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곡 김춘자展> 전시장 전경
一葉輕舟의 생명여정 김응학 (성균관대 교수, 한국동양예술학회 회장)
“예술은 도(道)에 형상과 생명을 부여하고, 도(道)는 예술에 깊이와 영혼을 심어준다.” 들녘에는 저마다 피는 꽃이 있듯, 서예가도 나름대로 예술의 생명을 여백 속에 틔운다. 올해는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사람들의 일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작가들은 개인전을 열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단풍시절을 맞이하여 낯선 경치를 찾아 여행을 떠나는 것도 좋지만, 새로운 시선으로 전시장을 찾는 것도 답답함을 해소하는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다.
청곡 김춘자 박사(이하: 청곡)는 삶의 목표가 또렷하여 3년마다 개인전을 갖는다. 이번 전시는 다섯 번째의 개인전이 된다. 작품은 주로 초서이고 몇 점의 전서도 있다. 청곡은 작품의 문구부터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청곡은 오체를 잘 구사하는 작가이다. 특히, 초서는 장욱, 소동파, 미불, 황산곡, 왕탁, 우우임 등의 서체를 즐겨 공부하였다. 또한, 청곡은 성균관대학교 유학과에서 동양미학을 전공하면서 박사학위(논문:「員橋 李匡師 書藝美學의 陽明心學的 硏究」, 2011년)를 획득한 바 있다. 그 동안 필자가 느낀 청곡의 삶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었다.
이번에 전시된 작품은 소박한 생명의 은유적 표현들이다. 그것은 형식적 화해가 아니라 생명의 조화이다. 작가는 자신의 느낌을 전서와 초서의 생명선으로 표현하면서, 모든 생명의 소중함과 움직임을 상징하여, 감상자들로 하여금 행복을 전하고자 한다. 작품을 감상하다보면 청곡의 예술관과 인생관을 읽을 수 있다. 청곡 김춘자 · 陋室銘 一則 · 64x70cm
자연의 부호ㆍ초서의 생명 처음 인류는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토템부호가 문자로 전환되고, 문자는 다시 서예로 탄생되었다. 한자의 탄생에는 결승설(結繩說), 팔괘설(八卦說), 서계설(書契說) 등이 있지만, 전시작품 중에는 흥미롭게 나씨족의 동파(東巴)문자도 보인다. 동파문은 그림문자에서 상형문자로 넘어가는 독특한 문자이다. 그것은 사물의 형태나 특징을 부각시켰을 뿐만 아니라, 화려한 색채를 사용한 문자이다. 이러한 문자들은 예술적으로 표현할 때, 반복되지 않는 생명의 한 획에 지나지 않는다. 문자는 자연을 모사하여 부호로써 창조한 것이고, 서예는 그 문자에 생명의 옷을 입혀 표현된 것이다. 예술은 정신의 문제를 떠나서 그 가치를 논할 수 없다. 예술은 마음의 표현이므로, 어떠한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예술가로서 대단히 중요하다. 서예를 서구회화와 비교하면, ‘생명의 추상’과 ‘기하학적 추상’, ‘물질의 생명화’와 ‘생명의 물질화’ 등으로 구별할 수 있다. 따라서 동ㆍ서양의 우주관ㆍ인생관ㆍ미학관이 서로 다르게 출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초서의 필획은 어느 서체보다도 풍부한 생명감을 잘 표현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종백화가 말한, “예술은 도(道)에 형상과 생명을 부여하였지만, 도(道)는 예술에 깊이와 영혼을 심어주었다.”는 점과 통한다. 그러므로 안목 있는 감상자들은 작품 속에서 생명의 기운을 함께 보는데, 청곡의 이번 개인전에서 잘 감상할 수 있다고 본다. 청곡 김춘자 · 杜牧 詩 2首 · 70x135cm
대자연의 역동적 생명들... 청곡의 초서는 필묵의 흔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자연의 생의(生意)를 투영해낸 것이다. 역대 명가들은 한결같이 대자연의 역동적인 생명의 모습을 스승으로 삼았다. 예를 들면, 왕희지는 물 위에서 거위가 목을 돌리고 노니는 모습을 보고 사전법(使轉法)을 깨달았고, 장욱은 공주와 짐꾼, 북소리, 공손대낭이 칼춤을 추는 것을 보고 그 정신을 얻었다고 한다. 회소는 기이한 많은 산봉우리에 여름날의 구름이 지나는 것을 보고 이를 스승으로 삼으면서, 그 통쾌함은 마치 나는 새가 숲을 벗어나고 놀란 뱀이 풀숲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고 회상하였다. 특히, 그는 여름날 구름이 바람 따라 변하는 모습에서 초서의 장법을 깨달았다고 한다. 황산곡은 노젓는 것을 관찰하면서 조화로운 리듬감을 포착하여 필법을 얻었다고 한다.
청곡 김춘자 · 漁歌子 · 35x120cm
이 밖에, 문여가는 길에서 뱀들이 싸우는 것을 보고 그 묘를 얻었고, 뇌태간(雷太简)은 강물소리를 들으며 깨달았다고 한다. 선우추(鮮于樞)는 진흙길에서 수레 끄는 모습을 보고 필법을 얻었다고 전하는데, 이러한 은유적 표현들은 모두 대자연의 생명과 서예의 관계를 묘사한 것이다. 여백 속에 전개된 묵적들은 때로는 정지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서 생동하는 의취(意趣)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옹방강은 ‘세상에는 초서가 아닌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심미적 관점은 만상의 생동적인 모습과 작가 스스로의 체득이 함께 있어야 한다. 자연만물의 형태미와 동태미의 묘태(妙態)는 초서가 아닌 것이 없으므로, 서예가들에게는 법첩이 되었고, 무언종사(無言宗師)가 되었으며, 운필의 자양분이 되었다. 청곡 김춘자 · 福 · 35x70cm
초서의 생명화 과정 청곡의 작품은 간결하면서 생동하고, 담담한 가운데 마음과 글씨, 그리고 만상이 먹빛으로 출렁인다. 먹빛은 사람의 마음을 소란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깊이와 모든 움직임을 가슴에 품은 고요함이다. 이러한 점은 청곡의 종교적 갈망이기도 하다. 청곡의 운필은 사물에 비춰진 생명을 중시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청곡은 어떻게 여백이라는 공간을 생명감으로 전환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초서이다. 청곡은 초서로써 문자의 공간적 규범을 풀어헤치고, 필획을 긋는 시간적 순서로 생명화 하였다. 초서의 생명화 과정은 필순이나 먹물을 묻히는 간격을 통해 변화를 주었고, 연속적인 움직임과 변화를 통하여 생명감을 강화시켰다. 필획들은 고요함에서 움직임으로, 단절에서 연속으로, 넓어졌다가 다시 협소해지고, 성글었다가 다시 조밀해져, 앞뒤 글자의 생명을 서로 연결시키면서 자연스럽게 표출하였다. 본래, 초서의 변천사는 예서의 특징을 지닌 장초(章草)에서, 해서에 가까운 금초(今草)로 변하였다가, 다시 앞뒤 글자들의 생명력이 서로 자유분방하게 연결되면서 광초(狂草)로 변모하였다.
청곡 김춘자 · 震默大師 頌 · 70x70cm
양(梁) 소연(蕭衍)은 『초서상(草書狀)』에서, 초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빠르기는 뱀에 놀라 길을 잃은 것 같고, 더디기는 강에서 이리저리 헤매는 것 같다. 느긋하기는 까치걸음이요, 후려치기는 꿩이 부리로 쪼는 듯하다. 점은 토끼가 뛰어오르는 것 같으면서, 홀연히 머무르다 갑자기 당기고 마음가는대로 행동한다. 굵기도 하고 가늘기도 하며, 자태는 자유롭고 움직임은 기발하다. 구름은 모였다가 비는 흩어지며 바람이 휘몰아치고 번개가 내달린다. 그 이루어짐은 거칠면서 근육이 있는 듯, 주렁주렁 매달린 포도나 칡덩굴이 얽혀진 듯, 연못의 교룡이 서로 칭칭 감은 듯, 산에 사는 곰들이 서로 다투는 듯하다. 마치 날개를 펼치면서 날지 않고, 달리려 하면서도 도리어 멈추는 듯하여, 그 형상은 구름 덮인 산속의 옥과 같고, 은하수의 무수한 별과 같다.(疾若驚蛇之失道, 遲若淥水之徘徊. 緩則鴉行, 急則鵲厲, 抽如雉啄, 點如兔擲. 乍駐乍引, 任意所爲. 或粗或細, 隨態運奇, 雲集水散, 風回電馳. 及其成也, 粗而有筋, 似蒲葡之蔓延, 女蘿之繁縈, 澤蛟之相絞, 山熊之對爭. 若舉翅而不飛, 欲走而還停, 狀雲山之有玄玉, 河漢之有列星)” 이러한 표정들은 자연 속에서 변화하는 생명을 초서의 생명감으로 비유한 것이다. 청곡의 초서 역시 공간적 특징이 약화되면서 생명의 특징이 강화되어 있다. 필획의 수평선은 때로는 안정감이 있고, 변화하는 곡선은 조화로움이 있다. 하지만 불규칙적적으로 방향이 전환되고 꺾이는 획에서는 긴장감이 감돈다. 이러한 점획들은 모두 변화하는 생명의 느낌을 준다. 청곡의 초서에서 느끼는 점은 순환왕복하면서 변화하는 생명감이다. 그 생명감은 그저 일차원적으로 쭉 뻗어나가는 시간관념보다 훨씬 자유롭다. 따라서 청곡은 생명의 시선으로 만물을 바라본 듯, 만물의 형상들을 생명의 리듬으로 표현하고 있다.
청곡 김춘자 · 飛 · 34x39cm
전시작품은 40점으로 초서가 대부분이다. 일견(一見)하면, <日光照四方>, <新年>, <同舟>와 부채에 쓴 <月色明大地>는 흥미롭게도 동파문을 생명화 하였다. <飛>는 먹빛이 맑고 담백하여 작품내용과 잘 어울려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하다. 금문의 <程顥 詩>와 갑골문의 <福>은 회화적 느낌을 주고 있지만, 회화에서 느끼지 못하는 필력이 돋보인다. <和>는 필획이 튼튼하면서도 여백과 잘 어울리고, <張維 詩>는 초서로서 유일하게 횡폭으로 완성되었다. 본래, 초서는 물 흐르듯 아래로 써내려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작품의 경우에는 횡폭으로 구성하였음에도 그 느낌이 좋다. <柳夢寅 詩>는 광초의 붓 맛을 제대로 느끼게 해준다. <古柏行>은 5폭을 연결한 대작으로, 점획들은 넓게 느껴지는 여백이지만 서로 조화롭게 출렁이고 있다. 청곡 김춘자 · 謝靈運 詩句 · 35x127cm
생명의 이상ㆍ미의 이상 서예가들은 모두 자신의 이상이 있다. 그것은 청곡작가도 예외가 아니다. 서예는 하나의 기교에 불과한 것 같지만,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풍부한 예술경계, 인생경계, 도덕경계를 투사할 수 있다. 담장 밑의 풀이나 작은 꽃 한 송이, 자연의 모든 동작들은 끝없는 생의(生意)를 포함하지 않은 것이 없다. 따라서 서예도 무한한 생의(生意), 생취(生趣)를 표현하여야 이상적인 작품이 된다. 초서의 핵심은 생명정신에서 기원한다. 초서는 모든 서체 중 가장 자유분방하면서도 생동감 있게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때로는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생명의 이상, 미의 이상과 관련하여 새롭게 사고하여야, 개성 있는 생명의 흔적이 드러날 수 있다. 청곡의 초서는 그저 아침에 피어나는 화려한 꽃이 아닌, 비바람이 몰아친 뒤의 무지개와 같은 아름다움이 있다. 결국, 예술의 경지는 담백한 작품을 요구하는데, 그것은 규범 속의 자유요, 가지런함 속의 변화이며, 법고 이후의 창신 속에서 나온다. 따라서 공자가 말한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의 경지이다. 이러한 점은 청곡작가가 지향하고자하는 서예의 묘처이다.
모든 서체 중에서, 초서는 곡선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지만, 광초는 생명정신을 가장 잘 체현할 수 있다. 초서는 점획으로 생명을 전하므로 점획은 초서의 정수가 된다. 이와 관련하여 손과정은 말하길, “해서는 점획으로 형질을 삼고 사전(使轉)으로 성정을 삼으며, 초서는 점획으로 성정을 삼고 사전(使轉)으로 형질을 삼는다.(眞以點畫爲形質 使轉爲情性, 草以點畫爲情性 使轉爲形質.)”고 하였다. 여기서 초서의 생명성은 점획이 형질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간략함을 특징으로 하는 초서는 노장미학의 근본정신인 덜어냄을 상징한 것이다. 초서는 점획의 리듬과 묵색의 변화 속에서 정감을 적화(迹化)하고 여백을 생명화 한다. 초서는 사의성(寫意性)이 활발하여 일기(一氣)로 완성될 때, 그 변화는 풍부하고 자유분방하다. 하지만, 소식은 “글씨란, 본래 아름다움에 뜻이 없어야 아름답다.(書初無意於佳乃佳耳)”고 말한다. 그것은 붓질을 제멋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미를 추구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청곡 김춘자 · 日光照四方 · 50x160cm
서예행위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수양적 의미도 있지만, 유한을 무한화 시키고자하는 이상도 있다. 서예를 즐긴다는 것은 인생의 경지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예술행위이다. 따라서 동양미학에서 예술은 도(道)와 통하기 때문에, 눈으로 봄에 도(道)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청곡의 예술정신이 여백 속에 깃들어가는 비밀이기도하다. 『논어』에서는,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글이 나온다. 이러한 즐거움은 청곡작가에게 꼭 어울리는 말이다. 필자는 서예를 즐기는 청곡의 삶을 보면서, 하나의 별이 지상에 내려와서 여백을 즐기는 행복한 서예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어찌 보면, 일엽경주(一葉輕舟)를 타고 무릉도원으로 향하는 생명의 여정일지 모른다. 개인전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경자년 가을날 자심루(自心樓)에서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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