 인간 심성의 주추를 이루는 감성과 이성의 개념이다. 정유리무의 미학은 정신보다는 감성을 위주로 심미가 되기 때문이다. 이는 대부분의 그림에 화제가 없음도 이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화제가 없어 작가의 사상과 철학은 살펴보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대나무 그림에 담긴 정감이 심미의 주조가 되어 정유리무의 미학으로 심미 된다. 송대의 학자정치가였던 심괄(沈括) (1031~1095)王維의 그림을 보고 마음에서 얻어 손으로 응하니 뜻이 곧 이루어졌다. 고로 이치를 세워 정신 경계에 들어가니 멀리 하늘의 뜻을 얻었다.”고 말한 바 있다

沈括, 書畵」『夢溪筆談得心應手 意到便成 故造理入神 逈得天意

산하의 대나무 그림은 화제가 없어도 감성으로라도 심미 됨은 심괄의 말처럼 마음에서 얻어 손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대나무는 정신성도 드러나게 되었다. 창작론적인 측면에서 그의 손에 익은 대나무 그림에 의하여 드러난 심미가 情有理無의 미학이다. , 그만의 특성이 그의 독특한 미학이 되었다.

 

셋째로 심미론적인 측면에서 미학은 생취일운(生趣逸韻)이다. 생취(生趣)가 활발발(活潑潑)이라면 일운(逸韻)은 어울림이다. 생취와 일운은 산하의 흉중구학(胸中丘壑)과 흉유성죽(胸有成竹)이 있어 가능하였다. 흉중의 구학과 성죽은 산하의 손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이를 보여주는 것이 중국의 미학자인 정적(鄭積)그림을 그릴 때는 모름지기 먼저 뜻을 세워야 한다. 만약 뜻을 세울 수 없는데 갑자기 붓을 내리면 가슴에 주재하는 것이 없어 손과 마음이 서로 어그러지고 끊어져서 족히 취할 수 없게 된다.”에서 알 수 있다. 이는 작가의 흉중구학이나 흉유성죽이 전제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 그의 <양생죽엽도>는 생취와 일운을 통하여 야생의 경계에 들어갔다.

鄭積, 夢幻居畵學簡明」『論意, “作畵須先立意 若先不能立意 而遽然下筆 則胸無主宰 心手相錫 斷無足取


 

아버지의 마음속에서는 언어가 소멸한 것이 아니라 오래 전에 아버지를 떠나갔던 단어들이 모두 살아나서 들 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말을 내보내지 못하고 다만 흔들릴 뿐인 아버지의 입술이 그 안쪽에서 날뛰는 말들의 아우성을 전하고 있는 듯했다김훈, 내 젊은 날의 숲, 문학동네, p.256.


어느 소설의 한 대목이다. 병중인 아버지의 말을 통하여 절제의 미학과 말하기의 어려움을 보여준다. 산하의 <야생죽엽도>에 대한 글도 말을 내보내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는 아버지의 입술 같다. 마치 제대로 내뱉지 못하고 안쪽에서 날뛰는 말들의 아우성도 전하지 못하는 것 같다. 대나무는 예로부터 竹之淸이라 하여 맑음을 최고로 여겼다. 또한 竹有大夫之氣라 하여 대나무에는 대부의 기개가 있다. 이러한 대나무를 소재로 산하의 <야생죽엽도>는 그만의 격이 있다. 특히 야생을 주제로 하여 독특하고 그의 개성이 돋보이기만 한다. 산하의 이번 야생은 더 큰 예술 길의 바탕이 되리라. 이는 일종의 호연지기이면서 심호흡이다. 따라서 이를 자양분으로 한 그의 예술은 다음 행보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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