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서운 한파가 한 걸음 물러나고 봄볕이 비치기 시작할 무렵 서예에 대한 순정이 넘쳐나는 백영일 선생을 만났다. 그의 2015년 개인전 도록 서문에서 박기섭 시인은 “송하는 필묵에 온전히 자신을 투영함으로써 글씨의 자기화를 꾀한다. 그가 쓴 글씨에서 그를 보고, 그 글씨의 체세에서 그의 정신을 만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라고 평하였다. 서예, 전각, 문인화까지 광폭의 작업을 하고 있는 그는 현재 한글 전각에 매료되어 있다. 백영일 선생의 전각에 대해 집중하여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Q. 호는 한 개인의 철학과 정서, 학문세계 등을 담고 있는 키워드라는 생각이 듭니다. 松下(송하), 聽溜軒(청류헌), 흰솔, 믐빛 등을 쓰고 계신데요, 담고 있는 의미와 쓰시게 된 계기, 얽힌 이야기 등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대학시절 죽농 서동균 선생님 댁에서 한동안 선생님을 보필하여 공부 했던 적이 있습니다.그때 선생님께서 송하(松下)라는 호를 지어주셔서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여기가 청류헌(聽溜軒)인데천정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소리 듣는다는 꽤 유명한(?) 당호이지요.
처음 입주하던 해 여름부터 천정에서 비가 샜는데 그냥 물동이 몇 개를 받쳐놓고 간혹 한 번씩 낙숫물 소리를 들으며 그냥저냥 지냈지요. 이 사실을 접한 이종문 시인이 어느 날 청류헌이라는 멋진 이름표를 붙이고 기문까지 써주셨지요
최근 몇 년 전부터 한글서예에 관심을 쏟으면서 제 생각을 담은 썩 괜찮은 한글 아호를 하나 가져야 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2015대구 개인전을 앞두고 딴은 고심 끝에 흰솔과 믐빛 두 개의 아호를 지었지요.
흰솔은 성 白(흰)과 송하의 松(솔)을 합친 것이고 믐빛은 그믐달빛인데, 사실 그믐에는 달이 사위어져 거의 달빛을 볼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새 빛을 잉태하고 있다는 사실이지요 믐빛은 빛없는 빛이며 신생의 기운을 머금은 빛입니다.
Q. 본격적으로 전각에 대한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오래전이지만 오창석(吳昌碩)의 전각을 주제로 석사논문을 쓰셨는데요. 오창석 전각을 논문 주제로 택한 이유와, 오창석 전각의 형성 배경과 특징에 대해서 여쭙고자 합니다.
80년대초 대만과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오창석의 서.화.전각 자료집을 많이 접할 수 있었어요 당시 전각공부에 푹 빠졌던 저에게는 오창석 전각은 절대적인 흠모대상이었지요 ‘오창석 전각연구’로 석사논문의 방향을 정하고 차제에 전각전반에 대해 체계적인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오창석은 12살 때부터 각을 시작하여 평생 동안 전각에서 손을 뗀 적이 없었다고 해요. 처음에 절파(浙派), 등파(鄧派), 제가의 법을 본받는 모방기를 거쳐 30代 후반에 탈피번혁기 그리고 41세 이후 독창기로 나눌 수 있지요
그의 자법은 많은 금석유물에서 고전문자자료의 의취를 흡취하고 있는데요 한인(漢印)과 그가 평생 임서 대상으로 삼아온 석고문의 영향 속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도법은 둥근 자루의 둔한 칼, 경입(硬入)의 방법을 취하여 인품은 마치 진흙위에 새긴 듯한 고졸혼목(古拙渾穆)의 독특한 묵취구현으로 특징지을 수 있겠습니다.
Q. 19세기 말에서 20세기에 들어 한국에서도 전각을 예술의 한 장르로 인식하였고 우수한 작가들도 등장하였다고 봅니다. 물론 그 이전 김상헌, 허목 같은 분들도 문자학이나 고학, 혹은 취미로 전각에 손을 댔다는 흔적이 있지만, 한국에서 전각을 본격적인 예술장르로 실행한 시기는 적어도 추사 일파가 등장한 시기로 내려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조선시대 전각을 보는 선생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조선시대 전각은 청대금석학과 고증학의 영향을 도입하기 이전인 18세기 중엽까지는 대체로 사회통념상 전각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지 못했습니다.
전통적인 유교문화에서 문사들이 직접 칼을 잡고 돌에 문자를 새기는 행위는 조충소기(彫蟲小技)의 쟁이로 치부하여 감히 상상조차하기 어려운 일 이었지요.
그러나 몇몇 선각자들이 전각을 애호하여 직접 새겼는데 견문이 부족할뿐더러자법,장법이 너무 기교적이고 격이 떨어져 크게 볼만한 것이 없지요
19세기 후기 추사선생이 연행하여 청조전각가들과 교류하면서부터 전각에 대한 견식을 넓히게 되고 따라서 우리나라 전각 발전에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됩니다.
Q. 최근 동아시아 전각예술을 보는 선생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현재 전각을 예술의 한 장르로 이해하고 실행하는 나라는 크게 한국, 중국, 일본 등을 들 수 있겠는데, 각 나라 전각예술의 특질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중국은 서예와 전각의 역사가 궤를 거의 같이 하지만 오늘날 예술 성취도 면에서 보면 전각이 서예보다 훨씬 우위에 있다고 봅니다. 전각 인구의 저변이 두터워 한마디로 특징을 말하기 어렵지만 전통적 인풍지향. 유파인장지향 그리고 거칠고 또 웃음을 자아 내게하는 현대적 유행인풍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합니다. 그들은 철저한 독창적인 개성중시 시대를 열고 있습니다.
일본 전각은 방촌(方寸)을 넘어 거인(巨印을 선호하는 경향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문자조각의 느낌이 강하여 인위적인 조탁을 가하여 의도적으로 칼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 특징의 하나로 볼 수 있지요
우리나라 전각은 인구가 부족하고 질적. 양적으로도 미약하지요 뚜렷한 특징이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없을 정도로 평범하다고 봅니다. 이 모두가 극복의 과제입니다만 우리는 한글인장에도 더욱 힘을 기울여 이런데서도 주체성을 찾아 고유색을 띤 인장예술의 특징적인 면모를 드러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Q. 예술의 한 장르가 흥하고 망하는 주기가 있다손 치더라도 한국 전각의 체질은 애초부터 너무 허약 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한국에서 전각이 예술의 한 장르로 다시 자리매김 하기 위해 서예가나 전각가들이 갖춰야할 자질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한국 전각이 중국. 일본에 비해 많이 뒤쳐져있지요 그 이유는 전각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한 인식부재에 있다고 봐요 인식의 전환이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입니다.
전각인구도 숫적으로 너무 열악하고 공부도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서예에 제대로 뜻을 둔 사람이면 마땅히 이서치인(肄書治印)하여 우리서단에도 ‘전각/만방’을 입에 쉽게 오르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전각학습은 생각보다 아주 간단하게 요약 할 수 있어요 다 아는바와 같이 기본이 한인(漢印)공부지요 한인은 그냥 평정하고 무미하게 보이지만 성실히 접해보면 거대한 힘과 대단한 변화가 있습니다. 한인의 깊이를 가히 측량 할 수 가 없어요.
요체는 한인에서 선조(線條)를 얻고 전국 고새에서 결구 조형을 취한다면 그것이 공부의 핵심이라 생각해요 그 외 여러 유파인장 그리고 근·현대 인품은 그냥 힌트삼아 참용하면 효과적인 전각학습이 된다고 봅니다.
Q. 선생님께서는 최근 한글 전각에 대한 다양한 실험을 하고 계신데요, 한글전각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과, 추구하시는 방향이 있으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우선 한글전각이라는 말은 한글에는 좀 맞지 않은 것 같아요 제 생각으로는 한글인장 또는 한글각이라고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래도록 한문서예와 한문전각을 하면서도 마음 한 편에는 우리글에 대한 관심이 늘 붙어 다녔지요 앞으로 좀 더 의미 있는 작업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다가 문득 한글 인장에 생각이 미치자 ‘아, 이거다!’라고 크게 외쳤어요.
2004년의 일이었습니다. 한글각이라면 ‘이게 진짜 전각창작이 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름다운 우리말을 찾고 또 마음속으로 상정 해보는데 꽤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절망과 좌절의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니었지요. 어렵기 때문에 진짜 한 번 도전에 보는 거지요.
한글 자법은 정음자를 기본으로 삼지만 그것에 국한하지 않고 어떻게 의미 있게 창조적 변용을 하느냐가 관건이지요. 조형요소의 가변성을 최대한 활용하되 때에 따라 제자원리도 뛰어넘는 그 외, 그 이상의 시도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봅니다.
Q. 서예에서도 한국 고유의 자료에서 우리민족의 미감을 찾아보고자 하는 시도가 있어왔던 것으로 아는데, 전각에서도 우리 자료를 통한 전각의 계승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의 근작 ‘아리랑’을 보고 문뜩 고려의 동인과 맥이 닿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이런 질문을 드려봅니다.
고려인의 미감이 고려인의 후예인 우리에게도 의식 속에 잠재 되어 있다가 은연중에 슬그머니 나타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리랑의 경우 반듯한 정방형의 자체로 차려놓으면 보는 재미도 없을뿐더러 아리랑의 느낌이 덜 와 닿지요 보다 아리랑답게 표현 할 수 없을까를 고민하다가 아예 아리랑 세 글자를 모두 구부려 이어서 일획서로 포치하여 새겼습니다. ‘ㄹ’은 혀 구르는 소리, 즉 유성음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ㄹ’을 한두 번 더 구부려 역동성 있게 표현 한 것이지요.
한, 중, 일 전각을 두고 뚜렷한 특질 없이 이어져온 우리 인장의 돌파구는 ‘한글인장’에 있다고 본 백영일 선생은 수없는 좌절과 절망 속에서도 칼을 놓지 않고 한글인장 연구에 매진해왔다. 그 노고가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작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상상아리랑
수수께끼이응
얼말글有心無心
理會尋究文字氣
金石遐壽鏤骨雕心
Q. 한국에서 전각을 주제로 한 단체들이 소소히 있지만, 그 중에 가장 큰 단위인 전각협회가 있습니다. 전각예술의 계승과 발전을 위해 전각협회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면 무엇을 들 수 있겠습니까?
열악한 우리전각 환경에 대해 우선 성찰적 태도를 가져야 된다고 보고요. 아울러 협회차원에서 전각인구의 저변을 넓히고 또 질적 향상을 위한 계도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회원 스스로의 문제인데요, 전각예술이 중요한 자기표현인 만큼 전각은 순전히 자신을 키우는 일이지요.
서예인 스스로 전각에 대해 자치를 높게 두고 실천하고 적용한다면 자신이 빛나고, 작품이 빛나고, 우리 서단이 풍후하고 윤택해집니다.
Q. 전각예술의 한 측면으로 현대 대중들에게 ‘수제도장’이 유행하고 있는 듯합니다. 전각을 하는 인력들의 비중이 수입을 위해 이쪽으로 쏠려 있고, 대중들도 값싸고 간편하게 자신의 도장을 가질 수 있는 장점이 서로 만난 접합점이 아닌가 합니다. 전각가로서 이러한 현상을 보는 관점이 궁금합니다.
요즈음 수제도장의 유행은 우선 생산적인 활동이라는 점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예술적 차원이기보다는 전각의 상품화에 비중을 두고 것이지요. 현시점에서 우리 전각의 지형을 살펴볼 수 있는 하나의 현상으로 보고 싶습니다.
이러한 노력들이 우리나라 전각의 활성화에도 일정 긍정적 기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Q. 마지막으로 새로 창간하는 ‘글씨21’에 당부하고자 하는 말씀이 있다면 해주시기 바랍니다.
열정과 패기에 찬 젊은 작가들이 용기와 희망으로 서업에 매진할 수 있도록 길잡이 역할을 해주기 바랍니다.
참신하고 역동적인 프로그램을 제공하여 서단이 긴장과 감동으로 술렁거리고, 그래서 자극과 분발의 계기가 될 수 있도록 기대합니다.
이번 인터뷰를 통해 백영일 선생을 만나보고는 크게 자각하였다. 그가 한국 전각의 위기를 근심하며 지내온 나날들이 굉장함을 보았기에, 그의 전각예술성이 손끝에서만 이루어 진 것이 아니었음을 보았기에, 필자 스스로가 전각에 대해 얕게도 깊게도 생각지 않았던 지난날을 반성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이 이번 인터뷰의 핵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전각가로서의 당당하고도 자신에 찬 그의 눈빛에서 전각예술의 고귀함을 비춰 볼 수 있었고, 그것을 소중히 아로새기고 싶다.
작품활동 2016 한글 書: 라틴 타이포그래피 전 예술의 전당 2015 우리글씨명적재해석전 태광그룹 일주·선화갤러리, 서울 한국서예일품전 갤러리H, 서울 2014 한국현대서예초대전 주 인도네시아한국문화원 2010 한국서예관 개관기념 원로중진서예가초대전 한국서예관, 서울 2009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예초대작가전 예술의 전당, 서울 서예박물관 2008 한·일국제서예전 주일한국대사관문화원, 일본 동경 2007 부산서예비엔날레 부산문화회관 2005 서울서예비엔날레 동아시아 현대전각전 공화랑, 서울 2003 서령인사100주년기념 국제인학사단정품박람 중국 항주 2002 전임 대통령 및 현대서예가 100인 초대전 세종문화회관,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