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 21

글씨와 놀다. 매거진 '글씨 21'

서예·캘리그라피

[Interview]

2017-04-25
이 작가의 思생활, 이일구


닿을 때까지, 닿고 싶어서
한국 캘리그라피의 선구자 담운 이일구

 


이일구는 사람들이 캘리그라피라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던 시절부터 이 분야의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캘리그라피의 불모지였던 한국에 캘리그라피라는 뿌리를 내리게 하고 그 시장을 개척한 창시자이자 선구자라고 말할 수 있다. 구름이라는 저 높은 이상향에 다다르기 위해 이 땅에 단단히 두 발을 붙이고 오늘도 한발 한발 잰걸음을 늦추지 않는 담운(覃雲) 이일구를 만나보았다.


1..gif


Q. 우선 본격적인 얘기에 앞서 선생님께서 사용하시는 호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담운(覃雲)이라는 호()를 사용하고 계신데요, 담고 있는 의미와 쓰시게 된 계기, 얽힌 이야기 등이 있나요?

()은 미치다, 다다른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름에 다다른다는 뜻인데 제일 높은 것이 구름이기 때문에 최고에 다다르라는 뜻으로 선생님께서 지어주셨습니다. 용산인(龍山人)과 덕숭산인(德崇山人)이라는 호도 함께 쓰고 있습니다. 충남 예산의 추사 고택이 자리한 바로 뒷산 이름이 용산(龍山)인데, 추사 선생님의 정기를 받든다는 의미로 용산인이라고 지었습니다. ‘덕숭산인은 제 고향에 유명한 고찰(古刹)인 수덕사(修德寺)가 있는데 그 산이 덕숭산(德崇山)입니다. 서예인들이 주로 고향의 산의 이름을 따서 호를 짓는 것과 같이 한 것입니다.

 

Q. 그럼 본격적으로 캘리그라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자 합니다. 선생님께서 캘리그라피를 개척하기 이전에 시작단계에는 단연 서예가 있었을 것입니다. 처음 서예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습니다. 추사 선생님의 고향에서 태어난 것이 저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 환경이 좋지 않았지만 부모님께서 공부를 할 수 있게 힘이 되어주셔서 서당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글씨, 그림에 관심이 많았었는데 한학을 하면서 신문지에 사자성어, 맹자 등의 글씨를 써보곤 했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추사선생님 후손이신 담임선생님께서 제 글씨를 보시고 서예를 권유하셨습니다. 또한 학교 주변에 추사 선생님 고택이 있었는데 그쪽으로 소풍을 자주 가게 되며 자연스럽게 서화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시골에 부모님께서는 다른 많은 부모님들처럼 면서기라고 하는 일반 행정직 공무원을 바라셨습니다. 그러던 중 시골에서 서예를 가르쳐주시는 선생님께서 종종 대회에 나갈 수 있게 도와주시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2..gif


Q. 어릴 적 추사선생님의 후손이신 담임선생님께서 선생님의 글씨를 본 것은 운명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선생님의 캘리그라피의 시작은 추사 선생님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네 그렇습니다. 어릴 적 추사 선생님 고택에 소풍을 자주 갔는데 이때 자연스럽게 서화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추사 선생님이 공부하면서 성장하셨던 곳과 가까이 접하면서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추사 선생님이 걸었던 길 쪽으로 공부를 해볼까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 부모님께서는 면서기가 되길 바라셨지만 크면서 습자대회(서예) 등에 나갔고 지도해주시는 선생님을 만나 꿈을 이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현재는 추사기념사업에 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추사 선생님께서는 누구보다 창의성과 조형성이 뛰어나신 분이셨고 이에 집중을 하셨습니다. 이런 점은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입니다.

 3..gif 

Q. 현재 한국에 캘리그라피를 열풍이 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이 시대에서 캘리그라피를 이끈 1세대이신데요, 막 시작되던 그 당시 배경과 앞으로 추구하는 방향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제가 처음에 방송사의 그래픽디자인 쪽으로 입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픽디자이너가 20~30명 정도가 있었는데 거의 대부분 미술대학을 나왔기 때문에 서예 관련자는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 프로그램 타이틀을 감각으로 쓰시는 분들을 봤는데 예전엔 몰랐지만 어느 정도 캘리그라피를 이해하고 나서 보니 그때의 타이틀 작품이 굉장히 감각적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방송에서는 일본이 그때 당시에 20년 정도 앞서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에 갔을 때 머리가 하얀 백발 신사분이 글씨를 쓰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일본이 서예 분야를 굉장히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면에서 앞서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 회사에서 저에게 캘리그라피를 활용해서 작업이 가능한지 물어,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캘리그라피의 1세대로서 이 분야를 활성화시키기 위한 방안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고 서예의 인접 학문을 공부하며 모두 섭렵하기 위하여 노력해왔습니다.

 4..gif


Q. KBS에 입사하신 후에 다양한 그래픽디자인을 공부하시면서 캘리그라피도 함께 발전한 것 같습니다. 근무하시면서 방송이나 매체에 타이틀로 쓰인 경험은 어떤 것이 있나요?

KBS에서 미술제작 국장에서 임원이 되기 전에는 실무자 역할을 하면서 방송 타이틀은 거의 대부분이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극장>, <아침마당>, <역사스페셜>, <환경스페셜>, <개그콘서트>, <이소라의 프로포즈> 등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많습니다. 낯익은 글씨는 대부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여성화장품인 <수려한>, 지난 번 <개천절> 캘리그라피 등 다수가 있습니다.

 

Q. 캘리그라피가 한 예술의 측면으로 현재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캘리그라피에서 결국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드라마도 멜로, 액션, 퓨전사극, 역사사극, 스릴러 등등 여러 장르로 나뉘게 되는데 타이틀 하나만으로 어떤 장르의 드라마인지 알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표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꼭 글씨를 잘 쓰는 달필이 좋은 것이 아니라 표현하려는 대상의 특징을 잡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기에 맞는 글씨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죠. 요즘 캘리그라피를 쓰는 사람들을 보면 대체로 한 글씨체로 내용만 다른 느낌이 많은데 캘리그라피의 서체 그 자체에서도 개성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5..gif

6..gif

7..gif8..gif9..gif

(KBS 재직 당시 캘리그라피 작업물)

 


지금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프로그램인 <인간극장>, <아침마당>, <역사스페셜>, <개그콘서트> 등 우리에게 익숙한 방송 타이틀이 모두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그는 캘리그라피의 1세대로서 지금도 여전히 이 분야를 활성화시키기 위한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

 

Q. 선생님께서는 캘리그라피에 선구자 일 뿐만 아니라 사대부들이 자신들의 심중을 표현하였다는 문인화에도 조예가 깊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인화에 대한 선생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사실 문인화를 전공으로 삼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림, 디자인, 글까지 섭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지만 문인화를 공부 할 때에는 직접적으로 와 닿았습니다. 원래 문인화는 선비들이 추구하는 예술적인 것이라 하지만 지금은 전문적인 직업화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인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작가의 느낌을 표현할 수 있는 화제, 내용이 들어갑니다. 즉 문인화는 시, , 화가 모두 들어가야 가능한 예술 세계이기 때문에 특히 좋아하는 분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인화에도 사군자, 십군자를 많이 표현하는데 자연 속의 모든 것이 문인화로 표현이 가능합니다. 이런 점이 매우 매력적이기 때문에 제 전공으로 삼고 전시도 많이 하는 등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10..gif


Q. 선생님께서는 KBS 그래픽 디자이너로 입사 후 많은 작업들을 해오셨습니다. 이러한 작품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나 관련된 일화가 있으신가요?

KBS에서 일할 때 드라마 <용의 눈물> 타이틀을 쓴 것을 보고 시청자들에게 오자(誤字)에 대한 항의가 많이 들어왔던 적이 있습니다. <용의 눈물>()’자를 한자로 쓴 것인데 이때 이라는 글자를 교육적으로 전달하기보다 의 이미지를 표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행초서로 글씨를 썼는데, 시청자들은 이를 오자라고 보고 항의를 한 것이었습니다. 예술적으로 획을 생략한 것을 가지고 오자라고 항의가 들어온 것입니다. 나는 작가이기 때문에 조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작품이 다 끝나고 그동안에 있었던 일에 대해 인터뷰와 이야기를 나누는 방송을 한 적이 있었는데 제가 직접 방송에 나가서 이 일에 대한 해명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의 일이 타이틀을 디자인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홍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제게 있었던 그런 에피소드가 캘리그라피가 직업으로 자리 매김할 수 있었던 시초가 될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Q. 선생님께서 작품에 담아내고자 했던 예술세계와 결부하여 젊은 작가들에게 당부하고자 하는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작가들(서예가, 화가)이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노력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혼()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가정신 즉 혼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재주만 믿고 노력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다고 봅니다. 또한 예술가로서의 창조 정신이 매우 중요한데,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시도하고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1..gif

 

Q. 작품 전시를 통해 재능기부를 한 이력이 있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이야기 해주실 수 있을까요?

예산고등학교 기숙사 증축기금마련 전시회를 예산고등학교와 함께 협의하여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충남 예산에 위치한 예산고등학교는 제가 졸업한 고등학교입니다. 시골 학교다 보니 좋은 환경 속에서 공부를 할 수 없게 되자 하나 둘 학교를 떠나 도시로 가는 일이 많아지자, 학교에서 학생들을 유치할 수 있게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고자 일을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기숙사증축기금 마련을 위해 60점의 작품을 출품하여 모든 작품이 판매가 되어 많은 수익을 낼 수 있었습니다. 학교 측에서는 작품 재료비를 지원하고자 하였지만, 제 뜻에 대한 오해가 생길 수 있어 정중히 거절하였습니다. 또한 이 전시회를 성황리에 마칠 수 있도록 예산고등학교 동문회에서도 큰 도움이 있었습니다. 이 전시를 통해 제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단순히 전시회에 열었다는 것이 아니라, 재능기부를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말하고 싶었습니다. 작가로서 작품을 통해서 기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굉장히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되어 많은 사람들이 참여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12..gif


Q. 지금까지 선생님의 캘리그라피 역사에 관하여 들을 수 있는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여전히 많은 작품 활동을 하고 계신데, 앞으로 새로운 계획이 있으신지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작년에 회사를 그만두게 되면서 생각한 것인데, 바로 캘리그라피의 지침서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만들고 싶습니다. 캘리그라피는 단순히 글쓰기가 아닌 디자인의 하나로 무수한 표현이 가능한 종합예술입니다. 그동안 방송과 일상생활에서 해왔던 많은 캘리그라피 작업의 자료들을 젊은 작가들이 공부 할 수 있도록 자료 준비를 준비하고 싶습니다. 또 하나는 직업화가로서의 전향을 위한 개인전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완벽주의는 아니지만 굉장히 꼼꼼한 성격이기 때문에 평소에도 전시나 도록 잡지에 들어가게 되면 제가 직접 다 디자인까지 참여하려고 합니다.


Q. 마지막으로 새로 창간하는 [글씨21]에 당부하고자 하는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글씨21] 창간호 인터뷰에 참여하게 되어 영광스럽습니다. 타 매체에 비해 많은 발전을 이룰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지나간 정보들이나 형태가 지루한 편집 말고 고민한 흔적이 많이 있었으면 좋겠고 새로운 서예가(좋은 정보, 작가)를 발굴하는 잡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서예뿐만 아니라 글씨를 매개로하는 다양한 분야를 소개할 수 있는 정보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공부하는 분들에게 많은 참고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가 작품 속에서 구현하고 싶었던 것은 자신의 ()’이었다. 혼을 담아내지 못하는 작품은 예술작품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창조정신 또한 이끌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작가의 은 작가 자신의 정신과 노력을 온전히 모두 기울일 때만이 작품 속에서 오롯이 드러난다고 그는 보았다.

 

인터뷰 김지수 기자

 

13..gif


14..gif

 

略歷

 

- 충남 예산 출생

- 생년월일 : 19560202

 

 사사

- 매정 민경찬 선생 동양화 사사

- 천석 박근술 선생 문인화 사사

- 함산 정제도 선생 서예 사사

- 석헌 임재우 선생 전각 사사

 

 학력

- 동국대학교 대학원 미술학과(동양화전공) 졸업(석사)

 

 수상

- 24회 원곡서예문화상 수상(원곡문화재단)

- 1회 로또서예문화상 대상 수상

- 15회 서예문화상 수상(월간서예)

 

 경력

- ()한국캘리그래피디자인협회 회장

- ()추사기념사업회 회장

- KBS 아트비전 상임이사

- KBS 아트비전 경영기획국장, 미술제작국장

- ()한국미술협회 초대작가, 이사

- ()한국문인화협회 초대작가

- 동지묵연회 회장

- 창매회 회장

- 한국미술협회, 일월서단 회원 등

 

 

 

------------------------------------------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시인 도종환 님의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라는 시에는 마치 개선장군과도 같은 담쟁이가 등장한다. 결코 오를 수 없는 벽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모두 함께그 길을 기필코 내고야 마는 이가 있다. 개인의 이해에서 벗어나 함께 가기를 선택한 담쟁이는 그래서 여느 나뭇잎과는 다른 모습에서 묵직한 감동을 안겨준다.

캘리그라피작가로 살아온 18년 동안 소중한 인연이 참 많았다. 그 중에서도 담운 이일구 선생님(KBS 부장, 현 사단법인 캘리그라피디자인협회장)은 마치 이런 담쟁이를 떠올리게 만드는 이다.


1999년 전통서예를 넘어 대중서예의 길을 걸으며 홀로서기에 노력하고 있을 때 선생님은 늘 많은 조언과 격려를 해주셨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전통서예를 시작해 대학과 대학원에서 서예학을 전공했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 전통서예와 문화를 아끼고 사랑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회에 나와 오롯이 전통의 길을 걷는다는 일은 쉽지만은 않았다.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겼던 전통서예가 현대적 감각을 원하는 현시대에서는 인정받지 못한 채 소외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전통서예에 디자인을 접목해 현대적 감각으로 바꾸어내는 또 다른 캘리그라피 문화와 시장을 개척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런 열망으로 도전하고 또 도전했지만 처음 가는 길이기에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 막막해 헤맬 수밖에 없었다. 1999년 캘리그라피를 시작할 때만해도 캘리그라피라는 용어조차 낯설기만 하던 때였다. 이런 벽에 부딪힌 이유는 한국에서는 글씨를 통해 대중과 소통하는 선례를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해외자료를 찾기 위해 무작정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의 편의점에서 본 일상용품엔 캘리그라피가 다채롭게 쓰이고 있었다. 편의점 라면용기, 술병 등에 쓰여 있는 글씨를 보고 너무나 맘에 들었다. 부족한 여비로 떠나왔기 때문에 자료조사비도 넉넉지 않았던 터라 캘리그라피가 접목된 일상용품 포장지를 모으기 위해 편의점 쓰레기통을 뒤지기도 했다. 한글 캘리그라피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하던 당시 방송타이틀 로고의 선두주자로 알려진 이일구 선생님(당시 KBS 부장)을 알게 되었고, 이후 인사를 드리러 찾아뵙게 되었다. 지면으로만 뵈었던 선생님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선생님은 검은색 종이에 흰 글씨로 쓴 여러 장의 작품을 보여주었다.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수많은 드라마, 다큐멘터리, 예능프로그램의 타이틀을 보았다. 전통의 맛을 살린 글씨와 대중들에게 감성을 전해줄 수 있는 현대적인 미감의 글씨... 전통서예를 벗어나 흔하게 볼 수 없었던 감성의 캘리그라피를 보게 되었다. 인상 깊었던 점은 예전의 방송타이틀 로고는 컴퓨터 작업이 아닌 수작업이었다는 사실이다. 전통서예 스타일을 벗어나지 못했던 나에게 귀한 작품들을 보여주고 작업 노하우를 알려주었다.

마냥 홀로서기를 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당시 선생님이 건네준 복사물을 교과서 삼아 공부하며 한발 한발 더 나아갈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당시 캘리그라피라는 장르는 전통을 망친다는 이유로 한국서단에서 따가운 시선을 받았다. 캘리그라피라는 장르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길에는 수많은 걸림돌이 있었고, 때로는 거대한 장벽 때문에 넘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다행히 선배와 스승이 없었던 캘리그라피라는 길 위에서 만났던 장애물마다 선생님의 조언을 디딤돌 삼아 뚜벅뚜벅 걸어 올라갈 수 있었다.


서울 관훈동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렸던 이일구 선생님의 개인전 댓잎에 바람일어’(인사아트센터, 2009)는 지금도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기존 전통문인화의 구도와 기법을 넘어 현대적 미감으로 표현된 선생님의 작품을 보고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다. 선생님은 어린 시절 마을곳곳 초가집 뒤뜰에 심어진 대나무 숲을 좋아했다고 한다. 바라만 보고 있어도 마음이 편안하고 휴식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공간이던 것이다. ‘유년시절 함께 성장하면서 보고 느꼈던 대나무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회상하며 그리셨다고 했다. 전시된 다수 작품이 대나무 그림으로 채워진 것도 이런 연유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전시된 작품 중에 유난히 눈에 띄는 작품이 있었는데 대나무 숲을 위에서 내려다 본 작품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분명히 올려다보기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대나무 숲을 위에서 내려다 본다는 것. 그 점은 기존의 관습과 틀을 깨는 철학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대나무보다 한참 작았을 소년이 대나무보다 훨씬 큰마음과 상상력을 지니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5..gif


문인화는 회화, 서예, 문학, 전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들이 어우러진 일종의 종합예술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다양성을 아우르며 오늘에 이르기 위해서는 특정한 양식적 전형을 견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선생님의 작품은 시대적 변화에 따라 가치관과 상황을 반영한 결과로 틀에 갇히지 않는 자유로움이 빛났다.

더불어 그림과 글씨는 같다서화동원(書畫同源)’을 느끼게 해준 선생님의 필력은 종합예술이 어우러져야 하는 문인화 작가로서의 가치를 실감케 했다. 이 전시를 통해 나는 전통의 서예를 현대적 미감으로 재해석하는 캘리그라피 작가의 입장에서 또다시 새로운 틀을 깨는 계기가 되었다.


혼자만 올라가는 담쟁이를 본적이 있는가. 담쟁이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빈 캔버스를 채우는 그림이나 글씨처럼 함께 어우러져 형상을 만들어 낸다.

한번은 선생님이 오픈식 행사 사회를 맡아보라고 권한 적이 있었다. 선생님 주변엔 워낙 유명한 아나운서와 저명한 지인이 많을 텐데 왜 내게 사회를 맡으라하시는지 의아해서 이유를 여쭤보지 않을 수 없었다. “유명한 사람들이야 많지만 젊은 자네가 꼭 사회를 봐주었으면 좋겠네. 지인들도 그런 자네를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고..... 더 열심히 해서 좋은 사람들과 인연을 열어갔으면 좋겠네.” 라고 답했다. 선생님은 후학에게 길을 열어주려고 자신의 길까지 다 내어준다는 걸 직접 피부로 느끼는 순간이었다. 제자와 후학들에게 조건 없이 많은 사랑과 가르침을 주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고, 나 역시 앞으로 더욱 성장하게 되면 꼭 선생님처럼 제자와 후학들에게 그렇게 하겠노라 다짐했었다.


21세기는 디자인의 시대. 우리의 존재방식, 삶의 형태, 문화는 디자인을 통해 드러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시대적 흐름에 발맞추어 한국 최로 사)캘리그라피디자인협회가 탄생되었다. 협회는 전통을 바탕으로 한국적 디자인의 기술적, 학문적 뼈대를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KBS라는 큰 조직의 이사를 지낸 경험을 갖고 있는 이일구 선생님이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협회는 체계적인 구성을 갖추고 성장을 이루어 가게 되었다.

이일구 선생님은 회장으로써 만만치 않은 거대한 담벼락을 많은 회원들과 함께 오르고 있다. 마치 손을 잡고 있는 담쟁이 잎처럼. 나 역시 상임이사로써 회장님을 잘 보필하여 캘리그라피디자인이라는 푸른 잎들, 그 꿈들이 담벼락을 넘어 푸른 숲길을 이룰 때까지 함께 만들어 가고 싶다. 선생님은 사단법인 캘리그라피디자인협회 회장, 추사기념사업회 회장, 문인화가, 서예가, 봉사활동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사회에 에너지를 나누고 있다.


선생님은 여전히 지난 18여년 가까이 나에게 정신적 스승이 되어주었고, 새로운 길을 걸을 수 있도록 기꺼이 디딤돌이 되어 주었다. 선생님께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라는 시를 들려드리고 싶다. 더불어 이 지면을 빌어 이일구 선생님께 다시금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아래는 담쟁이(도종환)’ 전문이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조용히 읊다보면 대나무처럼 곧게 서 계신 선생님이 떠오른다.

각주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도종환의 시

 

글 이상현(캘리그라피 작가)

 

 16..gif

 

17..gif (예산고 장학기금 및 기숙사증축기금마련 담운 이일구 초대전”/예산군문예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