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가면 무엇이 있을까? 제주의 바람과, 제주의 하늘 그리고 제주의 사람… 제주에 갈 때마다 나도 그곳에 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진다. 그때마다 아내에게 “우리 제주서 살까?” 라고 묻지만 아내는 시큰둥하다.
“우리 그냥 가끔 놀러오자.” 그래, 그게 현실적이지. 직장이 가장 큰 문제이고, 익숙한 서울 생활을 바꾸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제주는 참 아름다운 도시다. 그리고 예술가들이 구석구석 숨어있는 곳이기도 하다.
삼농(三農) 김구해(金龜海) 선생을 아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아마도 80년대 이후 세대들에게는 어쩌면 낯선 이름일지도 모른다. 당시 서단을 호령 했던 그가 제주에 터를 잡고부턴 작품을 거의 세상에 내 보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낯설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의 몇몇 작품을 보는 순간 우리는 “아~하!” 하며 무릎을 칠 것이다.
세련된 필획과 조형감각은 대학시절 내 눈을 한참 머물게 했던 기억들로 가득하다. 그런 작가를 제주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 크나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작가는 작품으로 이야기한다. 하지만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 사람을 알아야 한다. 오늘 삼농선생의 이야기를 들음으로 우리는 더욱 삼농선생의 작품에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다시, 그가 꿈꾸는 작품들을 머지않아 다시 만나보기를 기대한다.
안로雁路 · 어룡魚龍 60x130cm
Q. 호는 그 사람의 인생관, 예술관을 담는데 三農(삼농)이란 号(호)에 담은 뜻이 무엇인가?
- 号(호)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아요. 왜 三農(삼농)이냐? ‘1’이란 숫자는 출발(出發)이면서 가장 크다는 뜻도 있고 많은 무리 중에 우뚝하다는 뜻이 있고요. ‘2’란 숫자는 상생적(相生的) 의미의 음(陰)과 양(陽)을 뜻함이요. ‘3’이란 많은 것을 의미하고 또 생산적(生産的)인 뜻이 있는데 서양문화에서는 7(럭키 세븐Lucky seven)이란 숫자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우리 동양문화에는 ‘3’이란 수를 널리 사용하고 있어요. 예컨대 천·지·인(天·地·人) 삼의(三儀) 또는 삼재(三才)를 비롯해서 삼광(三光 日·月·星), 불가(佛家)에서는 불·법·승 (佛·法·僧 三寶) 기독교에서는 성부·성자·성령 삼위일체 등 삼신(三神), 삼황(三皇), 삼다(三多), 삼무(三無) 그 밖에도 많이 있죠.
우리가 예전부터 사용하는 화로나 향로를 보면 다리가 세 개죠. 삼족정(三足鼎)을 축소한 것인데 참 묘하죠. 네 다리일 경우 평지에 놓으면 뒤뚱거리고 불안정한데 삼족정은 약간 경사진 곳에 놓아도 중심만 잡아 놓으면 안정을 유지하죠. 모든 이치가 물리적 역학관계일 텐데 역시 중량과 분배로 인한 균형으로 안정을 유지한다는 거죠. 아이들 놀이터에 가보면 시소도 그런 원리죠. ‘삼(三)’에 대해 설명하다보면 끝이 없어요. 우리 삶속에 그 의미를 알고 살아가면 큰 폐단이 없을 겁니다. 어느 한쪽으로 편중되다보니 불편·불안정·불화가 발생된다고 봅니다. 한없이 올라가고 한없이 쌓으면 무너집니다. 여기서 중용(中庸)을 배워야죠.
‘農(농)’자는 농사의 뜻도 있지만 옥편에 보면 “농사하다”, “힘쓰다” 즉, 노력하다는 두 가지 의미의 글자일 텐데요. 그래서 ‘논어 학이편(學而篇)’에 증자(曾子) 말씀 중 오일삼성오신(吾日三省吾身), ‘나는 매일 내 몸에 세 가지를 성찰하노니 첫째, 爲人謀而不忠乎(위인모이불충호). 사람을 위하여 어떤 일을 도모함에 있어서 진심을 다하지 못한 점은 없는가? 둘째, 與朋友交而不信乎(여붕우교이불신호). 친구와 더불어 사귐에 신의를 지키지 못한 일이 없는가? 셋째, 傳不習乎(전불습호). 성현(聖賢) 말씀 가르침을 제대로 익히고 실천하지 못한 것이 없는가?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어요.
직필위본 · 130x40cm
기왕에 호 얘기가 다소 장황하지만 한 가지만 더 하고 끝내죠. 어차피 농경시대 얘기겠는데, 삼여(三餘)라는 말이 있어요. 그 말은 농부가 큰 비가 올 때, 농한기(겨울), 밤에 심신(心身)의 여유를 갖는다 해서 하는 말인데 나는 남보다 뛰어난 재주도 없고 그래서 한글 호를 ‘글밭’으로 자작(自作)하여 한글작품에 써온 지 50여 년이 됐지만 ‘글밭에서 삼여(三餘)에도 노력하는 사람이 되자’ 그래서 삼여농인(三餘農人)입니다.
結繩 · 100x100cm
Q. 스승이셨던 월정 정주상(月汀 鄭周相) 선생님은 어떤 분이셨나?
- 선생님을 뵙게 된 과정을 생각하면 눈물 나는 사연이 꽤나 긴데요. 감히 그 어른의 제자라고 선뜻 나서기가 두렵습니다. 아직 공부도 덜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칫 선생님 일생동안 학처럼 사신 어른께 자랑스러운 제자도 못된 주제에 누가 될까 두려워서죠. 그래서 항상 선생님의 제자라고 당당히 밝힐 수도 없었죠.
후학 훈도는 물론 서예술 정신세계는 타에 추종을 불허할 만큼 맑고 밝으셨어요. 전·예·해·행·초 한글까지 두루 능하셨고, 문학적 감성이 탁월하셔서 아동문학에도 등단하셨어요. 또한 문필력(文筆力)이 좋으셔서 월간서예 잡지도 국내에서 처음으로 발간하셨는데 (창간호부터 83호로 운영난으로 폐간, 지금의 월간서예 전신) 그때엔 서예인구도 많지 않고 전국에 구독자라야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이니 83호까지 버티기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겠죠.
선생님의 작품세계는 엄청난 양의 임서와 자연에서 발견하신 웅혼(雄渾)하면서도 경쾌하여 감상하는 이로 하여금 감동케 하는 이유가 획마다 음악적 리듬이 배어있어 기운생동(氣韻生動)으로 표출되는 까닭이죠. 천품에 총명하심과 인문학적 소양을 고루 갖추시고 자력으로 고전을 독파(讀破)하여 대가의 경지(境地)에 이르셨어요. 60년대 초 펜글씨 교본과 국정교과서 저술로 우리들 어렸을 적 선생님 지은 초등글씨본으로 습자시간에 공부했죠.
중국과 수교되기 전에부터 한·중·일 등 국제전시교류에 핵심으로 한국대표활동을 능숙하게 하심으로 각국의 명 대가들의 감탄 속에 가히 신필이라는 호평도 받으시면서 현재도 운영 중인 국제난정필회 한국대표로 노익장 활동하시다 작고하셨는데 공부에는 엄격하시지만 일배취(一盃醉)하시면 그렇게 섬세하시고 온화하신 인품으로 흥도 많으셨습니다. 작고하신지 여러 해가 지났는데도 가끔 꿈에서 모실 기회를 주시는데 너무나 감사하죠. 계실 때 잘 모시지 못해 항상 한이 되죠.
글씨21 석태진 대표가 제주 서귀포를 불원천리 달려와서 선생님을 물으니 수많은 날들 선생님 사랑받았던 그날들이 어제 일처럼 느껴지는데 선생님은 안 계시고 먹먹한 가슴으로 어찌 다 말할 수 있나요. 어느 날 주석(酒席)에서 “삼농! 자네 호 나하고 바꿈세.” 하시던 그 음성을 이제 어디서 들어볼까요. 선생님 잘 모시지 못하여 죄송할 따름이죠.
결승 · 150x100cm
결승 · 150x100cm
달을 품은 이무기 · 90x70cm
내자후각석(臨書) · 150x100cm
Q. 공직생활 중에서도 서예 작업을 이어나가셨는데 직장과 예술 활동 병행에 어려움은 없으셨는지?
- 애로점(隘路點)이 한두 가지겠어요. 남들은 매일 같이 먹 갈고 글 쓰고 하는데... 어떤 인연으로 잠깐 동안 관직에 몸담게 되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바로 그 시절을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휴일이나 근무 시간을 제외한 시간에 해야 하기 때문에 밤으로 연구하고 남들 여행갈 때 못가고, 그래서 아이들한테 늘 미안하고 “아버지는 맨날 글이나 쓰는 사람이지. 우리하고는 관계없다.” 이런 식으로 할 정도였으니까. 내조의 힘도 컸고요. 그런 걸 배려해줬으니까요…
法句經(법구경) · 40x20cm
一葉(일엽)스님 시, 가을 · 40x130cm
自作 詩 '방촌세계(方寸世界)' · 김구해作
Q. 26년 전 제주도로 낙향한 걸로 알고 있다. 어떤 이유로 제주를 선택했는가?
- 내 이름 거북 구(龜), 바다 해(海) ‘ 거북이는 바다로 가야 산다.’라는 그 어떤 불문율이 있지 않았나. 우연히 내려오게 됐는데 여기가 나하고 맞아요. 정서가. 그래서 과감히 다니던 곳을 떨치고, 여기서 머물게 되었죠. 여기서 살아보니까 인정이 흐르고 풍광이 좋고 내가 머무르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구나. 해서 지금도 싫증을 느끼지 않고 하루하루 지내고 있죠. 가족들은 난리입니다. 하다하다 못 말리니까. 내 고집 못 말립니다. (웃음) 모두 다 얘기하자면 길어지고, 오다보니 여기까지 와서 은거(隱居)하게 되었는데 생략하고 고시조 형식(古時調 形式)의 한 수로 대신 할까요?
유배(流配)도 아니외다
출가(出家)도 긔아니
무릉(武陵) 찾는 길손아
정처(停處)가 도원(桃園)일레
취몽(醉夢)에
태평성사(太平盛事)를
안평(安平)만나 물으리라
글밭 삼농 作
아시다시피 안평대군은 세종의 3남인데 詩·書·畵에 능했고, 풍류도 좋아했는데 꿈에 무릉도원을 찾아 놀다가 깨어보니 허망하여 당시 유명 화가 안견(安堅)을 불러 꿈 설명 해주고 그리라 해서 그 유명한 걸작 몽유도원도(夢遊挑園圖)가 나왔죠. 평론가님들이 붙여준 이름 “제주로 간 서단의 야생마”는 지금 여기 몽지당(夢之堂)이 무릉도원이고, 나의 여생 도장(道場)인 줄 알고 주변에 어지신 분들 덕택에 잘 살아가고 있네요.
매월당시 · 150x80cm
老蠶作繭 扇 · 40x25cm
중국 서법 총 연합회 부주석 후캉메이(胡抗美) 개인전
초대기념 파티에서, 2014
서옥의 미소 · 김구해作 (연필, 스코틀랜드지)
지현이의 꿈· 김구해作 (연필, 스코틀랜드지)
민주의 첫돐 · 김구해作 (연필, 스코틀랜드지)
농부의 유품 · 김구해作 (연필, 스코틀랜드지)
Q. 삼농(三農) 김구해(金龜海)가 생각하는 서예(書藝)란?
- 우선 ‘문자(文字)’라는 약속기호(約束記號)를 바탕 근간으로 하여 지·필·묵이란 도구로 심오한 정신세계, 즉 심상(心象)을 가시적(可視的)으로 아름답게 표현하는 예술적 행위로 집약할 수 있겠는데요. 조금 더 들어가 보면 서예술 만큼 콘텐츠가 폭 넓고 다양한 것이 없어요. 우리 인간의 의·식·주 생활 범주에 어디에도 관련이 없는 데가 없어요. 반드시 디자인에 선(線)이 등장하게 되는데 거기에는 유형과 무형을 내포하고 있어요. 그 선이 바로 선의 예술인 서예가 깊은 곳에 박혀있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의미에 문장을 써야 한다는 것만을 서예술로 단정 지어서는 곤란하다는 거죠. 나아가 대자연 만물을 살펴보면 발상의 전환을 하게 되는데 가령 앞뜰에서 설중매화 향기나 가지에 강인한 자태를 보고 선비정신을 생각하고 바라보면 알게 될 겁니다. 맑은 하늘에 높이 떠 하얀 배기가스를 뿜고 간 흔적도 우주에 그은 아주 짧은 선, 에어라인(air line)의 예술로 본다는 거지요.
가림토 · 200x100cm
가림토2 · 200x100cm
모스코바 출생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는 일찍이 깨어있는 예술가로 보는데 그는 “예술에 있어 정신적인 것”에 대해 논지를 폈고, 이어 점·선·면(点·線·面)에 대해 자기예술적 이론과 개성을 작품에 도입한 예는 아는 이는 알겁니다. 이렇듯 21세기를 향하는 오늘날 양(洋)의 동서(東西)를 가릴 것 없이 인공지능 알파고 시대가 도래 하였으니 법고창신 능전지변(法古創新 能典知變)도 물론 중요하지만 배우고 가르치는 입장에 소수의 연구가를 제외한 과거 수상 심사경력을 자랑하고 또 그것이 후진들로 하여금 위력이 되고 위대하게 보여 불건전 공모전 사업에 동참하는 안타까운 해프닝이 연속된다면 타 장르 작가들은 웃지요. 이제 미래를 위해 꿈에서 깨어나야 서예술이 살아남지 않나 싶어요. 왜냐하면 중세 이전 천동설(天動說) 시대에 백가쟁명(百家爭鳴 대가들의 서법이론도 동제(同題)이론이고 보면 후학들이 공부하는데 무슨 큰 도움이 될 건가요?
1532년 폴란드에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1473-1543)가 주장한 지동설(地動說)은 200여년전 이탈리아 크리스토퍼 콜럼브스(1451-1506)로 하여금 미지의 신대륙을 발견하게 하는 일대 쾌거로 오늘의 남북아메리카에 뉴 프론티어 마인드 청교도 정신이 뿌리내렸음도 기억해야 하겠죠. 왜 지구는 축이 23.5도로 기울어진 채 태양계를 자전·공전하여 해와 달의 빛을 번갈아 받아 하루·한달·일년 사계절을 이루는가? 그러하여 음·양의 원리가 만물을 생육·소멸케 하는가? 그 외에도 영국 찰스다윈(1809-1882)은 왜 종의 기원 연구에서 진화론을 주장했는가? 오스트리아 프로이트(1856-1939)는 왜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고 슬피우는가? 정신분석학 연구로 세계적인 심리학 연구에 원동력이 되었다는 사실도 종합예술이라 할 수 있는 서예술 연구를 파고드는데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대목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知白守黑(연하장) · 20x15cm
Q. 선생의 서예적 시각은 남달랐던 걸로 알고 있다. 26년 전이 아닌 요즘 지향하는 서예가 궁금하다.
- 무계획이 유계획이에요. "내가 뭘 해야겠다." 생각을 하면은 그대로 되는 게 몇 가지가 없더라고요. 내가 또 노장 철학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어요. 그걸 보면 또 자연주의 철학이잖아요. 유무상생(有無相生)이라,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서로 상생보완의 역할을 하더라. 노자 도덕경에 보면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도를 도라고 하면 이게 벌써 도에서 떠났다는 이야기거든요. 전각을 알려면 전각을 연구해야죠? 또, 전각을 잘하려면 이 서(書)와 역사의 궤(軌)를 같이 하고 있기 때문에 소홀히 할 수 없어요. 상관관계가 있는 거죠. 뎃생도 그렇고 연필, 분필, 다 붓이에요, 철필까지도. 어느 하나 떼려야 뗄 수 없는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거든요. 한 덩어리 속에서 작가가 그 순간순간 소위 말하는 자기가 '켕기는대로' 좋아하는 대로 표현하면 그것이 그 사람의 진정한 작품세계가 이루어지지 않느냐. 그 자료와 생각과 여러 가지 연구를 얼마나 깊게 했느냐에 따라서 좋은 작품이 나온다고 정의를 내리고 싶어요.
綠楊 · 紅杏 대련 · 150x30cmx2
임진왜란7주갑기념展 · 124.5m
Q. 제주 생활에 만족하는가?
- 너무 좋죠. 어쩌면 내가 육지에 있었으면 죽었을지도 몰라요. 내가 조금 기관지가 약한 편이거든. 이게 맞는 거예요. 철새도 자기 환경에 따라서 날아다니잖아요. 인간도 어떤 주어진 환경에서 "이것이 내 복이니라." 하면 목숨이야 부지하면서 살겠지만 대도시의 매연 속에서 가두어진 그런환경 속에서 얼마나 이런 호방한 자연이 그리웠길래 뜻 있는 분들은 전부 다 벗어나려고 노력들 하시고 있는데 나는 우연치 않게 일찍이 벗어나 지금 이렇게나마 건강과 복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주변에 여러 도와주신 분들도 많이 계시고, 그 덕에 내가 삽니다.
그 사람은 평생 공부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모르지, 사실. 내가 컴퓨터를 아나, 운전을 할 줄 아나, 은행에 거래하는 절차를 아나, 보내주면 보내주는 대로 그걸로 먹고 살고. 제가 생계유지를 위해서 하는일은 아주 빵점이에요. 측은해서 주변에서 도움을 많이 받은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戰風 · 130x40cm
Q. 대선배로써 글씨 공부를 하는 후학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는가?
- 지난 날 대학에 서예과 설치를 위해 국회 입법청원서에 첨부할 서명운동할때 우리나라 서예인구 추산 500만 이라고 기록한 기억이 나는데 지금은 아마도 2000만도 넘을꺼예요. 서예단체도 앞다투어 사단법인 등록을 모두해서 경향각처에서 공모전도 그렇게 많이 생겨났고 그러해서 초대작가도 많이 배출하고 이젠 1개 단체 주최하는 공모전 행사에도 심사위원이 30명씩 위촉을 한다니, 웬일인가요 놀랍죠. 이젠 지방에서도 소원을 풀게 되었으니 다행입니다.
미협으로부터 서단독립개혁운동 초창기에 깊이 관여했던 일중에 머언 옛 얘기로 기억되지만 첫번 서예대전 공모추진 이사회때 지방작가 배려 방법으로 미표구 출품하도록 제안한것이 참 좋은 방안이라고 동의해서 성공적으로 치루었는데 이젠 서울에서는 대한민국 이름 앞에 놓고 지방에서는 각 시도 주최 공모대전, 무슨무슨 이름 걸고 행사를 아주 성공적으로 치룬다니 ... 다행인데 그 바람에 전통 표구사는 문닫기 일쑤, 기계 족자집에서는 개가를 울리고....
옛 이야기가 생각나는데요 짚신 장수아들과 우산장수아들을 둔 어느 노파의 심경을 알만해요. 그래서 세상사 웃을일 울어야 할일이 따로 없다는 거죠.
예전엔 감히 어림도 없었지만 이구동성으로 심사위원을 심사하는 미 출품자가 곳곳에서 지켜보고 있음을 알아야 하겠죠.
십목소시(十目所視), 십수소지(十手所指) - 열 사람이 지켜보고, 열사람의 손으로 가리킨다는 얘기가 고전에 있지요.
청허당 시 · 목간(木簡), 200x150cm
노자 도덕경 · 죽간(竹簡)-1, 40x130cm
삼연회 현판 · 120x40cm
Q. 오랜 시간 선생의 작품을 접할 기회가 없었다. 그동안의 작품을 정리해보는 전시회 계획은 없는가?
- 벌써부터 구상은 하고 있는데 앞으로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센스 있는 젊은 후배 작가들은 그걸 일부 건드리고 있더라고요. 근데 그것은 타 장르에서 하는 걸 갖다가 하는 거는 조금 문제가 있는 것 같고. 서예에 관한 정체성을 잃지 않는 범위 내에서 얼마든지 영상작업도 할 수가 있거든요. 그래서 그 작업을 해야 되겠는데 기술적인 부분이 내가 또 영상미디어, 기계작동, 내지는 기술적인 부분에 몰라서 그런 분을 찾고 있어요.
신심명(信心銘) · 13x4cmx4면
김구해 作
나는 기획하고, 제작하고, 연출하고 그 분은 기계적인 장비 이런 걸로 날 도와주시면 되는데 예술의 전당의 실험연구 전시관에 계약하러 갔다가 내가 건강에 갑작스러운 변화가 생겨서 그것도 아직 더 있다가 하라는 신호가 아닌가. 그래서 내가 잠잠히 건강관리를 하고 있어요. 요즘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전반에 걸친 어려움이 해소되어 안정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그때 마음에 담고 있는 작업풍경을 정리해서 발표를 할 예정이에요.
2020. 6. 19
글씨21 편집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