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 21

글씨와 놀다. 매거진 '글씨 21'

서예·캘리그라피

[Interview]

2019-02-27
<특집>

 대륙을 이끈 서법가들

 引领大陆的书法家们


|  4편  이강전(李刚田)  |







중국의 서법계가 뜨겁다. 국가 차원에서 서법에 대한 전폭적인 장려정책이 진행 중이고, 서법가들 또한 수준 높은 작품으로 서단을 꾸려 가고 있다. 중국의 서법은 문화혁명의 질곡을 딛고 현재 최고의 존중을 받고 있는 분야로 거듭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의 이면에는 중국의 전통문화인 서법을 자신들만의 고유 언어이자 신선한 예술로 일궈낸 일군의 작가들의 영향이 크다.

 

대륙을 이끈 서법가들은 그들이 일궈낸 현대서법계의 역정과 진화의 모습을 작가들의 육성을 통해 들어보고,우리 서예계에 반추해 보기 위한 기획이다. 각 성()과 도시별로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는 중국의 서법계를 차근차근 짚어보는 시간을 갖기로 하고, 우선 중국의 수도이자 전통 서법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베이징에서 뚜렷한 자기 색깔을 가진 네 분의 중견작가들을 만나 그들이 걸어온 길과 예술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려 한다.

 

그 네 번째 순서로 이강전 선생을 만나보았다. 인터뷰는 성인근 본지 편집주간이 진행하였고, 통역은 안재성 박사(서법학)가 맡아주었다.

 

2019. 02. 27

글씨21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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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처음 서예와 전각예술에 입문하신 계기에 대해 알고 싶어요

 

한국의 서예인들 애호가분들과 교류하게 되어서 매우 기쁩니다. 저에게 있어 서예는 어렸을 때부터 하나의 취미였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집안이 문물을 다루는 집안이었기 때문입니다. 제 할아버지나 아래 연배들 모두 문물학을 전공하신 분들입니다 이러한 집안 분위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어느 곳에서나 글씨를 취미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예나 전각, 고문을 읽는 부분에 대해서 어렸을 때부터 학습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서예를 공부하기 시작하게 된 것은 중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입니다.

 

선생님이 한 분 계셨는데, 학교 내 동아리가 있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부터면 어린 나이였죠 제가 학교를 일찍 진학해서 그때가 11살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중학교 이후 저는 형님의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형님은 대학교에 다닐 때 서예와 전각을 취미로 하게 되셨는데, 그때 그 형님과 함께 서예전각을 배우게 되었죠. 저는 그래서 입문 때부터 지금까지 따로 선생님을 두지 못했습니다. 순수하게 집안의 영향으로 서예와 전각을 공부하게 된 경우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작품을 발표하게 된 것은 1978년 도인데요. 벌써 40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진정으로 서예전각의 길로 들어선 시간은 40년이라고 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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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처음 발표하신 작품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처음으로 작품을 발표하게 된 것은 서예전람회에서 였습니다. 참가했던 작품은 예서 작품이었습니다 작품집으로도 발표된 것이니, 첫 번째 발표작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게 1978년도입니다. 당시는 작품을 발표할 기회가 아주 적었습니다. 서예대회가 아주 적었죠, 또 작품 내용 주제에 서도 엄격했는데요. 정치적 내용을 가지고 작품 내용을 써야 했어요 지금처럼 당시(唐詩)나 송사(宋詞)는 쓸 수가 없었죠. 그때 제 작품은 마오쩌둥의 시를 가지고 작품을 했었습니다. 지금과는 환경이 매우 달랐다고 하겠네요.

 

 

Q. 중국서법잡지사에서 주편(편집주관)을 하셨는데, 잡지사에서 근무하시게 된 인연과 <중국서법>잡지가 지향하는 부분에 대해 소개 부탁합니다.

 

저는 원래 문화예술인협회 주석의 직책으로 있다가 곧 60세가 될 적에 중국서법가협회에서 저를 추천하여 <중국서법>잡지사의 주편으로 임명되었고 이 잡지사에서 5년간 근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5년간 근무 후에 나이가 65세가 되어서 스스로 요구하여 주편직에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나이도 너무 많았고 주편으로서 임무가 막중하다 보니 퇴직을 하게 되었죠.

5년 동안 근무하면서 몇 가지 신념을 가지고 일에 임하였는데 첫 번째는 독자가 왕이다라는 마음으로 근무했습니다. 두 번째로 전문지식이 곧 영혼이라는 생각으로 책이 전문지식으로서 그 영혼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한 것입니다. 전문지식으로서 높은 수준은 하나는 역사에 대해서 그것을 승화시키고, 또 하나는 당대 창작의 선도적인 부분에 관해서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전문지식이 곧 영혼입니다.

 

만약 높은 수준의 전문지식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독자는 책을 구독하지 않습니다. 독자가 책을 구독해 주지 않으면 책은 발행하기 어렵습니다. 잡지로서, 회사는 구독자를 통해 생존도 해야 하고, 사회적인 영향도 고려해야 합니다. 이러한 부분 때문에 잡지사의 운영은 참 어렵습니다. 중국서법잡지사는 중국서법가협회의 기관간행물입니다 정부간행물이죠 그렇기 때문에 잡지사로서 많은 공식유통망을 가지고 있고 높은 브랜드가치로서 유리한 장점들이 있지만, 또 한계도 가지고 있습니다. 공식 정부 간행잡지사로서 갖는 한계죠 이러한 것은 어떻게 하면 대중들에게 더 다가가느냐 하는 부분을 통해 노력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독자가 곧 왕이기 때문이죠. 정부간행물로서 갖는 한계가 독자와의 관계에 있어서 방해되면 안되죠 꼭 정리되어야 할 부분입니다.

 

또 하나는 학술적 품위를 유지해야 합니다. 시장경제제도에서 각 종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논문이나 작품의 수준이 떨어지는데 돈 있는 사람이 로비를 통해 그것을 잡지에 싣고자 한다던지요. 이럴 때 저의 선택은 돈은 절대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잡지에 실을 수 있는 논문이나 작품은 반드시 조건에 부합해야합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한 독자를 왕으로 대하고 전문지식을 곧 영혼처럼 여기는 이 두 가지 기조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는 정부간행물로서 한계와 또 시장경제체제의 간섭 등을 극복해야 하기 때문이죠.

 

이러한 상태에서 <중국서법>잡지는 장기적으로 앞을 내다보고 브랜드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제가 근무한 5년 동안 이러한 부분을 견지하며 하나하나 일에 매진하였고, 현재는 독자들에게 인정을 받는 잡지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같은 잡지는 더욱이 시장경제 아래 모두가 돈을 좇아 갈 때일수록 그 브랜드만의 품위를 유지해야만 비로소 오래도록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기적 성과만을 바라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잡지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독자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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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서령인사 부사장으로 계신데, 서령인사가 어떤 곳이고 그 곳이 수행하고 있는 역할에 대해 소개 부탁드립니다

 

서령인사는 벌써 설립된 지 백 년이 지난 오랜 역사를 가진 단체입니다 그 처음 설립된 계기는 전각에 같은 뜻을 가진 동도나 친구들이 모여 만든 사적인 단체모임이었습니다. 전각이 중심이 된 결성체였죠. 이 단체가 설립된 지 100년 동안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고 중간에 몇 번 단체가 이어지지 못한 시기도 있었습니다. 최근에 30~40년에 걸쳐 다시 단체가 회복이 되었습니다. 회복이 된 후에는 비록 대외적으론 동인들의 사적 단체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상 정부조직이 되어서 정부와 공산당 아래에 속한 예술단체로 변하였습니다. 정부산하 예술단체로 승격이 되면서 초창기의 설립 때의 순수민간예술단체 성격은 과거가 되었죠.

서령인사는 현재 몇 가지 슬로건을 천명(闡明)하고 단체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명가지사(名家之社), 박아지사(博雅之社), 천하지사(天下之社)’ 이 세 가지 슬로건입니다. 소위 '명가지사(名家之社)'라는 것은 인재를 중시하고 학술을 중시하는 단체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단체가 수준 높은 인재와 심도 있는 학술의 길을 중요시하지 않는다면 안 될 것입니다 이는 곧 근본이 됩니다.

 

'천하지사(天下之社)'는 이러한 뜻인데요. 서령인사는 현재 항저우시에 있지만 이 절강성 지역에만 국한하지 않고 지역을 넘어 중국과 대만의 전각가, 더 나아가 일본, 한국의 전각가와도 같이 교류할 수 있는 단체가 되고자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계의 많은 지역의 전각가가 응집되어 교류할 때 천하의 단체가 되는 것이죠. 지역의 한계에 갇히면 안 된다고 봅니다.

'박아지사(博雅之社)'는 단체의 활동 분야를 전각에만 국한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전각예술이 핵심이 되는 중국전통예술문화의 화가들을 보면 시서화인 네 가지를 모두 갖추었습니다. 그래서 서령인사의 많은 인사장의 면모를 보면 반드시 전각을 한 분들은 아닙니다. 인사의 사장이었던 치공(啓功)선생도 전각을 하시던 분은 아니었고 자오부추(趙朴初)선생 또한 각을 하던 분은 아니었죠. 얼마 전에 돌아가신 라오종이(饒宗頤)선생도 각을 하신 분은 아닙니다. 하지만, 모두 예술계의 명인들이셨죠. 그래서 전각이 중심이고 이를 위주로 하지만, 거기에 국한하지 말자는 취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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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정저우대학이나 런민대학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계신데, 학생들을 지도함에 있어 특히 강조하시는 것이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중국의 서예 교육이 대학에서 고등교육의 한 과목으로 개설되기 시작한 것은 사실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과거 전통적인 지도방식은 가정에서 또는 스승이 제자를 받아 가리키는 형식의 교육이었고 진정한 전문영역으로서 대학에서 교육이 이루어진 것은 근 몇 년 사이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 중국의 서예고등교육은 일정한 틀이 아직 갖춰지지 않았습니다. 사회에서는 수업에 등록해 서예를 전문고등기관에서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의 수요가 많아졌지만 대학마다 교학방법이 다 다르고요.

 

교재도 통일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보니 가르치는 선생마다 강의교재가 다 다르죠 조금 어지럽다고나 할까요? 그래도 전체적인 서예 열기가 생기로 충만하고 서예열기가 충만하다 보니 서예 교육의 진전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또 하나 현재 중국의 서예 교육은 예술교육과 문화교육 또 인성을 배양하기 위한 교육에 대한 구분이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취업에서도 좋지 못했습니다. 서예를 공부한 많은 전공자들이 전업서예가의 길로 계속 나아가지 못하고 그냥 하나의 서예애호가로서 자기전공을 바꿔야하는 등 서예의 고등교육제도 또한 많은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죠. 이처럼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는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중국에서 서예에 대한 열기는 대단히 충만합니다.

저의 교육이념은 몇 가지 원칙을 가지고 있는데요. 하나는 예술교육이고요 또 하나는 문화교육입니다 또 하나가 인생교육을 진행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견지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교육은 서예전각교육에만 국한하지 않습니다. 저는 학생들을 먼저 장인으로 배양시키는데 주력합니다. 장인처럼 서예전각의 기본적인 임모나 각을 새기는 것 등 기교와 기법적인 부분을 완성하도록 지도합니다. 수업하는 기간 동안 기법적인 부분을 노력해완성하도록 지도하죠.

 

그러나 서예와 전각은 단지 이것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시인의 마음과 정신을 함양해야 합니다. 장인의 기술적인 것만 습득해선 안 되고, 시적인 정신이 함유되어야 한다는 뜻이죠. 이는 창작의 정신을 말합니다. 시인의 낭만적 감성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지 비로소 진정한 예술가가 될 수 있습니다 단지, 기술만 습득한다면 그것은 일개 장인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일개 장인에서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인의 감성이 들어 가야합니다. 이러할 때, 창작의 정신이 생겨나고 낭만적 흉금(胸襟)을 가질 수 있죠. 그래야지 좋은 작품을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말씀드리자면, 철학가적인 사고가 필요하겠네요. 이성적으로 문제를 분석하고 바라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학생들을 이러한 전면적인 방향으로 지도하고 예술적 낭만적 감성을 갖추도록 배양하고 장인의 손을 갖게 하고 철학적 논리적인 사고를 갖게 하는 것 이것은 즉, 사람을 배양하는 것이고 이렇게 배양된 학생들은 그들이 졸업하고 나와서 서예 전각가의 길을 가지 않더라도, 무슨 일을 하든지 좋은 방향으로 작용을 할 거로 생각합니다. , 논리적 사고의 배양, 예술적 감성의 배양, 창작력의 배양, 장인의 기술적 배양. 이것들이 학생들에게 결합적으로 함양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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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문화교육과 인생교육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인 말씀을 해주시길 바랍니다.

 

이전의 서예 교육은 기법에 대한 훈련을 중시했습니다. 이후 당대 중국 서예가 30~40년 동안 발전해오면서 문화의 결실에 대해 많은 이들이 공감을 했죠. 사람들은 작품의 형식을 중요시하고 작품이 전시장에 걸리면서 시각적인 효과를 내기 위한 기교적 능력들을 키워나갔는데 단지 기술을 중시하는 인재들이 배양되다 보니 점점 이러한 흐름을 되돌아보며 문화적 결실에 대한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저희는 서예 교육에 있어, 물론 기법에 대한 훈련도 중시하지만, 문화적인 시각에서 기법을 바라보며 훈련하도록 지도하고 있습니다. 시종 문화의 각도에서 서예전각의 기법을 인식하고 바라볼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서체를 임모하는데 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먼저 현시대의 입장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단순히 역사를 임모하는 것이 아니죠. 높은 수준의 시각이 필요합니다. 제가 금석문자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청동기의 금문은 청동기에 새겨져 있는 금석문자입니다 제가 학생들에게 학습하도록 할 때 저는 먼저 학생들에게 금문의 글자와 똑같이 임모하도록 지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금문의 글자는 모필로 쓰여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죠. 청동기의 문자는 금속주조 된 글자입니다. 소위 금석문자는 칼로 새겨진 문자이죠. 새겨지기 전의 모필로 서사된 글자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때, 저는 학생들이 보이는 금석의 흔적을 지워내고 그 뒤에 숨겨진 원생태의 모필 글자를 상상하여 찾아 임모하도록 지도합니다. 똑같이 쓰면 안 됩니다 금석문자의 내재적 의미는 고박하고 질박한 이지만, 선질의 표현에 있어 창조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어떻게 용필을 사용하고, 어떻게 쓸 것인가 반드시 창작성이 있어야 합니다. 옛사람이 당신에게 옛 악보를 전수해줬지만 자신의 흉금으로 표현하고 현시대의 언어로 재창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단지 옛사람의 것을 종이에 옮기기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의 문화교육은 학생들이 창작의 정신을 지니게 하고, 역사를 새로이 인식 시키는 것을 중요시해야 하죠. 이렇게 공부를 시켜야 합니다.

 

물론 기법적인 공부도 하게 해야 하고 서예사에 대한 공부, 중국전통문화의 사서오경에 대한 공부 등등, 기법적인 부분과 더불어 창작정신을 배양하기 위한 교육이 종합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말하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게 깊이 있는 사고력의 배양입니다 예술교육을 하는 목표는 학자를 만들기 위한 게 아닙니다. 하지만, 반드시 문화인으로 배양시켜야 합니다.

예술가이면서 문화인이어야 합니다. 학자를 만들고자 함이 아니에요 학자는 왕왕 예술가적 상상력의 부족함을 드러냅니다. 저희는 깊이 있게 사고할 수 있는 예술가로 배양하고자 하는 게 목표입니다 만약 사고가 부족한 단순한 장인이라면 좋은 예술가로 성장할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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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문화의 배양은 창조력을 키우게 하고 사고의 배양은 깊이 있는 예술가를 만든다는 생각으로 이러한 방향을 세워 많은 교육업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전각을 가르칠 때 전각의 근본을 한인(漢印)풍에 두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저희가 학생들에게 한인을 철저하게 공부하도록 가르치는 동시에 한인이 가지고 있는 한계에 대해 인식할 수 있도록 가르칩니다. 당대의 시각에 서서 한인을 보았을 때, 한인의 부족한 점은 무엇인가를 얘기합니다. 한인은 유가 사상의 영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 형식이 포만하고 평정, 평원함을 가지고 있죠. 유가의 사상에 부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영향이 한계로 작용한 이유가 있고, 또 한인이 봉니에 찍혀야 하기에 반드시 선조가 균등해야 해요 큰 변화를 일으키면 안 됩니다 그렇기에 이 또한 형식상의 한계를 초래하게 됩니다. 우리가 당대 전각의 예술창작을 진행하면서 한인은 태생적으로 판에 박힌 형식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 이 한인을 어떻게 변모시키면 좋을까요?

 

우리는 현재의 시각에서 한인에 대한 창작을 진행할 때, 새로운 예술적 규율을 적용해 새롭게 한인을 인식하고 한인에 대해 새로운 창조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 단지 한인풍격과 똑같이 새기는 것이 아닌, 정신을 표현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저희가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말이 있습니다. ‘漢印을 배우지 못하면, 무엇이 창작인지 알기 어렵고, 漢印의 형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무엇이 전각창작인지 알지 못 한다고요 즉, 한인을 모르면 전각을 모르는 것이고, 한인을 극복해 벗어날 수 있어야 전각창작을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가끔 이러한 이념으로 학생들에게 기본공을 공부하도록 지도하는 것은 이념상의 훈련과 창작력의 훈련, 기본공의 훈련이 같이 융합되어 나아 가야하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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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선생님 전서작품의 학습이나 창작에 있어 지향하는 부분이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지금의 서예는 과거 전통의 문인들이 즐겼던 서예에서 벗어나 전시장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감상 서예로 발전하였습니다. 문인들이 주로 즐겼던 영역에서 대중들이 광범위하게 즐길 수 있는 영역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은 서예가 기법 위주에서 형식 위주로 발전하는 변화입니다. 이는 즉. 형식미를 전면에 내세운 것으로 특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작품의 중요한 요소가 된 것이죠 작품을 보는 입장에서 눈을 자극하는 형식미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고전을 공부하면서 점차 현대성이 있는 작품들을 창작하게 되는데요. 필묵의 표현, 다양한 용필방법, 다양한 먹색 운용방법 등에 있어 변화를 줄 수가 있고 또 소재의 변화를 통해 현대성 있는 창작이 가능하죠.

 

예를 들어 전서 서체라면, 새롭게 발견된 고문자 자료를 가지고 서예작품으로 옮겨 창작에 이용하는 겁니다. 이는 첫째로 고전에서 취합하여 이를 토대로 서예작품으로 전화(轉化)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현대의 서예창작은 작품에서 창신(創新)을 요구합니다. 적어도 전서의 창작에 있어서 두 가지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첫 번째는 표현형식의 창신입니다. 필법, 묵법, 장법 등 표현기법에 대한 창신이죠. 두 번째는 글자의 표현방법에 대한 창신이 아닌 문자에 대한 창신입니다. 전서 고문자에 대해 새로이 발표된 연구 자료를 가지고 창신을 진행하는 거죠 그래서 당대 중국의 서예가는 왕왕 이 두 가지 방법들을 통해 참신한 작품들을 창작하곤 합니다.

 

저의 창작은 전서 서체를 특정해 말씀드리자면 초기에는 소전(小篆)서체에 대해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많은 임모과정으로 거쳤죠. 태산각석, 낭야각석등 진()나라 소전 등을 학습했습니다. 소전으로 말씀드리자면, 하나의 기본공을 쌓는 훈련입니다. 소전서체에 대한 훈련이 없으면 다른 기타 서체를 학습하는 데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소전은 그 서체가 본래 개성이 가장 약한 서체입니다. 장법의 구조상 변화의 틀을 깨기가 쉽지 않고 필법은 단조롭죠. 그렇다 보니, 저는 작품전에 출품할 때에 소전 서체의 작품은 출품한 적이 없습니다. 소전에 대한 공부는 평소에도 제일 열심히 하지만 전시작품으로는 출품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제가 참신한 작품을 출품하기 위해서였는데 근현대 새로 출토된 고문자 자료를 가지고 새로운 작품들을 창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로, 초전(楚篆,초나라 전서)작품을 들면 1985년도인가요. 하남에서 개최한 국제 서예전이었습니다. 일본작가가 초전서체로 국전지 이상의 대작 작품을 출품하였는데, 큰 인상을 받은 작품이었습니다. 저에게 큰 자극을 준 작품이었죠. 그 후에 고고학적 발견으로 초전서체를 정리한 서적이 출간되었는데 그때부터 제가 초전서체를 임모학습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중국 국내에서는 초전 서체로 처음 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한 작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청년 전람회였죠. 이후 사람들이 초전 서체 작품을 많이 출품하면서, 저는 이후로 초전 서풍의 작품을 다시는 출품하지 않았습니다.

 

그 뒤로 저는 갑골문 선조특징과 초전의 용필법, 전국시대 진전(秦篆)의 방절의 특수한 맛깔스러움을 혼합해 새로운 서체 만들기를 시도합니다. 갑골문처럼 선조가 가는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갑골문은 아니고 전국시대 진전의 특징이 있지만, 진전은 아닌 저만의 색깔을 가지고 있는 전서체를 만들게 되었죠. 그래서 저는 다양한 풍격의 전서를 쓸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소전서체의 기본근간입니다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은 문자학에 대한 이해입니다 문자학을 이해해야 하고 전서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이며, 어느 정도 변화시키는 것이 적당한 지에 대한 것까지 알아야하겠죠. 그래서 전서창작은 문자학에 대한 이해가 요구되며 고문자를 변형시키는 능력, 그리고 현시대가 가지고 있는 형식적 미감을 표현하는 능력 등을 필요로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는 고문자에 대한 기초고, 두 번째는 변통(變通)인데 새로 출토된 고문자 자료들을 서예창작에 적합한 형식의 문자로 재구성하는 변통능력입니다 세 번째로 현대적 형식의 미감를 더할 수 있어야 함이 전서창작의 중요한 핵심이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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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전각의 학습이나 창작에 있어 지향하시는 바가 있으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저의 전각은 일단 그 뒤에 서예가 근간으로서 지탱되고 있습니다. 먼저 서예를 했고 그 후에 전각에 입문했기 때문입니다 에서 출발한다라는 말이 있듯이 서예가 기본이 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印章이라는 것은 을 했을 때 인장의 맛이 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장을 새길 때 많은 기법적인 기술이 들어갑니다. 변화나 교묘한 생각 등이 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도안화(圖案化)가 되어서는 안 되고 판화처럼 돼서도 안 됩니다. 반드시 인장이 되어야 합니다. 인장만의 특수한 맛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인장의 맛, 이는 즉 금석기(金石氣)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 금석기라는 것은 각을 하였을 때, 단순히 기술인들이 만들어내는 도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예의 맛이 있어야 하고, 서예 예술과 고대 인장의 상호 간 결합을 말합니다. 여기에 더해 미적 디자인이 들어가야 하는데 이는 인면(印面) 안에 글자를 포치(布置)할 때 미적 사유(思惟)가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미술화(美術化)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미적요소가 전각 안에 들어갈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완성되어야 할 부분은 도법(刀法)입니다. 전각도의 공예적 요소가 포함되어 집니다.

 

그래서 전각에는 몇 가지 중요한 속성을 가지며 완성됨을 알 수 있습니다. 네 가지 속성인데요 첫째, 인장의 속성입니다 둘째는 서예의 속성입니다 셋째는 미술의 속성이며, 마지막 넷째가 공예의 속성입니다. ‘인장속성’, ‘서예속성’, ‘미술속성’, ‘공예속성이 네 가지 속성들은 서로가 상호보완적이며, 또 동시에 상호모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각가마다 이 네 가지 속성들을 어떻게 분배해 적용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천변만화(千變萬化)의 전각 풍격들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청대 서예가인 등석여(鄧石如)가 있습니다. 등석여의 전각은 서예 속성이 비교적 강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인장속성이 약해지게 되었습니다. 등석여의 창신은 書藝入印, 즉 서예적인 요소를 인장에 유입시킨 것입니다. 서사시 모필의 맛을 인면에 그대로 표현하였는데, 어떤 글자들은 보면 매우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인장 같지는 않습니다. 이는 전각가마다 그 표현양식이 다르게 표현된 것이죠.

 

제가 각을 할 때 특히 한인(漢印)을 근간으로 삼기를 매우 중요시 합니다. 한인을 순전히 모방하지는 않지만 제 전각의 내재적 근간은 한인으로 지탱 하고 있습니다. 한인이 가지고 있는 품격이라든지 한인이 제게 주는 심미적인 이미지 이죠. 한인은 저의 기초이지만 그 심미적인 기초가 가지고 있는 한계에 구속되지 않아야 합니다. 또 글자에 있어 각종 고전의 문자들을 차용합니다. 갑골문, 금문, 초전, 소전 등 문자들을 인면에 사용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조건은 이러한 문자들을 다시 인화(印化)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각 종 고문자들을 인장에 적합한 문자 인면의 언어로 전화(轉化)시키는 작업입니다. 인화(印化)하는 능력도 중요한데 제가 전각 인화(印化)에 대한 논문을 쓴 적도 있습니다. 그다음으로 도법(刀法)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네요. ()와 인석(印石)은 인장의 중요한 표현수단입니다 마치 사람이 노래를 부를 때 좋은 성대를 갖추지 못하면 좋은 소리를 내기 힘든 것처럼 전각의 미를 표현하는 데에 도법은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법은 以刀刻石, ()를 가지고 돌에 새기는() 방법을 말합니다. 이러한 도법의 개념은 문인들이 칼을 돌에 새기면서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한()나라 시기의 한인에는 적용되지 않는 말입니다. 한인에는 원래 도법이라는 개념이 없었죠 한인은 주조되어 나온 인장입니다. 청동에 주조한 것으로 공예적인 작품입니다 이도각석(以刀刻石)의 개념과는 다르죠 이도각석(以刀刻石)의 개념에 대해 명나라 주간(朱簡)” 이 말한 바 있는데 刀法者, 傳筆法者也’ (도법이라는 것은 필법으로부터 전해졌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모필을 모방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모필로 표현할 수 있는 필법의 리듬감을 도()로 표현하라는 것입니다 돌의 느낌이죠. 그래서 예로 제백석(齊白石)은 단도법(單刀)을 사용하여 돌의 느낌을 충분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돌의 느낌, 칼의 느낌을 충분히 표현해내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도와 인석으로 서예의 맛을 표현해내고 금석기(金石氣)를 표현해내고, 하는 것이 하나의 추구하는 방향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창작을 할 때는 한인처럼 둔중한 선조로 표현하면 안 됩니다 한인은 도()의 개념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저의 전각 창작에서 강조하는 것은 첫째로 도의 표현력을 중요시하고, 한인이 가지고 있는 내재적인 심미와 풍부한 고문자 자료연구를 바탕으로 이를 서로 규합해서 창작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항상 금석기가 있는 각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한인은 원래 주조된 느낌만 들고 있습니다. 서예의 맛은 가지고 있을지언정 필의(筆意, 쓴 느낌)는 없습니다. 역의(刀意, 새긴 느낌)는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칼로 돌에 새길 때는 반드시 새긴 느낌이 있어야 합니다. 글씨를 쓸 때 모필과 화선지의 특성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하는 것처럼, ()도 도흔의 느낌을 드러낼 수가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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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현재 중국 전각의 동향이나 흐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한국이나 일본등 주변국의 전각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두 가지를 여쭤보셨는데요 먼저 첫 번째 질문에 답변해 드릴게요. 최근 몇 년 사이 중국 국내에서는 대중들의 전각에 대한 열기가 매우 활발했습니다. 하지만, 서예나 다른 영역에 비하면 아주 작은 거죠 통계로 예를 들면, 중국의 국전에 서예 분야로 출품되는 작품 수가 대략 5만 점 정도가 됩니다. 전각분야는 4000여 점 정도입니다 그래서 서예에 비하면 10분의 1에 해당하는 적은 양이죠.

 

그래도 4000여 점은 전각 분야에 있어 대단히 큰 것입니다 근 1년간의 최근 전시장에 전람되는 입선 이상 작품들 성향을 보면 두 가지 매우 극단적인 성향이 나타남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성향은 극도로 공예화 된 한인풍 또는 철선 위주의 전각풍격을 말합니다. 극도의 공예화 된 풍이라는 건 공예적인 기법이 더욱 강조된 풍격입니다. 이러한 길을 걷는 전각가들이 있고요 다른 하나의 풍격은 큰 돌에 고새인(古璽印)의 형식으로 각을 하며 금석기의 맛이 농후한 각을 하는 부류를 말 합니다. 칼로 돌을 때려 금석기의 맛을 많이 내는 부류의 전각가들을 말하죠 대체로 고문자를 사용해 고새인을 많이 새깁니다.

 

그리고 근래에 오히려 상대적으로 덜 두드러지는 게 저희와 같은 연배가 있는 작가들이 주로 해왔던 한인 풍을 기초로 하여 창신한 작가들의 풍입니다 최근에는 좀 활동들이 약해졌습니다. 과거의 저보다 앞선 시대의 작가들 풍격을 보면, 대부분이 한인을 아주 중시했고 저와 비슷한 연배의 작가들도 대부분이 한인을 기초로 한 분들이 대부분이죠. 그러나 현재에 저보다 아래 작가들부터는 한인의 기초를 중시하기보다 작품의 전시효과 그리고 눈을 자극하기 좋은 풍격의 작품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 현재 국내전각의 모습입니다.

 

눈을 자극하는 풍격이라 함은 극도로 공예화 된 작품을 통해 쌓은 공력이 우수함을 드러내고자 함을 말하기도 하고 또, 각의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도법의 운용이나 장법의 포치로써 감상자로 하여금 흡입력 있는 작품을 하려 하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유독 한인을 기초로 새겨진 풍격에 우리 눈이 너무 익숙한데, 이 익숙함을 우리는 한인의 장점으로 생각해선 안 됩니다. 과거 전대 작가들 오창석(吳昌碩)이나 래초생(來楚生)과 같은 예술가들의 전각을 보면 한인을 기초로 하지만, 자기 세계를 분명히 개척한 작가들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작가들은 각의 형식미 즉, 눈을 자극하는 방법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전람회에 출품되는 작품들을 보면 그 성향이 극단적으로 표현된 작품들이 대부분입니다. 극도의 공예화 된 작품이거나 극도로 사의(寫意)적인 작품들이 많죠 좀 전에 말씀드린 부분이 국전에 입선된 4000여 점 출품 작가들의 작품추세에 대한 것이라면 국전에 들지는 못했지만 전람회에 투고한 작품들의 성향도 분석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현대파인데요 미술적 관점의 창작을 하는 작가들입니다. 비록 인원은 많지 않으나 많이 고민한 흔적과 창조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미술의 속성을 전각의 형식으로 대체한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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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가장 대중화되어 있고, 4000여 점의 입선작 아래에 넓게 저변으로 깔린 풍격으로 한인풍격을 지키고 있는 부류입니다 대부분 전각애호가 및 작가들은 한인을 고수하지만, 창작성이 부족한 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참신하고 대담한 창작성을 가지고 있으나 대중들에게 객관적인 호응을 얻지 못한 부류와 대부분이 진입하는 한인을 고수하지만, 국전전람 입선 이상에는 진입하지 못해 주류가 되지 못하는 부류로 중국국내의 전각 동향이 이러한 상황을 두고 있음을 알려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주변국의 전각에 대한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본의 전각가를 보면 연배가 있는 전각가들은 서예, 전각 모두 잘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시대 일본의 젊은 전각가들은 전각가가 오로지 전각만 하고 서예를 잘 못 한다던지, 서예가와 전각가가 세분화가 되었습니다. 일본의 전각가들은 인면의 형식구성을 매우 중요시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면을 포치하는데 소밀관계, 흑백관계, 선과 평면공간의 관계 등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공간구성의 관계를 중시하면서 한인의 기본형식을 탈피한 창신의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일본 작가들은 돌에 새길 때 선질의 칼 맛을 아주 중요시합니다. 도의(刀意)라고도 하는데요. 그들은 중국작가들과 비교하였을 때, 한 가지 보주적인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면이냐면 인면의 장법을 어떻게 변화를 주든지 간에 자법(글자)을 깨지 않는다는 것이죠. 전서글자를 해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최근 전각가들의 성향을 보면 인면상의 창작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글자를 분해, 재구성하여 각을 하려 합니다 그것이 글자가 가독이 되건 안 되건 글자를 분해하여 인면에 장법을 하는 겁니다. 이러한 부분은 제가 볼 때, 오히려 일본 작가들을 칭찬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작가들은 글자의 형태를 깨면서까지 인면의 장법을 쉽게 완성하려 하지 않습니다. 전법(篆法)의 완정함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장법의 변화를 추구합니다.

 

중국의 젊은 작가들은 글자의 독립된 완정함을 희생시키면서, 인면의 장법에 변화를 주려고 합니다. 하지만 일본의 전각가들도 도의 칼맛을 중시하고 있으나, 제가 느끼기에 마치 각공쟁이가 칼로 쪼은 것 같은 느낌이 있습니다. 각을 보면 중국 전각의 영혼이라고 하는 금석기가 좀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인들이 금석기를 추구하는 것 같진 않습니다. 그들은 각을 찍었을 때 시원한 도흔과 전서 자체의 아름다움 또는 인면에 포치된 공간대비의 아름다움에 중점을 두는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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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전각의 핵심인 금석기는 사람들이 그것을 추구하건 간에 추구하지 않든 간에 민족마다 특수한 심미로 금석기를 대했습니다. 최근 중국의 전각은 많은 변화가 있었고, 많은 길을 거쳐 왔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항상 금석기가 내재하여 왔습니다. 현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적으로 한국의 전각은 일본 스타일에 치우치지도 않고, 중국의 현대 스타일하고도 가깝지 않습니다. 오히려 중국의 고전 스타일과 더욱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중국 과거의 전통형식에 더 가깝다고 봅니다. 비교적 보수적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좀 더 깊고 전통을 중시한다고 말할 수도 있고요 한국의 전시장을 통해 보더라도, 작품들이 변화는 적지만 심후한 공력을 갖추고 있고 한인의 기본에 깊이 영향받았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또 한국의 전각을 두 부류로 나누어 말씀드릴 수 있는데 젊은 작가 중에 현대파에 가깝고, 미술적인 감각을 가진 작가들이 있다고 하지만 그 인원이 적어서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봅니다 주류는 여전히 한인풍을 유지하면서 나아가 유가사상의 구속적인 영향을 받은 부류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중국은 유가 사상의 영향에서 벗어나 이미 점점 멀리 나가 지금은 형식적인 효과를 많이 추구하고 있습니다. , 저는 대체로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대만의 전각은 서예를 포함해서 주류는 대체로 수구적(守舊)입니다 비교적 전통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이 전통을 추구하는 부류는 대부분이 사회적인 서예전각 애호가들 중소규모 단체들이고 미술대학의 서예전각 전공자 출신들은 서예전각이 많이 미술화가 되었습니다. 미술전공 대학에 속하면서 타 미술전공자들과 융화되어 미술화가 된거죠 전통적인 서예전각이 아닌 새로운 미술언어화 된 거라 보면 됩니다. 그래서 좀 양극단화가 되었습니다. 하나는 매우 전통적으로 나머지는 매우 현대적으로 대만은 이렇게 갔다고 봅니다.

 

그러나 대학전공자 출신들을 보면, 사회에 진출해서 본인 전공을 살려 작업에 매진하는 작가들이 대륙만큼 많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현재 상황은 제가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다시 비교한다면, 일본의 특색이 있고 한국은 중국의 전통적인 색채에 더욱더 가까우며 중국은 최근 전시장의 작품들로 판단하건대 많은 탐색과 발전이 있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게 맞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이렇게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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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云初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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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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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行健君子以自强不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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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끝으로 한국의 독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제가 한국의 서예계를 잘 알고 있는 건 아닙니다. 그래도 제가 예전에 여초 김응현 선생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하남시에서 한국 측과 함께 전시를 개최할 때였습니다. 동강 조수호 선생님도 뵌 적이 있었고요 초정 권창륜 선생님은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매번 서령인사가 개최될 때마다 가서 뵈었습니다. 권창륜 선생님은 참으로 사람을 즐겁게 하는 매력이 있으셨습니다. 술을 좋아하셨는데, 그때는 마오타이 한 병을 다 드셨어요. 지금은 술은 안 하시지만요 이제 연세가 있으셔서, 안 드시는 줄로 압니다. 참 성격이 어린아이와 같은 면이 있으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한국 친구들과 교류할 때는 정말 즐겁습니다. 마음을 터놓고 교류할 수 있어서 즐겁습니다. 그리고 저는 한국의 서예와 전각이 중국에서 애기하는 정대한 기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정한 맛이 있고요 한국에 가서 서예전시를 볼 때마다 큰 감명을 받곤 하는데, 작품마다 지극히 크고 바른 정기를 느꼈습니다. 저는 이러한 느낌이 중국의 전통문화와 궤를 같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동방문화로서 같은 혈맥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한국과 많은 교류를 통해 서로 배우고 서로 발전하면서, 중국과 한국 사이에 우정이 오래 지속하여지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