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대륙을 이끈 서법가들(북경)>에서 중국의 수도이자 전통서법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북경을 찾아가 뚜렷한 자기 색깔을 지닌 네 분의 중견작가(석개(石開)/후캉메이(胡抗美)/증래덕(曾來德)/이강전(李刚田)들을 만나 그들이 걸어온 길과 예술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이 일궈낸 현대서법계의 역정과 진화의 모습을 육성을 통해 들어볼 수 있는 시간이었고, 우리는 이 기획인터뷰를 통해 우리 서예계에 반추해보고자 한다.
이번 <대륙을 이끈 서법가들(상해•항주)>은 중국 남방의 서화예술에서 큰 줄기를 이루는 상해와 항주를 찾았다. 서예 전방의 영역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3인의 서법가들을 만나 그들의 예술세계에 대해 들어보았다. 그 세 번째 순서로 진진렴 선생을 찾았다.
인터뷰는 글씨21의 성인근 편집주간이 이어갔으며, 통역은 절강대학 임여 교수가 맡아주었다.
2020. 1. 29 글씨21 편집실
Q. 서법의 길에 몸을 담게 된 이유
어릴 적 학교에 다닐 때 가장 먼저 배운 것들은 회화와 전각이었습니다. 서예는 그저 스스로 좋아하며 공부하였는데 중국미술학원에 입학하고부터는 매우 전문적으로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시작한 기점을 얘기하라고 한다면, 미술학원의 여러 유명하신 예를 들면 루웨이자오(陸維釗)선생, 사멍하이(沙孟海)선생, 쭈러산(諸樂三)선생 같은 명사들을 만나면서부터 그저 모필로 쓰는 글씨를 떠나 전문적인 서예공부를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Q. 서법의 실기와 이론을 함께 실천하게 된 계기
가장 이른 기회는 당연히 미술학원에 들어가서 전문적 서예공부를 하면서부터입니다. 전문적 서예공부라면 당연히 이론이 있기 마련이며 이론은 창작과 병행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도 창작실천에서부터 자연스럽게 학술연구 쪽으로 점점 옮겨가게 됩니다. 대학이므로 학술적 연구를 하게 마련이죠.. 그러면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이론연구는 창작에 매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론연구는 예를 들면 서법의 정의라든가 관념, 그리고 미래서법의 선택, 다시 말해 서법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 등 아주 많은데, 여기서 느낀 것은 이론적 수준을 가진 예술가와 그저 글씨를 쓰기만 하는 예술가 사이에는 매우 뚜렷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Q. 『中國書法發展史(중국서법발전사)』를 쓰게 된 계기와 이 책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이 책은 제가 수업할 때 강의한 내용을 녹음했다가 학생이 다시 정리한 책입니다. 이 때 제가 강의했던 내용은 일반적인 서법사의 강의와 현저히 다릅니다. 그때 당시에는 보통 서법사의 책들이 인물의 소개나 또는 매우 간단한 지식들의 소개였습니다. 그러나 대학에서 하는 강의가 이런 간단한 지식들만 소개한다면 학생들은 불만이 많겠죠..
선생님도 만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중략--- 이론은 각 시대에 맞는 그 시대의 정의를 내려야 합니다. 한나라부터 수당, 송원명청의 시대적 정의가 각각 다릅니다.
이 정의는 당시 저에게 서법사에 관하여 어떤 관념 또는 학술적 시각을 갖게 하였습니다. 즉 특별한 시각으로 서법사를 보자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책은 연구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원래부터 있었던 지식류나 상식류의 서법사 책보다 더 재미가 있습니다. 이는 나중 저의 서법사 연구의 특징으로 형성되어 가는데 반드시 역사의 지식, 현상, 인물속에서 그 의의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순수하게 자료만을 소개하려면 그 의의를 명확히 해석해야할 필요가 없겠지만, 저희들의 서법사 연구 방법에서는 이 의의의 중요성을 특별히 강조합니다.
Q. 1999년, 예술과학성과상으로 중국서법최고상인 ‘兰亭奖(난정장)·理论奖(이론장)’을 수상했는데, 당시 연구 주제와 수상의 감회에 대해
이론상은 문화부의 상이 아닙니다. 이 이론상은 중국문련(文聯)이 수여한 상이죠. 그리고 다른 하나가 바로 문화부의 상인데 예술학과(藝術學科)상입니다. 두 개는 서로 다른 상이지만 저로서는 다 성공한 셈입니다. 왜냐면 당시에 서른 남짓, 마흔이 안 될 나이였는데, 당시 저보다 연령이 많이 높은 전문가들도 저와 마찬가지로 연구를 하였지요.. 저도 연구를 했고요, 그러나 저의 연구 방법은 남들과 달랐습니다.
저의 연구 방법은 방금 말씀드렸듯이 특히 그 의의를 찾는데 치중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서법 이론계에서는 대부분 지식의 전파, 고증이나 진위들을 연구하였고 저희처럼 학문적이며 사변적 이론의 연구자들은 매우 적었습니다.
최종 저희들이 내놓은 연구 성과를 가지고 문화부, 문련, 서법가협회의 상을 받게 된 데는 사실 저희들도 매우 의외였습니다. 당시의 이론연구들 속에 이 연구는 매우 개별적이었으며 매우 희소하였습니다. 대부분은 이런 연구에 대해서 이해를 하지 못했지요. 이것은 어떻게 보면 중국의 개혁개방이 당시의 저희들에게 좋은 기회를 준 것입니다. 모두에게 별로 이해되지도 않으며 익숙하지도 않은 이런 연구가 최종 높은 상을 받게 된 것은 사실 매우 쉽지 않은 일입니다.
Q. 학원파를 설립하게 된 계기와 성과
학원파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많은 서법가들로부터 이러한 구상이야말로 매우 전망이 있는 발전방향이라 느끼고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당시에는 사람들이 별로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반대하는 소리도 많았습니다. 사실 우리가 당시 학원파를 제창할 때는 많은 다른 서법가들의 입장과 달랐습니다.
왜냐면 당시 대부분의 서법가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들은 서법은 '과연 무엇인가', '역사상 무엇들이 있었던가', '고대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그것은 또 무엇인가' 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당시 학원파의 방식을 통하여 연구한 것은 '왜 이런가?', '이후에 이것은 또 어떻게 되어가는가?' 하는 것들인데 이는 각도가 완전히 다르지요.
하나는 즉, '이미 있는데 이것은 무엇이며 무엇들이 있는가?'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미 하나가 있는 이것은 왜 이런가?', '다른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그리고 또 앞으로는 어떻게 되어 갈 것인가?' 하는 것이지요. 이는 연구의 각도에서 보자면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 만약 20년이 흐른 뒤 다시 돌아와 오늘을 보았을 때, 마침 이러한 각도로 연구할 수 있는 오늘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이 바로 이 이십 년간을 인도하는 위치에 있을 수 있게 됩니다.
결국 모두가 이 방식대로 해나갈 것이라 생각합니다. 당시 우리들이 이 학원파를 연구할 때 우리는 고대서법의 유형 이외에 오늘날의 새로운 서법유형이 찾아지기를 크게 희망했습니다. 고대서법은 이미 오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미 이는 하나의 유형입니다. 오늘날 서법은 다른 유형을 가질 수 없는가...
이에 당시 학원파는 세 가지 원칙을 가지고 있었는데 첫째는 '주제선행(主題先行)', 둘째는 '형식지상(形式至上)', 셋째는 '기술본위(技術本位)'였습니다. 이 세 가지 원칙을 가지고 오늘의 서법예술창작을 한 단계 더 끌어올려 과거 고전서법의 붓글씨와 분명이 구별되도록 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는 오늘날 이 시대 서법이 마땅히 가져야 할 원소들입니다. 다시 보충을 하나 하자면 저의 40년간 서법 연구속에서 사람들은 저의 서법연구에 관한 성과를 여러 가지 얘기하겠지만 저 개인적인 견해로는 학원파 서법의 탐색이 제 일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공헌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학원파는 사상적으로 사실상 이 시대 서법의 프레임을 새로 설립해 놓은 것입니다. 이런 프레임이 있음으로 인해서 사상관념과 방법론상 개척의 능력이 생기게 되며, 이런 사유를 사용하여 다시 고전을 보았을 때, 즉 원래 우리가 이해했던 고전에서 학원파의 입장으로 다시 본 고전은 변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는 새로운 해독방식이며 이로써 신첩학(新帖學)이나 신비학(新碑學)에 대해서도 저희들은 많은 새로운 관념들을 제기하였습니다. 예를 들자면 첩학에 관하여 우리들이 특별히 주의했던 것은, 원래 알고 있던 조맹부의 원명청시대 서사법에서 위진남북조때의 즉, 왕희지 당시의 법을 써야한다는 신첩학을 제창하였습니다. 신비학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청대의 서법가들을 포함하여 당시의 많은 서법가들 중 특히 조지겸이나 포세신등처럼 첩의 필법으로 비를 썼는데, 신비학에서는 반드시 석각의 방법으로 비를 써야한다고 매우 분명하게 제기하고 있습니다.
즉 행초서를 쓰는 법으로 비를 쓰거나 모필의 방법으로 비를 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뒤에 '초성추종(草聖追踵)'으로 위비, 당해, 해서 등에 모두 이러한 새로운 해석방법들을 제창하여 오늘날 창신의 새로운 틀을 만드는 사상적 운동이 되고 있습니다.
Q. 2009년 북경 중국미술관에서 ‘意义追寻(의미를 찾아서)’전시를 개최하였는데, 일반적인 서예전과 달리 세부주제로 나누어 진행한 이유는?
2009년은 제게 있어서 전환점이 되는 한해입니다. 과 우리들이 서법작품을 볼 때는 숙련이 잘 된 아름다운 모필 글씨를 보는 것이지요. 당연 이 역시 서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그것을 서법예술이라 하기는 많은 부분들에 예술성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다 그랬지요..
비교적 많이 보이는 것은 개인의 똑같은 자기의 서법풍격으로 모든 시문들을 적은 것들이었습니다. 당시, 송사, 한부 혹은 위진의 문장 등을 썼었지요. 그런데 대부분 이런 현상들에 대하여 크게 해괴하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서법은 마땅히 이래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전시를 통해 저는 스스로 추궁한 것이 하나 있는데 이 추궁의 뜻은 먼저 첫 번째 네 가지로 '방서(榜書)', '간독(簡牘)', '초성(草聖)', '고예(古隸)'였습니다. 이 네 가지는 한 서법가의 풍격이 하나의 유형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려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백여 점 작품이 전시중인데 모두가 하나의 풍격이라면 이 전시는 전혀 볼거리가 없습니다. 관중도 좋아할 리 없을 테지요. 따라서 작가는 어떤 장소에서든 각각 다른 풍격 즉 고예, 간독, 초성, 방서 등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 부분은 '열독서법(閱讀書法)'인데, 이 부분은 관상의 목적에서가 아니라 문사를 전달한다는 의미로 ‘비첩고증록(碑帖考證錄)’, '금석제식록(金石題識錄)’, ‘서령독사록(西泠讀史錄)’, '명사방학록(名師訪學錄)’ 으로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전시에서는 크게 중시를 받지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서법가들이 쓴 내용은 잘 아는 시문, 예를 들면 이백의 시나 두보 시 또는 백거이의 시이지요. 관객은 또 무엇을 썼는가에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관심이 있는 것은 쓴 것이 잘 썼느냐 못썼느냐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저는 당시 전시를 하면서 관중들이 저의 전시를 반드시 읽도록 하였습니다.
따라서 '열독서법'이라 하였고 이에 관한 각종 내용들을 만들었지요. 이것은 당시 매우 개혁적인 것이라 대부분 사람들이 익숙지 않아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다시 돌이켜보면 오늘날 이 시대와 매우 적합한 일이 되었습니다. 2009년부터 지금까지 꼭 십년이 지났는데 지금 중국서법계에서는 이미 이 열독과 문사내용에 관해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십 년 이전에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지요...
09년에 가졌던 '의의추심(意義追尋)'의 전시는 제 개인적으로 전시를 통하여 관상에 관한 것을 가장 극치로 만드는 동시에 열독도 가장 극치로 만들어야겠다고 희망했었습니다. 하나의 전시 속에 말이죠... 그때 전시는 바로 그런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목적의 전시는 많은 서법가들로서 생각조차 하지도 못한 일이었을 겁니다.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말이죠. 당시 이 전시는 매우 관심을 끌었던 전시였습니다.
만약 하나 보충하라면 당시 2009년 전시는 주제가 '의의추심'이었는데 내용과 문사를 중히 여긴다는 것이었고, 이러한 방식을 통하여 당시 서법전람의 습관적 패턴을 개조하고자 하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Q. 서예전시가 대중에게 다가서고 함께 호흡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한다고 생각하는지?
사실 아까 말한 2009년 중국미술관에서 '의의추심' 의 주제 속 여덟 개 부제로 열린 전시는 관객들로 하여금 오랜 시간동안 전시장 안에서 끊임없이 음미하고 감상하고 끊임없이 열독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왜냐면 예전의 우리들의 전람은 대부분 전시장 안에서 한 바퀴 휙 돌고 가버립니다. 대동소이하고 잘 알아볼 수 없는 글자들하며...
어떤 것들은 잘 알고 있는 당시, 송사들이라 이 시들을 굳이 다시 읽어볼 필요도 없지요. 따라서 별로 볼게 없다 생각하고 그저 이 양반 글씨 잘 썼네... 하고 가버립니다.
별로 큰 흥미가 없는 것이지요. 저는 여덟 가지 부제를 달았지만 네 개는 관상 부분이며 네 개는 열독부분입니다. 즉 관중을 오래 머물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명제 속 몇 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사실 토론이 필요한 게 있습니다. 지금의 서법이 봉착한 문제는 대중화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죠. 오늘날 서법을 중시하지 않는 것 중에 주요한 것으로 꼽는 관중이 볼 줄을 모른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오히려 전시하는 서법가들의 상상력이 부족한 것이며, 개척의 공간이 없으며, 관객을 두 시간 동안 머무르게 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이 모순의 초점은 대중화이든 무엇이든 관중들로 하여금 와서 보도록 연구한 것이 아니라, 보라고 제작한 작품들이 너무 간단하거나 너무 서툴거나 너무 빈번하다는 것입니다. 이렇다면 목전의 가장 시급히 개조해야할 것은 대중이 아니라 바로 전시를 개최하는 서법가입니다.
---중략--- 제 생각으로는 대중들에게 작고 간단한 전시를 보여주는 것은 큰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러나 전문가에게 작고 간단한 전시를 와서 보라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겁니다. 너무 과소평가한 것이 아닌가, 나의 취미를 이정도로 생각했는가 할 것입니다.
즉 앞으로의 전시가 도전해야 할 것은, 전문가를 마주하여 그로 하여금 능히 오래 머무를 수 있도록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정도로 이해하시면 될 듯합니다.
Q. 기획자나 큐레이터가 해야 할 역할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지?
방금 제기하신 문제는 사실 중국 일본 한국의 서법가들 모두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입니다. 한 개인의 서사의 습관이 형성된 뒤에는 모든 작품들의 풍격을 변화시키는 일은 매우 어려우며 피치 못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따라서 한국도 이 문제를 피해가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면 한국 친구들이 제게 작품집을 보내오기도 하는데 앞 몇 장을 보면 뒤에는 전부가 대동소이합니다.
그저 써놓은 내용만 다를 뿐이죠.. 따라서 만약 그저 모필로 쓴 글씨라는 각도에서 본다면 이는 어떻게 보면 도저히 극복할 방법이 없다는 뜻과도 같습니다.
이는 마치 도저히 풀 수 없는 매듭 같지만 만약 이를 예술표현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는 서법가의 기술보다 전시를 기획하고 추진하는 사람의 사상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이 기획자의 시야가 얼마나 광활하냐에 따라 그가 추진하는 내용도 얼마나 풍부하냐가 되겠지요. 즉 관중들이 전시를 보면서 얻은 느낌과 감상의 유쾌함이 훨씬 풍부해진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특히 서법전시의 기획이 회화나 조각 등 당대예술 어떤 것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원래 서법은 기술상 큰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만약 기획자가 중간에서 어떠한 중간교량작용을 해주지 않는다면 이런 서법 전시는 기본적으로 별로 볼게 없습니다. 좋은 기획자가 있으면 앞으로 전시는 점점 더 보기가 좋아질 것입니다.
Q. 행초서의 창작 측면에서 가장 주안점을 두는 부분이 무엇인지? 그리고 선생님의 현재 행초서가 있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저는 가장 먼저 서법을 공부할 때 시작한 것은 송대(宋代)의 행초서입니다. 임첩을 한 것이 비교적 정통이었고 이것이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행초서의 미불 황정견을 공부하면서부터는 점점 흡수한 부분이 다원화 되어 갔습니다. 이 다원화속에는 민국시기의 조지겸, 포작영, 오창석 그리고 위로는 왕희지와 왕순의 백원첩등이 그 안에 있었죠.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모두 행초서의 울타리 안이었고 나중에는 광초를 연구하게 되는데 즉, 저의 전시항목 중 하나인 '초성추종(草聖追踵)'으로 모든 경전적인 광초를 분석하였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깨달은 바가 매우 큽니다. 또 '위비추구(魏碑追究)'에서 위비 석각의 도끼나 끌로 다듬은듯한 획들은 마침 행초서에서 볼 수 없는 것들이며 완전히 새로운 것들입니다.
위의 두 가지를 결합하여 보태고 최근에는 청동기의 명문 즉 '금문대전(金文大篆)'을 공부합니다. 이런 것들을 많이 보고나면 자기의 붓끝에서 나오는 것들이 우리가 습관적으로 보아왔던 조맹부나 동기창의 행초서들, 심지어 송대의 행초서들이 가지고 있는 그런 유창함과는 완전히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면 모필안에서 나타나는 풍부함의 정도에서 송원이후의 행초서 서가들보다 변화와 언어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석각의 내용이 있으며, 광초의 내용이 있으며, 청동기의 명문을 주조한 획들의 방식이 있기 때문이죠. 따라서 '이 행초서는 매우 보기가 좋다'는 얘기들을 하는데 이 보기가 좋다는 말속에는 학습한 내용이 정통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위의 내용을 겸용하여 여러 가지 필세로 전이시켰음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모두가 제가 느꼈던 것처럼 체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31:08 따라서 지금 우리들이 쓰는 이 획들을 가지고 되돌아 다른 서법가들의 글씨를 비추어보면 글씨는 잘 썼는데 선의 질은 합격하지 못한 예가 많이 있습니다.
Q. 학생들에게 행초서를 입문하게 하는 지도법은?
입문은 역시 경전적 작품으로 출발하지만 저희들이 지도하는 과정에서 관심을 가지고 보는 것은 학생들이 어떻게 쓰느냐가 아니고 어떻게 보느냐 입니다. 즉 학생들의 경전적 작품에 대한 분석능력인데 만약 이것을 이해하고 안다면 언젠가는 표현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것을 모른다면 그 학생은 영원히 표현해 낼 수가 없겠지요...
따라서 제가 학생을 가르칠 때 대부분 그가 고대의 법첩이나 탁본을 볼 때 어떻게 보는가에 많은 주의를 기울입니다. 학생이 그걸 보며 이해하고 안다면 그는 반드시 희망이 있습니다.
Q. 예서작품에서 漢隷(한예)에 국한하지 않고, 篆書(전서)와 簡牘(간독)의 字體(자체)와 章法的(장법적) 특징까지 융합하는 양상을 보이는데, 추구하는 방향에 대해
원래 예서를 쓸 때 대부분 한대 석각의 탁본이었지만 저는 비교적 고예(古隸)를 좋아합니다. 09년 전시회 때 '고예신운(古隸新韻)'이란 항목이 있었는데 고대의 예서, 고박한 예서를 새로운 운치로 표현하였지요. 이 고예를 일정 동안 쓴 뒤에는 간독(簡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간독은 좋은 것 나쁜 것이 같이 섞여 있고 그 우열의 차이가 매우 큽니다.
이 간독을 쓰는 방식이 마침 제가 가장 즐겨 쓰는 행초의 방법과 비교적 부합합니다. 간독의 격동스런 필세가 예서 곳곳에 풍신이 깃들게 하는 매우 큰 표현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는 아주 긴 시간에 걸쳐 간독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연구한 것은 한대의 간독인데 진 이전의 전국시대 간독은 필세의 격동이 그다지 강하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한대의 무위한간(武威漢簡)이나 마권만간독(馬圈灣簡牘), 거연한간(居延漢簡) 등은 매우 훌륭한 것들입니다.
그것들은 위진시대의 이왕 필법을 가지고 예서의 특징을 해독한 것입니다. 당시 모두가 손으로 쓴 것들이지요...예서는 두 가지 길로 나누어져 있는데, 하나는 고대 석각의 예서로 예를 들면 제가 비교적 중시하는 형방비(衡方碑), 서협송(西狹頌), 장천비(張遷碑) 등이 이러한 작품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는 간독인데 한대의 간독이 주요하며 매우 수준 있는 것들이라 생각합니다. 지금은 이 두 방면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예서의 입장에서 보면 석각예서는 반드시 후중하고 고박해야 하며, 간독은 반드시 민첩하며 활발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두 가지는 한 사람의 서법가로 보았을 때 두 개의 극단이지만 절대 한쪽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Q. 전통의 올바른 계승과 이를 통합 현대화의 문제에 대해
오늘날 이 사회는 매우 다원화되어있으며 현대화의 정도가 매우 빠릅니다. 따라서 서법은 당면해 있는 예술의 합법적 신분을 빨리 얻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자면 반드시 과거의 학술적 입장에서 보다 더 많은 예술과의 접근이 필요합니다. 하나의 예술 형식이 되어가는 것이지요.
그러나 지금 상황아래에서는 물론 지금 전통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이 있긴 하지만, 제 생각에는 지금 저희가 일하고 있는 것들이 모두 고대의 경전과 전통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굳게 지켜야 할 입각점입니다. 흔들려서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런 경전을 보면서 이를 해독하는 방식은 고대, 근대와 다를 수 있습니다. 고대에나 근대에 요즘같이 빠른 속도의 사회적 변화가 없었습니다. 고대에 어떻게 요즘 펜글씨나 컴퓨터의 자판 인터넷 및 인공지능 등을 생각할 수 있었겠습니까? 고대에는 없었습니다.
만약 고대의 방식으로 경전을 해독한다면 창조력이 없습니다. 또 고전을 완전히 포기해서는 서법이 변질되고 맙니다.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게 되지요.. 이것이 바로 전통의 가장 어려운 부분인데 '수갑을 차고 춤을 추는'것으로 형용할 수 있습니다. 매우 부자연스럽지요. 저기도 여기도 수갑을 채워 모든 곳이 묶여있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춤을 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바로 오늘날 서법가들의 재화를 검증하는 곳이 되며 가장 중요한 곳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전통은 반드시 굳게 지켜나가야 합니다. 경전은 반드시 존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해독하는 방법은 변해야 합니다.
Q. 선생님의 작품이나 책을 보고 영감을 받는 작가와 후학들에게
제 인상속의 한국서법은 매우 책임감과 역사의식을 가지고 어떻게든 잘 해서 발전시키고자 노력한 걸로 압니다. 저희는 지난 몇 년간 예술의 전당을 비롯하여 한국의 적지 않은 모임과 활동에 참가하였습니다. 심지어 저희들의 학원파도 가서 전시를 하였지요. 그때는 한국 서법이 매우 왕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즘 몇 년간 조금 쇠퇴해 간 느낌이 듭니다.
활약의 정도가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전반적인 한국과 관련이 있으리라 보지만 예를 들면 대학에서 서예과가 없어졌는데 혹시 인재공급이 단절된 것은 아닌가... 물론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저의 생각에 한국이 만약 서법의 발전을 바란다면 한국이나 일본이나 마찬가지로 지금 많은 열정을 보이는 중국과 함께 이 시대의 서법, 즉 21세기 서법의 유형과 어떻게 개척해 나가야할 것인가를 연구해야 합니다. 따라서 옛날의 활력을 되찾고 동시에 서법이 앞으로의 예술 속에 발전해 나갈 가능성을 탐색해야 합니다. 한 개인이 기술적으로 글씨를 잘 쓰느냐 못쓰느냐 저는 이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누가 저의 서법에 존경심을 표시해도 저는 기본적으로 별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시종 우리들이 가져야 할 것은 사명감으로 이 시대의 서법은 과연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후대 사람들은 또 지금 오늘의 서법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처럼 우리들은 이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물려준 것들이 좋지 못하다면 후대 사람들은 비평을 할 것이고 물려준 것이 좋다면 그 사람들은 우리들을 찬성하고 받들 것입니다. 따라서 이 책임이란 한자문화권속 중국, 한국, 일본이 공동으로 최소한 일부의 사람들이라도 반드시 이 일을 맡아서 해나가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