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을 담을 수 있는 자연의 모습을 보고 나의 붓질로 표현한다.” 문인화라는 시를 그리는 화가 우송헌 김영삼
현시대의 문인화는 더 이상 옛날의 그것과 같을 수는 없다. 옛날의 것은 그저 옛날의 문인화 일뿐, 현대에는 현시대성을 반영한 작품을 해야 한다. 또한 예술이라는 것은 함께 이해하고, 공감해야한다. 늘 현시대에 맞는 작업을 모색하고 끊임없이 창작하는 우송헌 김영삼을 만나보았다.
Q. 아호는 한 개인을 나타내는 키워드라 생각합니다. 우송헌(愚松軒)이라는 호를 쓰고 계신데 무슨 뜻을 가지고 있나요?
처음에는 송헌(松軒)이었습니다. 제 선생님께서 소나무를 연상하시고 소나무 송(松), 집 헌(軒)자로 지어주신 것입니다. 그 후 대학원 석사논문을 쓰기 위해 금산사에 들어갔었는데 거기에 계시던 노장스님께서 호를 보더니 ‘태조 이성계의 호다. 무장의 호를 쓰냐.’ 고 하시며. 어리석을 우(愚)를 앞에 붙이는 것이 더 멋있겠다고 하여 선생님께서 주신 호(松軒)와 어리석을 우(愚)를 합쳐 우송헌(愚松軒) 이라고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당호 겸, 저의 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Q. 선생님께서 처음 문인화를 시작하게 되신 계기가 있으신가요?
나의 고향이 진도이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늘 시·서·화에 동화되어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늘 보았던 것이 나의 삶에 큰 흐름으로 작용한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의 동기가 오늘의 나를 있게 하지 않았나 생각을 합니다.
Q. 선생님께서는 남종화풍의 맥을 잇는 대표문인화가이신데 남종화풍이란 무엇인지 간단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동국 동기창의 남북종론에서 나오는 것으로, 세분화해서 동양화 중 가장 간일한 필치로 함축미를 느끼게 하는 그림을 ‘남종문인화’ 라고 통칭해서 이야기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호남 쪽에 소치선생님의 영향을 받은 운림산방, 의재 허백련 선생님께서 남도 쪽의 화단에 큰 작용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그런 것에 배움을 고하고 하다 보니 오늘에 이르게 된 것 입니다. 우리끼리 남종문인화를 이야기할 때, ‘회화는 소설이고 문인화는 시다.’ 라고 표현합니다.
Q. 문인화의 개념은 ‘그림을 직업으로 하지 않는 선비나 사대부들이 여흥으로 자신들의 심중을 표현하여 그린 그림’ 인데.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오늘날의 문인화는 어떠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흉중성죽(胸中成竹)이라고 하여 중국에서부터 내려오는 동양화의 맥을 보면, 사대부들이 즐겨 그리고 선비계층들이 문인화를 좋아 했던 것은 그 속에 사상과 철학이 많이 녹아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세대에 옛날 것을 이입시켜 볼 수 있는 상황은 아닌 듯합니다. 양반과 평민의 계층이 있었던 옛날과 달리 요즘은 대부분이 대학을 나오고, 또 그런 것(계층)으로 세분화할 수 없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문인화가 갖고 있는 가장 큰 특질, 유가나 도가에서 느끼게 해주는 사상이 교훈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즐겨 그리고 있는 매·난·국·죽이나 십군자라고 할 수 있는 종류의 화목들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을 선비와 비교했을 때, ‘아, 나도 저렇게 살아야 되겠다.’ 라고 생각을 하곤 하는데, 예를 들어 난초를 그린다고 했을 때, 난초가 갖고 있는 가장 큰 상징성은 아주 깊은 산골이든 우리의 집이나 어수룩한 집이든, 어디에 가 있던지 그 맑은 향기를 절대 바꾸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에 비견하면, 참 선비에 비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연꽃을 보면 연꽃에서 느껴지는 것은 진흙 속에서 늘 물들지 않고 맑음을 자랑할 수 있는, 그 향기는 멀리 있을수록 더 짙게 풍겨 오는 것에서 정말로 인간이 내재해야 할 덕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제가 그리는 요즘의 문인화가 그 집안의 교훈, 가훈을 대체할 수 있는 것으로도 손색이 없다고 하여 가장 간단한 필치로 가장 맑음을 중요시하면서 지고지순한 선비의, 군자의 삶을 느끼고 자기를 유추해 볼 수 있는 그런 그림을 그리려고 노력을 합니다.
Q. 문인화를 할 때 추구해야하는 것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요즘 문인화의 인구가 비약적으로 많아지고 있는 것에 비해 격을 갖추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보이는 것에 치중하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 선의 세계로 보면 그 선 속 에서는 무한한 운율들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쉬지 않고 연찬했을 때 무언가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저는 하나의 작품 속에, 문장으로 보자면 시의 기승전결이 보여야 하며, 노래로 보면 도레미파솔라시도, 궁상각치우가 들어있어야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선들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무한한 반복의 학습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소년문장은 있어도 명필은 없다는 것이 해보지 않고는 할 수 없는 것 입니다. 쌓여지는 예술이기 때문에 정말로 열심히 붓을 하루도 쉬지 않고 연찬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랬을 때 그 속에 붓을 잡고 있는 자신의 마음이 성숙되어 좋은 화면들로 나타는 것이지, 아무리 머리로 멋있게 그리려고 해도 거기에서 의미 있는 선 질이 나오기는 어렵습니다. 의미 있는 선 질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열심히 붓을 가지고 작업을 해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Q. 선생님께서는 동아미술상 수상당시 보통 문인화의 소재가 사군자(四君子)인데, 야자수 문인화를 그리셨습니다. 또한 최근 작품에서 보이는 야광안료가 주는 별빛의 표현처럼 다양하면서도 실험적인 작품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작품 안에 담고자 하셨던 선생님의 작품세계가 궁금합니다.
야자수를 그려 동아미술상을 받았을 때는 문인화의 영역을 확대해보고 싶다.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늘 사군자에만 얽매여 있는 것이 조금 답답했고, 야자가 가지고 있는 시원함이 전통 문인화에 이입을 시켜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아 표현을 한 것인데 뜻밖의 좋은 상을 받았었습니다. 요즘에 제가 하는 야광의 작업이나 매화에 거울을 이어서 하는 작업들은 시대성이라고 봅니다. 옛날에 했던 방법 그대로 가져오면 저것은 그저 문인화구나 하고 사람들은 지나가 버립니다. 제가 아트페어에 상당히 많은 기간 참여를 해보았는데, 일반인들은 잘 그리고 못 그리고를 구분하기가 어려운 듯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심을 유도하려면 또 다른 느낌들을 주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숨어 있는 재미를 주고 싶어 야광안료를 사용한 것 입니다. 요즘에 작업하고 있는 것은, 매화 속에 거울을 뒤편에 이어, 선으로 창살 같은 것을 만드는 것인데, 이는 매화가 갖고 있는 그 상징성을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를테면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봄은 오고야 마는구나 하는 것을 보면서 그 곳에 비친 내 얼굴을 보며 나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자기 자신을 한번 비춰보라는 의미에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제 생각과 의도대로 읽어주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신기하게 봐주는데 사람의 눈을 우선 끌어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술이라는 것은 함께 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혼자 명작이라고 한들 알아주지 않습니다. 같이 상생하고 같이 함께하려고 하는 마음속에서 늘 새로움을 추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요즘 하는 작업은 그런 맥락에서 하고 있습니다.
Q. 지금까지 수많은 전시회를 하셨는데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전시나 작품이 있으신지요?
아무래도 제일 처음에 했던 전시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저는 첫 전시를 뉴욕 한국문화원에서 했습니다. 그 때 당시에 영어를 잘 못하지만 관중과 관객들이 나의 그림을 보며 굉장히 시적이다, 여운이 있다. 라고 해주는 것을 듣기도 했습니다. 화제를 한문으로 한 작품이 대부분이고, 한글은 3, 4점정도 뿐이었습니다. 그것을 보며 중국 관람객 분들이 전부 자기 나라의 글씨라고 했던 것이 굉장히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그 후 한국에 들어와서는 한글 화제를 열심히 쓰려고 노력 했었습니다. 그때의 전시가 한글에 애착을 갖고 작업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줘 굉장히 좋았습니다. 또한 지난 매화전(2014년 11월)은 단일 화목을 가지고 전시했다는 의미에서 저에게는 굉장히 뜻 깊은 전시였습니다.
Q. 문인화 작품에서 화제를 빼 놓을 수 없는데요. 선생님께서는 작품의 화제를 위해 따로 서예공부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물론, 그림이 먼저나오고 글씨가 탄생했지만 글씨의 선 질에서 그림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서화동원이라고 하는 말이 있듯이 같은 맥락에서 봤을 때 글씨가 문인화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도 글씨의 중요성을 항상 강조합니다. 물론 글씨를 쓸 때의 필법과 그림을 그릴 때의 필법이 다를 수 있지만, 그것이 같이 맥을 만들어 갑니다. 글씨를 쓰는 사람이 그림을 잘 그릴 것 같지만 또 그것은 아닙니다. 많은 세월을 그림과 글씨. 이 두 가지를 합작하며 해왔을 때 언젠가는 만나는 지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랬을 때 투필성자라고 하여 붓을 던져도 자연스러움이 우러나는 것입니다. 서예의 중요성은 누구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저 역시도 날이면 날마다 한 점씩 꼭 하려고 노력합니다.
Q. 선생님께서는 작업 하실 때 주로 어디서 영감을 얻으시는지요?
옛날에 체본에 의해서 모든 공부를 하던 시절에는 어딘가 채워지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연꽃을 그릴 때, 연 밭에 가서 보니 거의 다 똑같아 그릴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앉아서 도대체 무엇이 있는지 보니 지나가는 바람결에 연잎이 살짝 덮어지며 선이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좋아 일주일 이상을 연 밭에 도시락 싸서 앉아 있으면 어느 순간 정말 마음에 드는 연의 모습이 딱 하나 나옵니다. 그런 것들을 보고 돌아와 그렸을 때의 느낌은 선생님의 체본 하고는 또 다른 느낌입니다. 그래서 제가 십여 년 이상 탐매행을 다닌 것도, 매화가 가지고 있는 선 질이 붓에서 느끼는 조형성보다 살아 있는, 생기 있는 봉우리에서 훨씬 더 많은 영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보며 정말 고생했구나, 저런 세월이 쌓였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일필휘지는 순간으로 지나가는 것이기에 쌓여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월을 담을 수 있는 모습을 보고, 그것을 보고난 후에 나의 붓질로 표현하려 노력하니 다른 사람과는 다른 선 질의 느낌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자연과 나와 옛것을 합일시키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Q. 작업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으셨는지요. 매일 연마를 해야 한다고 하셨지만 사실 테크닉 면에서는 거의 끝에 달하셨기 때문에 작가로서 무언가 답답함, 메너리즘을 느끼시거나 새로운 것에 대한 것을 리프레쉬는 어디서 찾으시나요?
옛날에 너무 안 풀렸을 때에는, 황당무계하시겠지만 무협지를 많이 봤습니다. 그 오므라들었던 마음이 펴지면서 아 이런 세상도 있을 수 있겠구나 하고 내 마음을 다잡았던 젊은 날이 있었습니다. 요즘 제자들에게 늘 하는 얘기지만 한 계단, 한 계단을 올라갈 때마다 그에 따르는 고통을 동반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안 될수록 더 열심히 해라 더 열심히 하면 거기에서 남모르게 조금 더 올라가는 부분이 있다고 말합니다. 저도 수없이 붓을 짓이겨보고 어떤 때에는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아 벼루를 마룻바닥에 내동댕이 쳐보기도 하고, 소질이 없음에 한탄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는 길은 내가 열심히 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대안으로 붓을 잡고 마음을 추스르다보면 성숙해가는 자기 자신을 보는 듯합니다. 여행도 굉장히 좋아하고, 영화도 굉장히 좋아해서 가만히 차 마시는 시간과 그림 그리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하루에 만보이상을 걷습니다. 걷다보면 생각이 쌓여지고 결론도 나오게 됩니다. 저는 그런 곳으로부터 많이 찾습니다.
Q. 작업 하시다가 굉장히 마음에 드는 그림이 나왔다든지, 순간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표현되었을 때의 카타르시스. 어떨 때 이를 느끼셨는지요.
그런 경우는 왕왕 있습니다. 작업을 해두고 집에 들어가면 그 작업이 생각나서 밤중에 화실을 다시 나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기억을 떨치지 못하고 그것이 보고 싶어 다시 나와 보고, 들어가고 했던 적이 많지는 않지만 몇 번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기억에 남는 작품이 대나무 죽순을 그렸던 그림입니다. 술 한 잔 먹고 그린 것인데 굉장히 좋았습니다. 지금도 그 작품을 좋아합니다. 경희대 교수가 그 그림에 반해, 다른 곳에 가서 강의 할 때도 이에 대해 평을 해 주시곤 했습니다. 자주 있지는 않지만 이럴 때 보람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 그림을 다시 그려보려고 하면 될 듯, 하면서도 똑같은 표현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동아미술상에서 받았던 작품은 딱 2점 그린 것입니다. 보통 옛날에 미술대전 준비를 할 때는 화엄사에 들어갈 때 종이 천장을 가지고 들어가서 그것을 다 쓰고도, 다시나와 또 종이를 사서 올라가 그림을 그리곤 했는데 어딘가 모르게 자연스러움이 결여가 되어있었습니다. 지나가며 쌓인 흔적이 더 잘될 때도 있지만 처음 먹었던 자연스러움을 뛰어 넘을 수가 없을 때도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Q. 선생님에게 영향을 준 작가가 있다면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저의 청년 시절에는 의재 허백련 선생님의 화풍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 문인화가들이 다 그러하듯이 중국의 작가들 오창석, 제백석, 팔대산인 등을 떠올릴 것 입니다. 그 중에서도 저는 팔대산인의 작업을 특히 좋아합니다. 팔대산인의 작업에는 생기 있는 발랄함이 숨어있습니다. 그 선 질을 보면 어떻게 이리 자유분방하게 나올까 하는 난만함을 보고 저의 그림 속에 투영하려고 노력을 합니다. 운필을 단련함과 더불어 많은 책을 탐독함으로 인해 쌓여지는 예술, 그것이 문인화입니다. 직접경험도 중요하지만 간접경험을 많이 축적함으로써 자기를 좀 더 표현할 수 있는 여력이 생기기 때문에 화가는 어떤 면으로 보면 종교를 앞서는 것이다. 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만큼 어렵다는 표현인 것 같습니다.
Q. 선생님 문하의 제자 분들은 서예과 출신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젊은 작가들에게 인기가 굉장히 많으신데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가장 강조하는 부분이 어떤 부분인지 궁금합니다.
저는 누구보다 젊은 작가들을 사랑합니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키워주고 싶고,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고 저에게 온 사람들이 하루 빨리 나의 필을 배워 자기의 필법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기대해서 제가 아는 것을 최대한 주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작가를 지향하는 친구들, 그런 친구들이 저를 보고 희망을 느꼈으면 하는 바램으로 살고 있습니다. 또한 아침에 제자를 만나러 갈 때는 항상 기도를 합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내가 될 수 있도록. 편애하는 것을 제자들에게 보여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은 마음으로 똑같이 대하려고 노력합니다. 또, 저는 젊은 친구들이 나를 볼 때, 선생님이 자기들보다 열심히 하는 구나를 느끼게 합니다. 나보다 더 열심히 해야 나를 넘어설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을 본인들이 알기에 제가 열심히 하지 않고 열심히 하라고 한다면 그들은 열심히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하는 것에 자신이 있습니다. 게다가 저는 소질이 없어서 다른 소질 있는 사람들이 3시간이면 할 것을 3일이 걸려도 못합니다. 6일, 10일, 한 달을 걸려서라도 하면 언젠가는 그것을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할 수 있는 마음가짐, 행동을 우리 후학들에게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 그것을 보면서 정말 좋은 작가로 성장해서 발전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Q. 선생님의 앞으로의 작품도 정말 기대가 많이 됩니다. 앞으로 작품의 방향, 계획이 궁금합니다. 또한 이 시대에 어떠한 작가로 기억되고 싶으신지요.
저는 작품의 단초를 개인전을 하고 나면 또 다른 세상이 보였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살려고 노력하며 개인전 작업을 2년마다 하는데, 2년 동안 했던 작업을 3개월 전 정도에 거의 다 불사릅니다. 그때부터 열심히 시작해서 다시 무언가를 나타내게 하려고 하는데 그 3개월이라는 기간은 2년 동안 살아왔던 기간보다 더 열심히 하는 계기가 됩니다. 그래서 제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작업 환경을 만들려고 노력을 하면 또 다른 느낌들이 나타납니다. 지나가다가 무언가를 보며 ‘이렇게 표현하면 참 재밌겠다.’ 하는 느낌들이 왔을 때 늘 스케치를 해놓고 집에 와서 작업해보면 또 다른 형상이 나타나게 되어 그 쪽에 심취해 더 열심히 하게 됩니다. 그러한 경영으로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고 전시를 해오면서 같은 류(類)의 전시를 해보지 않았습니다. 새롭다는 것은 다른 방향을 보이는 것이지 새로울 수 없다고 봅니다. 저는 열심히 작업하는 사람이고 평을 해주는 것은 후학들이기 때문에 이러한 것에 연연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려고 합니다. 저의 아이들 3명이 그림을 그리고 있어서 인지는 모르지만, 또 좋아하는 후학들이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행동이나 마음가짐을 잘 하려고 노력을 많이 합니다.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려고 항상 노력을 하는 편입니다.
Q. 마지막으로 새로이 창간하는 글씨21에 격려사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우선 축하를 드립니다. 기존에 있던 잡지의 성격이 아니라 온라인의 성격이어서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한층 빨리 전달될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 세상이 서예·문인화 계통의 환경이 열악한데 그러한 환경을 극복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가교의 역할을 잘 해주시길 바랍니다. ‘글씨21’에 들어가면 열심히 작업하는 좋은 작가들의 생생한 소식이 있더라 하는 살아 숨 쉬는 잡지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인터뷰는 양평에 있는 김영삼 선생의 작업실에서 진행이 되었다. 새가 지저귀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 쌓여있는 자연과 하나가 되는 곳이었다. 선생이 얼마나 자연을 벗 삼고 가까이 하려는지 느껴졌다. 도시락을 들고 연 밭에서 일주일간 바람에 날리는 연잎의 움직임이 주는 선을 관찰하고, 십여 년 이상 탐매행을 다니며 생기 있는 봉우리에서 그림의 영감을 얻는다고 말한다. 또한 그림에 일반인들도 재미있게 느낄 수 있는 요소들을 넣는 등 다양한 시도들을 한다. 이러한 사생의 과정과 파격적인 시도들이 지금의 우송헌 김영삼 선생을 있게 한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한다. “자연과 나와 옛것을 합일시키려 노력하고 있다.”라고 말하는 선생의 앞으로의 작업들이 더 기대되는 시간이었다.
인터뷰 이신영 기자
<약력>
-1958 전남 진도 출생
-1988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
수상
-1978~95 국전 특선3회, 입선 5회(국립현대미술관)
-1991 동아미술상 수상(동아일보사, 국립현대미술관)
-1983~85 목우회 부문 우수상, 특선2회(국립현대미술관)
-2006 서예 문화상 수상(미술문화원)
-2012 한국예술총연합회 예술문화상, 미술부문 대상수상
교육경력
-1989~ 우송헌 먹그림집
-1991 뉴욕 주립대학교 객원교수
-1995~97 호남대학교 외래교수
-1996~97 동국대학교 외래교수
-1999~ 대전대학교 겸임교수
-2005~ 예술의전당 서예아카데미 외래교수
-2005~06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외래교수
-2011~13 삼성그룹 성우회 외래교수
-2012~13 한국예술원 교수
-2013~ 동방대학원대학교 2년강의
개인전
-2014 가나 인사아트센타(서울)
-2012 Fei 갤러리(중국 광저우)
-2012 인사아트프라자(서울)
-2011 로터스갤러리(광주)
-2010 이형아트센타(서울)
-2007 학고재(서울)
-2003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서울)
-2002 나인 갤러리(광주)
-2001 문화 갤러리(광주시청)
-2000 신세계 갤러리(광주)
-1998 백악예원(서울)
-1995 소나무가 있는 그림전(진화랑, 광주)
-1991 한국문화원 초대전(뉴욕)
MBC드라마 작품협찬
-2014 엄마의 정원, 왔다 장보리
-2013 구가의서, 스캔들, 사랑해서 남주나, 빛나는 로맨스, 제황의딸 수백향
-2012 빛과 그림자, 해를품은 달, 위험한 여자
-2011 불굴의 며느리, 로얄페밀리
-2010 황금물고기
현재
-대한민국 미술대전 초대작가 도 운영, 심사위원장 역임
-목우미술대전, 문인화대전등 운영, 심사위원 120여회 참여
-광주, 전남 문인화협회 고문
-한국미술협회, 목우회, 예문회, 58포럼, 문인화연구회회원
-전북 서예 비엔날레 조직위원
-한국미술협회 문인화 분과위원장 역임
탐매행(探梅行)과 우송매(愚松梅)의 의미
최병식 미술평론가, 경희대 교수
‘탐매행(探梅行)’ 최근 10여년 우송헌 김영삼의 작업을 함축한 단어이다. 그가 찾아 헤맨 매화들은 그의 고향 전넘 진도와 가까운 곳에 위치하지만 전국적으로 유명한 곳을 망라한다. 진도의 소치매(小癡梅)와 운림매(雲林梅), 연동마을 고산매(孤山梅). 화엄사 길상암의 야매(野梅), 대흥사 두륜매(頭輪梅), 백양사 고불매(古佛梅), 선암사의 백매와 홍매, 담양 지실마을의 아룡매(臥龍梅), 계당매(溪堂梅). 독수정 주변의 독수매(獨守梅), 환벽당의 담장매, 백매를 비롯하여 순천 송광사의 송광매, 야매, 350~650년이 된 50여 그루의 매화가 있는 선암사의 선암매(仙巖梅)와 섬진강 줄기인 ‘수류화개(水流花開)’를 이루는 남방지역의 대부분을 섭렵하였다.
매화심취의 동기는 우연히 일간지 기사에서 발견하고 밤을 새워 찾아간 산청 남사마을 분양매(汾陽梅)와의 인연이다. 분양매는 수령 650년에 달하는 분양고가의 명매이다. 우송헌은 어렵게 찾아간 분양고가에서 매화 한 송이가 수백 년이 된 고목나무에 피어있는 장면을 보는 순간 벅찬 감동과 전율을 느끼게 된다. 이 고매는 수령이 다하여 안타깝게도 2006년 고사했고 새가지가 자라고 있다.
물론 우송헌은 청년시절부터 호남 문인화의 거봉 금봉 박행보 선생에게 사사하면서 사군자를 즐겨했다. 그러나 사군자의 실물에 대한 학습이기 보다는 대부분 화법이나 선배들의 작품을 근간으로 하는 연구가 주를 이루었다. 50대 초반, 작가로서 변화가 절실히 요구되던 시기에 분양매의 발견은 그의 예술세계에 결정적인 변화의 계기가 되었다.
1990년대 초부터 뉴욕의 전시에도 참가하고 대학에서 강의를 진행하면서 우송헌은 표현하기 어려운 충격을 받게 된다. 광주화단의 전통적 관습에 머물렀던 그의 시각은 당대미술의 명멸하는 실험사조와 작가정신의 본질적인 문제에 많은 의문을 던지기 시작하였고 작품에서도 추상작업이나 원색을 색면으로 도입하는 작업들을 선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진정한 본질, 자신의 관점과 작업방식으로 가능한 대안을 모색하면서 우연히 산청의 분양매를 만나게 된 것이다.
사군자 그 중에서도 화보에 의하여 정형화된 소재가 아니라 실체로서 다가온 매화의 매력에 도취된 우송헌은 이후 매화를 찾아 ‘탐매행(探梅行)’작가로 변신한다. 2002년 나인갤러리, 2004년 한가람미술관, 2007년 학고재 전시에서만 해도 「터」, 「분매도」등 소수에 그치고 있는 묵매작업은 2011년 로터스갤러리전에서 과반수이상의 작업이 묵매화로 구성된다. 중국의 페이갤러리에서는 대부분 작업을 ‘새벽매화’시리즈로 선보이게 되면서 그간 탐매여행에 대한 보고를 시작한다.
그가 오랜 동안 시도해온 매화 찾기와 읽기, 시각언어화를 거친 심상적 해석과 표현과정은 몇 가지 의미를 지닌다. 우선은 그가 당대미술계, 특히 문인화단에서 찾아보기 힘든 철저한 실제 사생과 현장작업을 병행하는 과정을 통해 지극히 관념적인 인식이나 개자원화전(芥子園 畵傳) 이후 정형화된 구도, 필세, 선배작가들의 전범으로 형식화된 스타일로부터 일탈했다는 평가이다.
작업은 사생 성격과 ‘새벽매화’와 같이 자신의 시각으로 유형화되어지는 스타일로 나뉜다. 자유로운 선묘, 순지의 독특한 감각이 반영된 모필과 농담의 변화, 속도와 깊이의 맛을 머금은 필선과 먹의 쓰임 등은 그의 특징이다. 필선에서는 낭만적인 멋의 결구가 있다. ‘묵매유희’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어울릴 듯한 그의 매화필은 명쾌하면서도 과감하다. 필선의 감각과 가지의 결구가 서예의 맛을 연상케 하면서 파격이 있지만 세필의 끝은 감성적이다.
‘한향춘몽(寒香春夢)’에 비하여 ‘새벽매화’는 여러 번에 걸쳐 담묵으로 배색을 처리하고 백매와 홍매가 어우러지는 새로운 시각의 작업이다. 새벽에 여명을 배경으로 동이트기를 기다린다는 의미에서 눈과 추위를 견뎌낸 매화의 상징적인 의미가 오버랩 된다. 여기에 전통적으로 여백을 중시해온 전통 문인화의 사상과 형식으로부터 새로운 시각의 배경처리는 한글화제와 함께 그만이 갖는 묵매의 특징을 형성한다.
어릴 적 동네의 냇가나 호수에서 놀다 강변으로 다시 망망대해의 바다로 나가게 되는데 마지막에는 다시 동네의 냇가나 호수로 돌아오게 되는 ‘회귀’를 생각할 수 있다. 매화를 찾게 된 계기가 바로 이런 비유와도 연계되는 것 같다.
우송헌의 ‘탐매행’은 자신의 작업노트에서 말하고 있듯이 ‘회귀’라는 말로도 쉽게 해석된다. 그 역시 한동안 당대미술의 다양한 트랜드나 이슈에 대하여 많은 고심을 거친 적이 있다. 추상성, 기학적인 화면구성과 소재의 확장, 다양한 재료의 텍스츄어 등을 구사하면서 실험을 거쳤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최근 관심은 진정한 ‘법고창신(法古創新 )’의 실현을 통한 당대성의 획득이었다.
‘우송매(愚松梅)’는 일정기간 그의 다양한 실험을 거치면서 도출하게 된 전통적 방식의 터득을 통한 새로운 도전이다. 그의 ‘묵매회귀’는 한국 미술계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즉 박물관학적인 가치로 밀폐되고 굳어져온 몽상적 사군자형식을 일탈하면서 자연의 실체, 그 실체로부터 진행되는 응물상형(應物象形)의 심상적 경지를 터득해가려는 노력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전통화단, 서예계의 매너리즘이 수없이 비판되어왔지만 그 화답은 미미했다. 특히 시각예술분야와는 전혀 다른 코드로 형성되어온 문인화단의 독자적 행보는 더욱 우려를 금치 못하고 있다. 우송헌의 탐매에 대한 열정과 새로운 시도는 물론 아직 사생과 형상, 감성의 작업들이 관념과 의경(意境)의 아우라를 내품은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아직도 많은 변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적어도 당대 문인화의 가장 큰 과제인 관념적 타성과 정형화를 과감히 일탈하면서 원천적인 매화의 실체탐구와 그 본질적인 재해석으로 ‘당대성(當代性)’에 대한 접목과 대안모색에 몰입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평가를 기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