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 21

글씨와 놀다. 매거진 '글씨 21'

서예·캘리그라피

[Critique]

2020-10-23
石甫 李吉遠의 大巧若拙과 寜醜毋媚의 실현

202006031507542888.jpg

202006031506580349.jpg

202006031517016721.jpg

글씨21 기획 창작지원프로젝트

선정작가 이길원 작가 초대전 전시장 전경







石甫 李吉遠
大巧若拙과 寜醜毋媚의 실현


이 영 철(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총장)


1. 들어가기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한다그러나 만남의 인연은 쉽지 않아 일찍부터 헤아릴 수조차 없는 길고 긴 시간인 ()’으로 표현하였다흰두교에서는 한 겁을 432천만년이라 하고불교에서는 가로×세로×높이가 각 100m인 바위를 100년에 한 번씩 스치고 지나는 천사의 옷자락에 그 바위가 다 달아 없어지는 시간을 1겁이라 이른다고 한다우리가 살면서 옷깃을 스칠 수 있는 인연은 500겁을사람과 사람이 하루 동안 동행 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데는 2천겁의 세월이 지나야 하며이웃으로 태어나 살아가려면 5천겁의 인연이 되어야 하고하룻밤을 같이 지낼 수 있으려면 6천겁이 넘는 인연이 있어야 하여억겁의 세월을 넘어서야 평생을 함께 살 수 있는 인연이라고 한다.

이렇듯 긴 시간 인연의 을 지내야 만날 수 있다는데석보 이길원 동학(同學)과 필자와는 근 20여 년 전에 만나 지금껏 교유(交遊)하고 있으니 과연 전생에 몇 천만겁 이상의 인연은 쌓았을 것이다그리고 이 인연의 과정에서 천학비재인 나에게 전시회 후일담(後日談)을 요청하니 어떻게 사양할 수 있겠는가그저 어리석고 부족함을 뒤로한 채우리의 인연에 답하고자 한다.

 

D58A3622.jpg

寧麤毋媚 추할지언정 꾸미지 마라 · 105x35cm




D58A4418.jpg

氣壯山河 높은 산, 큰 강처럼 기세가 웅장하다 · 135x34cm


2. 대교약졸(大巧若拙)의 실천

노자(老子)는 도덕경(道德經)』 4장에서 아주 곧은 것은 굽은 것 같고아주 교묘한 것은 서투른 것 같고아주 말 잘하는 것은 말더듬는 것 같다(大直若屈 大巧若拙 大辯若訥)”고 말하였다이렇듯 우리의 주된 관심사인 대교약졸은 기교와 서투름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음악미술공예건축 등의 예술분야와 관련이 있다그리고 노자사상의 적자라고 할 수 있는 장자(莊子또한 이런 관점에서 대교약졸을 바라보았다.

즉 장자(莊子)』 거협(胠篋)편에서 모든 인위적인 기교를 완전히 부정하고 자연스러운 상태로 돌아갔을 때 천하 사람들은 비로소 진정한 기교를 지닐 수 있으니 큰 교묘함은 마치 서투르게 보인다(而天下始人有其巧矣 故曰大巧若拙)”고 하였다다시 말해서 고대 음악의 달인인 사광(師矌)의 귀를 막아야 비로소 사람들의 귀가 밝아질 것이고눈이 지극히 밝은 이주(離朱)의 눈을 붙여놓아야 비로소 천하의 사람들이 밝음을 지니게 될 것이며최고의 장인인 공수(工倕)의 손가락을 비틀어 버려야만 천하에는 비로소 사람들이 교묘함을 지니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이 말은 모든 인위적인 기교를 완전히 부정하고 자연스러운 상태로 돌아갔을 때 비로소 진정한 기교를 알 수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D58A3946.jpg

차마 들어갈 수 없었다 · 22x34cm


이렇듯 대교약졸의 해석은 대체로 인위적인 와 무위자연의 을 서로 대립적으로 상정하고인위적인 기교미(技巧美)보다는 자연스러운 졸박미(拙樸美)를 지향하는 것으로 이해했다물론 이 말은 틀리지 않다그러나 또 다른 해석으로 대교약졸에서의 이 단순히 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를 무조건 배척하고 부정하는 이 아니라, ‘를 포괄하는 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다시 말해서 여기서의 은 그냥 단순히 서툰 것이 아니라 겉으로는 서툰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기교의 최고 경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은 청음(淸陰김상헌(金尙憲, 1570-1652)선생 청음집』 38권의 용졸당기(用拙堂記)라는 글에 보인다여기에 보면 민성휘(閔聖徽, 1582-1647)라는 분이 벼슬에서 물러난 뒤 충청도 가림(嘉林)에 터를 잡아 집을 지었고, ‘용졸(用拙)’이라는 자신의 호를 따서 용졸당(用拙堂)’이라고 당호를 붙인 뒤청음선생에게 기문(記文)을 지어 줄 것을 청하였다이에 청음선생은 졸이란 것은 덕이다.(拙者 德也)”라고 해석하고 있다.

우리는 보통 은 어리석다’ ‘서툴다’ 등의 뜻을 갖는 글자로뛰어나지 않고 별 볼일 없는 상태를 나타낸다고 알고 있다그렇지만 서툴고 어리석기 때문에 꾸민 데 없이 수수하며 자랑하지 않는다다시 말해서재능이 매우 뛰어난 사람은 그 재능을 쉽게 드러내지도 않고 자랑하지도 않으므로 언뜻 보기에는 도리어 서툰 사람 같아 보인다는 뜻이다.

그렇다석보는 분명 을 추구하며 실천하는 사람이다일찍이 대한민국서예대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였으나 어느 곳이나 누구에게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고심지어 긴 시간을 은둔(隱遁)하며 자신의 작업에만 몰두한 서예가이다오늘 그의 편린(片鱗역시 사랑하게 되면 닮아간다는 말과 서여기인(書如其人)’이라는 성어가 대변해 주고 있다더욱 갈수록 시끄럽고 혼란스러워지는 서예계에 묵묵히 자신의 위치를 지키며 성실하게 대교약졸을 실천하는 예술인이다.



D58A3805.jpg

검은새 · 45x53cm




D58A3929.jpg

象 · 117x91cm


3. 석보예술의 정체성

요즘 우리 서예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다이들에게는 한국서예라는 말로 중국이나 일본과 차별화된 한국적인 서예미의 특성을 찾으려는 노력과 고민의 흔적이 숨어 있다고 하겠다또한 이는 역사적으로 내려오면서 형성된 민족적 정체성과 자각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을 것이다물론 한국서예는 중국이라는 틀을 완전히 벗어나서 생각할 수는 없겠다역사 문화 종교 학문 등 거의 전 영역에서 우리나라에 끼친 중국의 영향이 막대하기 때문이다그러나 한자문화를 공통분모로 하면서도 우리나라는 우리만의 고유한 영역을 확보해 오고 발전시켜 나왔음도 사실이다.

우리는 한국서예를 탐구할 때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서예미를 제시하려고 애써왔다그리고 이러한 부분이 우리의 탐구를 지체시키기도 하였다그러나 우리 서예가 중국서예와 흡사하더라도 우리가 선택한 것이라면 우리의 서예가 되는 것이 아닌가다시 말해서 우리 서예의 독특함만을 부각시키면서 중국의 영향을 애써 배제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그것이 중국의 지대한 영향에서 탄생되었다 해도 우리의 선택에 의해 취한 것이라면 우리의 서예가 되기에 전혀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이를 테면 같은 문화권이라고 해도 중국과 일본인이 바라보는 아름다움과 한국인이 바라보는 아름다움이 다름은 틀림없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D58A3931.jpg

자연재앙 · 96x100cm


또한 한국서예의 미를 전통적인 기법에서에서만 찾는다면한국적인 서예미는 생명력을 잃어 박제화 될 수도 있다어설픈 옛것 흉내 내기는 서예가의 활력을 앗아갈 것이기 때문이다서예가 자신이 한국적인 서예라고 생각하는 것이라면그 어떤 것이든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하면 된다는 말이다그러므로 지금까지의 한국적인 미라고 말하는 무작위의 작위나 자연의 미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탐구해야 할 것이다그래야 만이 다양함과 함께 활력과 생명력을 되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아래는 석보의 작품을 살펴 그 특징을 찾아보겠다.

서예작품으로 <기장산하(氣壯山河)>는 일필휘지(一筆揮之)의 용묵(用墨)과 율동감이 돋보인 운필(運筆)의 작품이다또한 <고시일구(古詩一句)>는 본인의 작품 중 <령추무미(寜醜毋媚)>의 실현인 듯하다전각의 작품으로 <설조산방(雪爪山房)>은 균형 잡힌 구성과 여백이 돋보이고그리고 초형인의 <됴룡뇽>과 <물고기와 새>는 도필로 서화동원(書畫同源)을 이해하게끔 한다이들 모두는 정연한 균제(symmetry)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주도면밀한 장법과 오랜 시간의 정신 수양의 결과물일 것이다.

아울러 그림 <()>, <거울아이>, <차마 들어갈 수 없었다.>, <길 찾기>, , <자연재앙>, <슬픈 크리스마스등에서 보듯이 극단적인 사실성보다는 무계획적’ 또는 자연 그대로의’ 소박성이 돋보인다더욱 ()’를 주제로 하는 작품 <흘겨보다>, <검은 새등은 채움과 비움의 미학이 공존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결과적으로 오늘 보여준 석보의 작품들은 대교약졸의 아름다움으로 정련된 소박미와 심오한 단순미그리고 숙련된 평담미(平淡美)에 분산된 통일미또한 배경과의 조화미를 보여주고 있다아울러 대중이 선호하는 서예미와 석보 자신만의 주체성그리고 현재성이 작품에 녹아 들어 있다단지 일부 예술가나 서예가가 서예를 추상예술이나 선()의 예술에 구속시키고 있음에 주의할 필요가 있겠다물론 문자 자체가 추상적인 부분이 없지 않고선을 긋는다는 의미에서 생각한다면 일리가 전혀 없는 말은 아니다그러나 여기에서 문자의 가독성(可讀性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서예가 문자의 점획(點劃)이 어울려 조화로운 자형을 표현하는 것임을 생각한다면 적절하지는 않을 것이다이 점 계속적인 화두로 삼았으면 한다.



D58A4455.jpg

알베로 · 25x20cm





IMG_1224.jpg

이길원 作



4. 나가기

이길원은 인품의 절개와 지식의 함양을 중시하는 서예가요 전각가이며 화가이고 다도인(茶道人)이다다시 말해서 서화각다(書畵刻茶)의 사절(四絶)로 불리는 문화와 예술의 모든 부문에서 뛰어난 퓨전 아티스트이다어릴 적부터 타고난 천성(天性)을 바탕으로 박학다식(博學多識)함을 더해 그의 예술에 승화되고 있다이러한 과정의 편린(片鱗)들을 어떻게 일일이 나열할 수 있겠는가.

필자의 아둔함을 탓하며 장석주시인의 대추 한 알이라는 시구절로 글을 맺고자 한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중략)”

 


東方文化大學院大學校 總長 李永徹 두손모음
2020년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