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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캘리그라피

[Review]

2019-04-25
2019 여초서예관·소전미술관 특별기획

소전 손재형 •  여초 김응현 

대표작품 교류전






 

특별하고 낯선 만남,

소전 손재형과 여초 김응현의 특별기획전이 열렸다. 2019여초서예관과 소전미술관의 특별기획으로 개최된 이번 전시는 두 대가의 명품 서화작품 약 60점이 각 서예관과 미술관에서 1, 2차 교류전으로 개최되었다. 이 특별하고도 낯선 만남은 여초서예관 조준형 학예사의 기획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애초에 당대에 명성이 있는 여러 서예가 중 ‘4대가라고 일컫는 소전 손재형, 여초 김응현, 일중 김충현, 검여 유희강 이 4인의 기획 교류전을 구상하던 중 소전 손재형 선생의 자제분을 소개받는 기회가 생겼고, 그 기회로 이번 교류전을 펼칠 수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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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초서예관 오픈식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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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초서예관 오픈식 모습


조준형 학예사는 이번 교류전이 있기까지는 소전, 여초 두 어른의 자제분들이신 손흥(진도고등학교 이사장)선생님과 김형년(동방연서회 이사)선생님께서 적극 협조해주신 덕으로 성사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작품 선정 과정에서부터 상대 측에 결례가 될 수 있는 작은 부분까지 섬세히 신경 쓰고자 했습니다.’라고 교류전의 성사와 진행과정이 신중하게 치러졌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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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초서예관 전시장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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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초서예관 전시장 모습


이번 교류전을 논하기에 앞서 소전 손재형, 여초 김응현 두 선생의 일생과 그 일생에 담긴 인문학적 소양과 예술적 표현까지 좀 더 깊이 알아볼 필요가 있다. 두 선생을 기억하는 이들의 이야기에서는 실로 대단했다’, ‘굉장했다라는 공경을 넘어 숭상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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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초서예관 전시장에서 소전 손재형 선생의 작품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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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초서예관 전시장 모습


서예라는 명칭을 정착시키다 - 소전 손재형


소전 손재형(1903-1981) 선생은 한국예술과 현대서예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고 할 수 있는 국한 혼용의 독창적인 소전체는 전예풍의 필획으로 조화로운 변화를 이루어냈다. 글씨와 그림 모두에서 최고의 경지에 오르며 대한민국 당대의 손꼽히는 서예가 소전 손재형, 예술가뿐 아니라 수집가로서 한국전쟁 당시 경복궁에 소장되어 있던 국보유물이 북()으로 유출되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고, 안전히 부산까지 이전시킨 일화로 볼 때 소전의 높은 안목, 남다른 사명감과 용기는 당대는 물론 현재까지 그의 명성이 이어지는 역사적인 업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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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전 손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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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전 손재형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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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전 손재형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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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전 손재형 


그는 진도 출신으로 양정보고를 졸업, 선전(국전)에서 입선과 특선을 했고 해방이 된 후 조선서화동연회를 결성하여 회장직을 맡았다. 1929년 외국어학원 독일어과를 졸업, 수도여자사범대학에서 교수 역임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소전 선생은 일본으로 건너가 폭격을 무릅쓰고 한 달여간 동안 거듭된 설득과 어마어마한 값을 치러내고 추사의 세한도를 찾아왔다. 목숨을 걸고 이뤄낸 기적 같은 업적으로 당시 많은 문화예술계 인사로부터 큰 칭송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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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전 손재형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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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전 손재형 作


서단의 원로로서 한국서예발전에 힘쓴 소전은 이후 1954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1958년 자유당에 입당하여 제4개 민의원에 당선, 국전 심사위원을 역임, 1978년 예술원 종신회원, 국민훈장과 무궁화장·모란장을 받았다. 소전 선생은 서예가이자 교육자로서, 또 문화행정가이자 정치가로서의 폭넓은 서예가의 삶을 남겼다. 창조적 예술가이자 우리나라의 문예 부흥을 이끌었던 소전은 명실상부 현대서예의 출발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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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전미술관 전시장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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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전미술관 전시장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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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전 손재형 作


높은 안목의 수장가로서 국보급 문화재를 지켜내고, 서예라는 명칭을 주창하였으며 금석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조준형 학예사는 소전 선생이 많은 이들로부터 추앙받을 수 있었던 것은 언급한 몇 가지 업적 때문만을 아닐 것입니다. 소전체에서 느낄 수 있는 넉넉하고 절도 있는 필의는 소전 선생의 인품 그 자체일 것이며, 이는 그의 서품 및 화품으로 그대로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넉넉한 인품으로 창조적 예술세계를 자유롭게 펼친 소전은 앞으로도 더욱 추앙되고 주목되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당대를 장악했던 소전 손재형 선생에 대해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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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전미술관 전시장 모습


활발한 국외교류의 선두자 - 여초 김응현


여초 김응현(1927-2007) 선생은 명필가 집안 출신으로 남다른 가풍과 선비정신 속에서 성장하였고, 한평생을 서예연구과 보급을 위해 헌신하였다. 1956년 우리나라 최초의 서예전문 아카데미 <동방연서회>를 창립하여 서예저변 확대에 크게 기여함을 물론, ‘전국학생휘호대회를 통해 서예를 통한 민족정신의 고취와 문화 부흥을 이끌었다. 또한, 글씨 뿐 아니라 전각에서도 특출한 경지에 올라 1980년 한국전각학회(한국전각협회)를 결성하여 현재까지 한국 전각예술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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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초 김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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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초 김응현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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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초 김응현 作


일찍이 국외교류에 중요성을 간파한 여초 선생은 한국을 대표하는 서예인으로서 대만, 중국, 일본 등 아시아 여러 나라와의 학술, 문화적 교류를 활발하게 이끌어냈다. 둘째 형인 일중 김충현, 셋째 형인 백아 김창현과 함께 형제 서예가로도 유명한 여초 선생은 휘문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1950년부터 10년 가까이 국회도서관에서 국회보 주간으로 일했다. 한국전쟁 당시 1.4 후퇴를 맞아 부산으로 피난을 간 여초 선생이 주간춘추라는 주보를 발간하며 주간으로 일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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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초 김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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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초 김응현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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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초 김응현 作


조준형 학예사는 피난시절, 먹고 살 걱정이 최우선인 그때에도 여초 선생님은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각계각층으로부터 책 3,600여 권을 기증받아 <국회도서실>을 개관하였는데, 이것이 현재 <국회도서관>의 전신입니다. 제대로 된 월급을 받지 못했지만, 오직 사명감과 자부심으로 열정을 다하였고, 특히 나라가 어려울수록 교육의 힘이 필요하다고 믿었습니다.’라고 전했다. 기본(교육)에 충실함으로써 나라를 바로 세우고자 노력했던 여초 선생의 사고(私考)는 서예에 있어서도 특히 서법연구와 교육에 힘썼으며, 엄격한 서법의 테두리 안에서 자연스러움을 찾고자 노력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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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초 김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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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초 김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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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초 김응현 作


이후 서예잡지 서통(書通)’서법예술을 창간한 바 있다. 1996년 이후에는 설악산 백담사 부근으로 거처를 옮겨 글씨에 전념하였으며, 사고로 오른쪽 손목을 다친 뒤에는 2000년과 2001년 좌수서 작품을 모아 좌수전을 열기도 하였다.

 

다시 이들의 교류전으로 들어가 보자, 이번 전시에서는 여초서예관과 소전미술관의 소장 작품을 위주로 한 교류전으로 총 60~70여 점이 출품되었다. 그중 대표작을 보면, 소전미술관에서는 소전 한글의 충무공벽파진전첩비(1956)’이 대표작으로 선보여졌다. 높이 355cm의 대형 작품으로 소전 선생의 고향 진도 벽파진에 세워져 있는 비문을 탁본한 것이다. 노상 이은상 선생의 글로 충무공의 애국정신을 선양하는 의미가 담겼다. 소전 필생의 회심작으로 독자적인 양식과 새로운 법도를 개척한 일대 걸작이라고 평가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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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초 김응현 作


여초서예관에서는 김상헌 서간초당우음(1979)’이 대표작으로 꼽혔다. 여초 선생의 선조인 청음 김상헌의 서간시를 특유의 고졸하며 활달한 행서체로 표현한 이 작품은 너비와 높이가 60cm정도 되는 비교적 작은 크기이다. 그러나 여초의 전성기로 평가되는 시기의 작품으로 글자체에서 풍기는 힘은 결코 적지 않다. 실제로 이 작품은 여초서예관 건물의 외벽에 대형으로 석각 되어 있는 등 평소 관람객들로부터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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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전미술관 전시장 모습


소전과 여초, 여초와 소전

서로 다른 색깔을 지닌 두 거장


서예라는 예술을 볼 때, 작품에서 그 사람을 읽어낼 수 있다. 그리고 두 선생의 생애 업적, 활동들을 살펴보기만 하더라도 1950년대 이후 한국서예가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어림잡아볼 수 있었다. 이번 기획교류전은 말 그대로 당대 서예계를 장악했다고 하는 두 선생의 작품을 교류한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될 것이다. 강원도 인제군 소재인 여초서예관과 전라남도 진도군에 있는 소전미술관이다. 사실상 두 서예관과 미술관의 위치만으로도 두 거장의 만남은 애초에 어려움이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게다가 당시 소전 선생의 행보에 20년 후배인 여초 선생은 자신의 소신을 강조하며 맞불을 놓았던 패기는 서예계를 매우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화는 당대를 이끌었던 이들의 영향력을 가늠할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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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전미술관 오픈행사 모습


앞서 말한 것처럼 두 선생의 작품교류라는 것에도 큰 의미가 있지만, 이번 교류전에서 우리는 단순히 당대에 유명했던 두 분의 만남에만 치중할 것이 아니라 본질에 다가가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여초서예관과 소전미술관에서 기획한 이번 교류전이 바라보고, 나아가고자 했던 본질은 서예의 부흥이 아닐까 생각된다. 두 선생이 활동했던 시기엔 서예가 이렇게까지 쇠퇴할 것이라 미처 가늠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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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전미술관 전시장 모습


그들의 뛰어난 소질이나 능력, 역량으로만 서예를 발전시켰을까? 물론 당시는 현재와 시대적 , 환경적 차이점이 있었으나 1900년 중반, 당대에 있었던 두 분의 용기와 패기, 서예에 대한 지극한 애정으로 지켜내고 발전시켰다고 감히 논하고 싶다. 이번 특별기획 대표작품 교류전을 통해 다시 한 번 알아본 소전 손재형, 여초 김응현 선생의 작품과 업적을 통해 두 선생의 깊은 뜻에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이 자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법고창신의 자세는 현재 우리 서단에서도 자각하고 지켜나가야 할 기본적인 정신이자 사명일 것이다.

 

2019. 4. 25

김지수 기자

자료제공 : 여초서예관 조준형 학예사 / 소전미술관

 

<전시 정보>

2019 여초서예관소전미술관 특별기획

소전 손재형 여초 김응현 대표작품 교류전

기간 :

1_여초서예관

2018. 11. 17 ~ 2019. 2. 17

2_소전미술관

2019. 3. 21 ~ 2019. 6. 23

장소 :

1_여초서예관

(강원도 인제군 북면 만해로154)

033-461-4081

2_소전미술관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철마길 29)

061-540-62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