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
서예진흥에 관한 법률 - 시행령 제정에 다른 간담회 개최
<서예진흥에 관한 법률>시행령 제정에 다른 간담회 개최 문화체육관광부 시각디자인과 주선으로 <서예진흥이 관한법률> 시행령과 시행규칙의 초안에 실릴 내용을 공유하고 서예계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한 간담회가 1월 16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근정회의실에서 열렸다.문체부에서는 김성일 정책관, 신은향 과장, 김지은 사무관 등이 참석하고, 서예계에서는 서총에서 권인호, 윤점용, 강대희, 김영기 공동대표와 이종선 총간사가, 서단관계자로 최은철(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예술감독), 이동국(예술의전당서예박물관 수석큐레이터), 강병인(강병인캘리그라피연구소 대표), 장지훈(경기대 서예학과 교수), 이종암, 이광호(신진서예가) 등 11명이 참석하였다.이날 간담회에서는 문체부가 마련한 시행령과 시행규칙 안에 대한 설명을 듣고 참석자들이 개괄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면서 법안에 대해 좀 더 밀도 있게 연구 검토해야 할 필요성을 공유하였다.앞으로 시행령은 2월중 각계의견을 수렴하여 초안을 정비하고, 3월에 공청회와 공람과정을 거쳐 4월중 법제처 심의를 받게 되며, 5월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6월 12일부터 시행하게 된다. 서총에서는 본 법안에 대한 시행령과 시행규칙에 대한 서예인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포럼을 2월 중 열 예정이다. 문체부의 시행령안은 다음과 같다. 2019.1.28글씨21 편집실
[Column]
성인근의 글씨를 읽다 - 6
변관유감(邊款有感)1.지금 예술의전당에서는 제백석(齊白石; 1864~1957)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중국에서 회화의 큰 스승이자 세계적 문화예술의 명인(名人)이라 추존해 마지않는 인물의 전시이다. 한국에서도 본토를 밟지 않고 그의 실제 작품을 접할 수 있는 더 없이 좋은 기회이다. 나는 아직 가보지 않았지만 전시가 끝날 즈음 한산할 때를 틈타 그의 작품을 조목조목 만나러 갈 작정에 들떠있다.제백석은 중국화 방면에서 이전과는 다른 뚜렷한 자기 색깔을 구현해 크게 성공한 사례로 알려졌지만 사실 그 예술세계의 본령은 서예와 전각에 있다고 나는 확신하고 있다. 특히 그의 전각에는 동양미술이 갖추어야 할 역량과 창신(創新)의 정신이 응축되어 있다. 목공 출신이었던 그에게 칼을 쓰는 전각 분야는 더욱 친숙하고 근본적인 예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제백석(齊白石), 〈안득자손보지(安得子孫寶之〉, 1933년(민국 22).나는 그의 인보를 보며 항상 눈에 거슬리는 하나의 전각을 발견하곤 한다. 그의 나이 71세 때인 1933년 작 〈안득자손보지(安得子孫寶之〉이다. 전통시대 한자문화권의 기본적인 서사형태가 오른 쪽에서 왼쪽으로 하는 세로쓰기가 상식이지만, 특이하게도 이 인장은 왼쪽에서 오른 쪽으로 거꾸로 새겨져 있다. 요즘의 전각가들도 집중하지 않으면 글자를 거꾸로 새기거나 순서를 잘못 새기기도 하지만, 이를 버젓이 작품이라 내놓지는 않는다. 그의 전각은 단순한 실수였을까, 어떤 창신의 목적이었을까. 이리저리 추측해 보았지만 답은 아주 간단했고, 그가 새긴 변관(邊款) 속에 담겨 있었다.“日來寶姬病作 吾心愁悶 行坐未安 只好刻印消愁 悞刻左旋 無意再刻也 癸酉四月初八日 時居舊京鴨子廟側 白石自記”“며칠 동안 보희(寶姬)에게 병이 났다. 나는 근심과 걱정으로 걸어 다니기도 앉아있기도 편치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인장이나 새기며 근심을 씻고자 했으나 잘못하여 왼쪽부터 새기고 말았다. 그러나 다시 새길 마음은 없다. 계유년(1933) 4월 초8일 옛 수도(成都)의 압자묘(鴨子廟) 옆에 거처할 때 백석 스스로 기록함.”제백석(齊白石)과 호보주(胡宝珠)변관에 보이는 보희(寶姬)는 제백석의 두 번째 부인 호보주(胡宝珠)의 별칭이다. 그녀는 1919년 18살의 나이에 57세의 제백석과 결혼했고, 이후 20여 년간 함께 생활했다. 결혼한 지 14년 쯤 된 어느 4월에 젊은 부인이 병을 앓아누웠고, 근심하던 제백석은 마음 둘 곳을 찾아 전각을 했던 모양인데, 정신이 황망하여 그만 글자의 순서를 거꾸로 새기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한 번 새긴 전각에 다시 손 댈 마음이 없었다. 이 전각에서 변관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나는 이 작품에 대한 무수한 추측을 지금도 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2.‘수진본(袖珍本)’이란 형태의 책이 있다. 한자 그대로 소매 안에 넣고 다닐 수 있을 만큼 작고 소중한 책이다. 한국에서는 과거를 준비하는 유생들이 사서오경 또는 시문류를, 학승들은 불경을, 그 밖의 사람들은 평소에 자주 보는 내용을 조그마한 책에 깨알 같은 글씨로 써서 소매에 넣고 다닌 데서 유래하였다. 일본에서도 이와 같은 형태의 책을 ‘마메혼(豆本)’이라 부르며,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포켓북(pocket book)과 다름이 없다. 수진본은 크기는 작지만 책이 갖추어야 할 내용과 형식을 빠뜨리지 않았고, 언제 어디서나 휴대하며 편리하게 읽을 수 있다는 지혜가 담겨진 발명품이다.중국의 화가이자 학자인 매묵생(梅墨生, 1960~ )은 전각(篆刻)에서 변관(邊款)의 가치를 ‘수진비각(袖珍碑刻)’이라 명명한 적이 있다. 작은 형태이지만 책이 갖추어야 할 내용을 온전히 담아내고 있는 수진본처럼, 전각에서 변관의 가치는 서예와 금석학이 담아야 할 내용과 형식의 함량을 모두 충족하고 있다는 견해로, 나는 이를 적절한 비유이자 탁견이라 생각한다.변관은 흔히 인장의 측면에 새긴다는 점에 착안하여 측관(側款), 혹은 인관(印款)이라고도 하며, 새겨진 내용을 중시하여 변발(邊跋), 인발(印跋)이라고도 부른다. 여기에 담기는 내용은 제작자의 이름이나 아호로부터, 제작의 시간과 장소, 혹은 작가의 심경 등을 담기도 한다. 어떤 경우는 제작과 관련한 소소한 이야기나 전각에 대한 비평, 시문 등을 새기기도 한다.중국 전각사에서 변관의 형식은 이미 한대(漢代)로부터 시작했다. 진개기(陳介祺)의 『십종산방인거(十鐘山房印擧)』에는 〈사마□사인리(司馬□私印利)〉라는 한나라의 인장이 보이는데, 이 인장의 네 측면에는 ‘동심(同心)’ ‘일의(一意)’ ‘장생(長生)’ ‘대부(大富)’ 등의 글자가 남아 있다. 인간의 바람을 나타낸 간략한 문구이지만 어떤 장르의 기원은 이처럼 작은 곳으로부터 출발한다. 조지겸(趙之謙), 〈찬경양년(湌經養年)〉, 1864년.36세의 조지겸은 죽은 처와 딸을 위해 전각의 형식을 빌어 조상과 조상기를 제작했다.중국 전각사에서 변관예술이 꽃을 피운 시기는 청대(淸代) 중․후기로, 등석여(鄧石如), 오양지(吳讓之), 조지겸(趙之謙), 오창석(吳昌碩) 등의 출현으로부터다. 이들의 등장은 전각예술에서 개인적 취향의 독자적인 문호를 열었다는 의미가 있지만, 변관에 있어서 다양한 시도와 성과의 측면에서도 바라보아야 한다. 자체(字體)에서도 오체(五體)를 다양하게 구사하였고, 특히 조지겸의 경우는 자신의 전공인 위비(魏碑)의 해서를 변관에 차용하기도 했다. 또한 글씨는 물론 한나라의 화상석, 불상 등의 고전적 미술자료를 변관에 응용하는 등 다양한 시도가 이어졌다. 또한 그 내용에 있어서도 인장에 대한 간략한 정보 외에 여러 시문(詩文) 등 문학의 장르와 접합하기도 했다. 전각예술에 있어 변관의 역할은 중국전각사를 더욱 풍부하게 만든 하나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음은 틀림없다. 성인근 ․ 본지 편집주간
[News]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국새가 46만에 한국으로 돌아온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임정의 국새가 한국으로 돌아온다. 임정 임시의정원 의장 및 국무령을 지낸 만오 홍진 선생의 손자며느리인 신창휴씨는 최근 동아일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홍진 선생의 동상이 국회에 건립되는 날 남편이 보관해 온 임시의정원 관인을 국회에 기증할 것”이라고 밝혔다.大韓民國 三年(1921년) 一月 一日 임시정부급 임시의정원 신년축하식 기념촬영 / 이미지 출처-네이버이미지 검색이 관인은 오늘날 국회 격인 임시의정원의 각종 공문서에 찍었던 도장으로 임정 임시헌법 조항으로 볼 때 임정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국새 가운데 하나에 해당한다. 손자 며느리인 신씨가 동아일보에 공개한 이 관인은 검은색 목제도장으로 ‘臨時議政院印(임시의정원인)’이라고 새겨졌다. 손자 홍석주씨는 “할아버지(홍진)가 1945년 충칭에서 갖고 돌아왔다. 1919년부터 의정원 인장으로 쓰인 임시의정원인”이라고 설명한 문서를 남겼다. 그는 각고의 노력 끝에 이 관인을 온전히 간직해 왔으며, 1973년 미국 이민 뒤에도 조부의 업적이 제대로 평가받길 바라며 여러 차례 관인을 한국에 기증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2016년 87세로 눈을 감았다. 1919년부터 쓰인 \'임시의정원印\' / 이미지 출처-동아일보아내인 신씨에 따르면 남편 홍씨는 이 도장을 목숨처럼 지켰다. 6.25전쟁, 일본유학(교환교수), 미국 이민 등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남편이 6.25정쟁 피란 당시 도장주머니를 베개에 돌돌 말아 넣고 잠을 잘 때도 그 베개만 썼다. 가족들에게도 도장이 어디에 있는지 알리지 않았다.”고 전했다. 홍석주씨가 가족에게 남긴 도장과 문서 원본에는 “영구 가보로 보관할 것, 햇볕과 습기에 쬐이지 말 것”이란 당부사항과 설명이 빼곡했다. ‘임시의정원인(臨時議政院印)’이라고 새겨진 가로 5cm, 높이 6cm의 검은색 목재 도장에는 ‘1919년부터의 의정원 인장’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홍씨는 이 문서에 “임시의정원인은 1919년 4월 임시의정원 수립 때부터 유일한 도장으로 임시정부 및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상징한다”며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적었다. 만오 홍진 선생의 손자며느리 신창휴씨18일 미국 동무 모처에서 동아일보와 채널A에 단독 공개한 임시정부 의정원 관인 등 도장 4개를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 사진 출처-동아일보‘홍진(洪震)’이라고 새겨진 옥돌로 만든 작은 도장에는 ‘관용’ 및 ‘공문서’에 쓰였다는 말도 있었다. 이 외 만오 선생이 1919년 4월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 법관과 변호사로 일하며 썼던 그의 본명 홍면희(洪冕熹)가 새겨진 도장, 또 다른 호 ‘만호(晩湖)’가 새겨진 도장도 1점씩 있다. 임시정부 연구의 권위자인 한시준 단국대 교수는 “임정에서 행정부 수반(국무령)과 입법부 수반(임시의정원 의장)을 모두 지낸 분은 홍진 선생이 유일하다”며 “가장 오랜 기간 의장으로 활동하며 의회정치의 기틀을 닦은 분”이라고 설명했다. 1943년 중국 충칭에서 열린 재중자유한인대회에서 총주석 자격으로 연설하는 만오 홍진 선생의 모습. 한시준 단국대 교수 제공 / 사진 출처 - 동아일보1877년 명문가 후예로 태어난 홍진 선생은 1904년 법관양성소를 졸업하고 평양에서 변호사로 일했다. 1919년 3·1운동 직후 동지들을 규합해 인천에서 13도 대표자 대회를 개최하고 한성정부를 조직한 뒤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해 9월 한성정부를 법통으로 통합 임시정부가 출범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1921년 5월에는 이동녕 손정도에 이어 임시의정원의 3대 의장으로 선출됐고 이어 1939, 1942년에도 의장에 선출됐다. 한 교수는 저서에서 “홍진 선생이 이념과 당파를 초월한 인물이었기에 좌우익 세력이 참여한 통일의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34회임시의정 /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이미지검색만오 홍진 선생은 임시의정원의 마지막 의장이었고 임정 환국 뒤 의정원을 계승한 비상국민회의 의장으로도 선출됐다. 홍진 선생의 후손이 의정원 관인을 보관하게 된 데에는 이 같은 사연이 있다. 홍진 선생이 1945년 12월 1일 환국하면서 가져온 의정원 문서는 손자 홍석주 씨가 보관하다가 국회에 기증해 1974년 국회도서관이 발간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최초로 규정된 ‘대한민국 임시약헌’(헌법) 개정안 초안(원본)과 건국강령, 광복군 작전보고 등 귀중한 자료들이었다. 임시정부 문서는 이들 자료 말고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의정원 문서를 온전하게 보존해 후대에 남긴 것 역시 홍진 선생의 큰 공헌으로 평가된다. 홍진 선생은 1946년 9월 9일 병환으로 숨을 거뒀고 장례식은 9월 13일 김구 선생, 이승만 박사를 비롯해 각계 인사가 운집한 가운데 성대하게 거행됐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서 1923년에 사용한 태극기/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이미지 검색홍석주씨가 가보로 지켜오던 이 관인은 중국 상하이에서 첫 임시의정원 회의가 열린 지 100주년이 되는 올 4월 10일에 맞춰 기증될 것으로 전망된다. 문희상 국회의장실은 “임정 100주년을 맞는 올해 국회도서관에 임시의정원의 마지막 의장을 지낸 홍진 선생의 흉상을 건립한다”며 “상징적 의미가 큰 4월 10일 전 관인이 고국에 돌아올 수 있도록 흉상 건립을 서두르고 있다”고 밝혔다.2019. 1. 21글씨21 편집실
[좌담회]
취중진담 I
한국 서예의 지금 바로 여기!‘글씨21’에서는 한국 서예계의 현실을 직시하고 직언하는 ‘썰전’의 창구를 마련하였다. 서단의 각계각층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마음의 벽을 허물고 진솔한 서예인의 삶 이야기를 풀어낸다. ‘취중불어진군자(醉中不語眞君子)’라 했거늘, 음주 가운데 허튼 소리나 희언(戲言)을 삼가야 마땅하나, 때로는 취중에 속마음을 나누는 것이 오히려 진정성 있는 대화의 장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이런 차원에서 중진부터 청년에 이르기까지 각 연령대별로 서단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이 평소 경험하고 느껴왔던 생각을 술잔에 담아 ‘취중진담(醉中眞談)’의 포문을 열었다. 더위가 시작할 무렵, 홍대 앞 고깃집에서 ‘한국 서예의 지금 바로 여기!’를 주제로 20대~50대 작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주력은 필력이다’는 미명하에 그간 술자리에서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만 그쳤던 서단의 현실문제에 대한 담론과 진취적이고 발전적인 견해가 공론화되었다. 이런 자리를 통해 서예계의 자유로운 토론 문화가 조성되고, 현실적인 제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지혜를 모으고 공감대를 조성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이를 계기로 우리 서예인들이 보다 열린 마음으로 세대 간, 지역 간, 소속 간 벽을 허물고 상호 이해와 소통으로 한국 서단의 변화와 발전을 도모해가길 바란다.사회자 장지훈(글씨21 편집위원, 경기대 교수) \"취중진담\" 패널 연령대순류예나(대전대 서예디자인학과 조교)이광호(회천서예학원 원장)오민준(한국캘리그라피디자인협회 상임이사)전상모(경기대 초빙교수) 게스트이상현(소울샵엔터테인먼트 소속 아티스트)
[News]
덕온공주가 손수 쓴 「자경전기」, 「규훈」 등 총 68점 환수
덕온공주 집안의 한글자료, 고국의 품으로 돌아오다문화재청(청장 정재숙)은 조선의 마지막 공주인 덕온공주가 한글로 쓴 「자경전기(慈慶殿記)」와 「규훈(閨訓)」을 비롯한 <덕온공주 집안의 한글자료>를 지난해 11월 미국에서 매입해 국내로 들여왔다.<덕온공주 집안의 한글자료>는 윤씨 집안으로 하가(下嫁, 공주가 시집을 감)한 조선 23대 임금 순조의 셋째 딸인 덕온공주(德溫公主, 1822-1844)와 양자 윤용구(尹用求, 1853-1939), 손녀 윤백영(尹伯榮, 1888-1986) 등 왕실 후손이 3대에 걸쳐 작성한 한글 책과 편지, 서예작품 등 총 68점이다.자경전기(慈慶殿記)* 자경전기(慈慶殿記): 1808년 순조가 정조비 효의왕후의 명에 따라 창경궁 자경전에 대해 쓴 책<덕온공주 집안의 한글자료>의 귀환은 국내기관 간 협력을 통한 문화재 환수의 모범 사례로,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사장 지건길)과 국립한글박물관이 각자의 전문성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이루어낸 성과다. 국립한글박물관은 유물에 대한 정보를 발견·수집하여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제공하였고,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소장자와 접촉과 매입 협상을 통해 유물을 국내로 들여오는 데 성공했다.여사초략(女史抄略)이번에 환수된 자료들은 조선왕실의 한글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이중에서도 덕온공주가 아름다운 한글 궁체로 손수 쓴 「자경전기(慈慶殿記)」와 「규훈(閨訓)」이 주목을 끈다. 두 책은 모두 본래 한문으로 쓰여 있던 것을 덕온공주가 한글로 번역해 작성한 자료로, 덕온공주가 쓴 것으로는 이번에 처음 발견되어 희소가치가 높다. 규훈(閨訓)* 규훈(閨訓): 여성들이 지켜야 할 덕목과 예절에 관한 책또한, 이번에 환수된 자료에는 왕실에서 작성한 한글 편지와 왕실 여성들을 위한 한글 역사서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신정왕후(순조의 세자인 익종의 비이자 헌종의 어머니) 편지*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선 제23대 순조의 세자인 익종(翼宗)의 비이자, 제24대 헌종의 어머니한글 편지들은 덕온공주의 어머니 순원왕후가 사위 윤의선(1823~1887)에게 딸의 근황을 묻는 편지를 비롯하여, 신정왕후(추존왕 익종 비), 명헌왕후(헌종 계비), 철인왕후(철종 비), 명성황후(고종 비) 등이 직접 쓰거나 상궁이 대필해서 덕온공주 집안에 보낸 것들이다. 이 중에는 조선 최고의 한글 명필로 알려진 궁중여성 서기 이씨(書記 李氏)가 대필한 편지도 있어 사료적 중요성이 크다.순원왕후(덕온공주의 어머니) 편지한글 역사서에는 「정사기람(正史紀覽)」과 「여사초략(女史抄略)」 등이 있는데, 「정사기람」은 덕온공주의 아들 윤용구가 고종의 명을 받아 왕실 여성들을 위해 쓴 역사책이며, 「여사초략」은 윤용구가 당시 12살이던 딸 윤백영을 위해 여성과 관련된 역사를 발췌해서 작성한 책이다. 정사기람(正史紀覽)이외에도 덕온공주의 손녀인 윤백영의 서예작품이 눈에 띄는데, 윤백영은 일제강점기에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한글 궁체로 쓴 서예작품으로는 처음으로 입선하였으며, 전통적인 한글 궁체를 현대적인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킨 인물이다. 환소군전(桓少君傳이번에 환수된 68점의 한글 자료는 조선 왕실 여성들의 생활 속에서 한글이 의사소통 수단으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줄 뿐만 아니라 왕실에서 사용하였던 아름다운 한글 궁체의 면모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역사적·예술적·학술적 가치가 높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을 지낸 국어학자 이종덕 박사는 <덕온공주 집안의 한글 자료>는 기존에 소개된 단편적인 왕실 편지나 소설과는 차원이 다른 자료로서, 왕실 부마 집안의 일괄 자료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며 왕실인물의 개인적인 삶을 엿볼 수 있어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고 환수의 의의를 밝혔다. 문화재청은 <덕온공주 집안의 한글 자료>를 국립한글박물관에 이관하여 더욱 전문적으로 연구, 활용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보도자료 및 사진 출처 : 문화재청2019.01.16글씨21 편집실
[News]
여태명 교수, 페이스북·위챗에서 연말개인경매 개최
한국 서화작품의 시장이 침체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전업서화가들의 생계는 늘 위태로운 상태에 놓여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개인 sns를 통한 개인경매가 개최되어 화재를 모은다. 원광대 여태명 교수는 4년 전부터 매년 연말이 되면, 페이스북과 위챗(중국sns)을 통해 인터넷 경매를 열어왔다. 여태명 교수는 ‘페이스북(위챗) 친구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담아 작품경매를 시작 합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작품, 작품크기와 재료 등을 올려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여 경매시작을 알렸다. 여태명 作 - 늘 푸른 솔처럼 바위처럼 태양처럼47x42 (페이스북) 1,550,000원 낙찰이번 페이스북 개인경매에 출품된 ‘늘 푸른 솔처럼 바위처럼 태양처럼’ 작품은 2,019원에서 시작된 경매가에서 1,550,000원으로 낙찰되었고, 위쳇에 출품된 작품은 2,019원에서 시작되어 2,019,000원에 낙찰되었다. 여태명 作 - 梅經寒若發淸香66x33 (위쳇) 2,019,000원 낙찰여태명 교수여태명 교수는 원광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중국노신미술대학 객좌교수이며, 지난 2018남북정상회담 표지석의 작가로도 또 한 차례 이슈가 된 바 있다. 한국 서화시장의 침체 속에 ‘온라인 개인경매’는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내는 돌파구이다. 여태명 교수의 개인경매를 시작으로, 한국 서화시장이 더욱 발전하길 기대한다. 2019. 1. 2글씨21 편집실
[News]
‘서예진흥에 관한 법률’ 입법 축하연 개최
‘서예진흥에 관한 법률’ 입법 축하연이 지난 14일 서울 영등포구 공군회관에서 열렸다. 서예인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서예진흥법이 지난 11월 23일 제364회 정기국회 제12차 본회의에서 통과되었으며, 12월 11일 제정되었고, 내년 6월부터 시행된다.이 날 축하연에는 입법추진위원회 이종선 책임간사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축하연은 입법경과보고를 시작으로 이번 서예진흥법 입법에 크게 힘써준 유성엽 민주평화당 의원과 이동섭 바른미래당 의원에게 감사패를 수여했다. 수여에는 한국서예단체총협의회 공동대표인 윤점용, 강대희 대표가 수고해주었다.(좌) 윤점용 서총 공동대표와 (우) 유성엽 민주평화당 의원(좌) 강대희 서총 공동대표와 (우) 이동섭 바른미래당 의원이어서 서총 김영기 공동대표의 인사말이 있었다. 김영기 공동대표는 “한국서예를 중흥시키기위해 ‘서예진흥법’이 꼭 필요하다는 인식아래 전국의 서예인들이 뭉쳤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갈망하던 서예진흥법이 드디어 만들어졌습니다. 아마로 2019년 새해는 우리 서단에 중요한 해가 될 것 같습니다.”라며 한국서예의 도약을 기약했다.김영기 서총 공동대표 서예진흥법입법추진위원회 권창륜 위원장권창륜 서예진흥법 입법추진위원장은 “우리 서단은 오랫동안 분열을 겪으면서 침체의 늪에서 헤매고 있었습니다. 이런 중 서예단체들이 연합하여 ‘서총’을 결성한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어려운 여건에서도 잘 이끌어온 공동대표님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실무를 맡아 수고한 이종선 총간사에게도 따뜻한 격려를 보냅니다.”라고 했다.문화체육관광부 도종환 장관한국서예진흥재단 홍석현 이사장단체기념사진이어 도종환 문화제육관광부 장관, 유성엽 민주평화당 의원, 이동섭 바른미래당 의원, 홍석현 서예진흥재단 이사장의 축하인사말이 있었다. 끝으로 참석한 모든 서예인들과 정재계. 문화예술계인들이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하였다.2018. 12. 17취재 김지수 기자
[News]
2018년 한국서예학회 추계학술대회 및 정기총회 성황리 개최
2018년 한국서예학회 추계학술대회 및정기총회 성황리 개최- 안평대군 탄생600주년 기념 “안평대군 이용의 삶과 예술” -2018년 한국서예학회(회장 김응학)의 추계학술대회 및 정기총회가 12월 8일(토) 오후 2시부터 성균관대학교 퇴계인문관에서 개최되었다. 전국 각지의 서예학자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안평대군(1418-1453)의 탄생 600주년을 기념하여 ‘안평대군 이용의 삶과 예술’을 주제로 진행되었다. 안평대군은 세종대왕의 셋째아들로 조선전기 문화예술방면에서 독보적인 성취를 이루어냈으며, 그의 필적은 원나라 서예대가인 조맹부(趙孟頫)의 송설체(松雪體)와 우열을 다툴 정도로 뛰어나다고 평가되고 있다. 한상일(성균관대) 박사의 사회로 진행된 학술대회에서는 기조강연으로 안휘준(서울대) 교수가 ‘안평대군 - 그의 인물됨과 문화적 기여’라는 주제를 통해 안평대군의 인간상과 문화예술의 업적을 총체적으로 조명하였다. 이어 이기범(경기대) 교수가 ‘당대 사대부들의 시문에 나타난 안평대군의 예술세계’에 대하여, 박병천(경인교대) 교수가 ‘훈민정음과 안평대군 한자서체와의 관계성 고찰’을, 이완우(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가 ‘안평대군의 글씨’에 관하여 심도있게 발표하였다. 종합토론에서는 김광욱(계명대) 교수의 좌장으로 청중들과 패널들의 상호 질의와 토론이 이어졌다. 정기총회에서는 제10대 한국서예학회 회장단의 2년간 사업실적 및 결산보고를 시작으로 신임회장 및 감사 선출이 이어졌다. 결과 제11대 회장에 김광욱(계명대) 교수가 선임되었으며, 감사에 한상일(성균관대)․이정자(동방문화대학원대) 박사가 피선되었다. 신임회장인 김 교수는 한국서예학회의 창립 멤버로 한문학과 서예를 전공했고, 1996년부터 계명대학교 미술대학에 재직했으며,『한국서예학사』 외 다수의 저서와 논문이 있다. 김 교수는 “전임 회장들이 쌓아 놓은 업적을 바탕으로 한국서예학회가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 하겠다.”는 소회와 아울러 “소장학자들의 참여를 유도하여 학문후속세대의 양성을 적극 지원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신임회장 김광욱 교수이번 학술대회는 조선전기의 문화예술방면에서 독보적인 성취를 이루어 낸 안평대군의 삶과 예술에 대하여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한국서예학회는 1998년에 창립되어 현재 500여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는 우리나라 최고의 서예학술단체로, 매년 6월․12월에 정기 학술세미나를 개최하며 『서예학연구』 (한국연구재단 등재지)를 연간 2회 발간하고 있다. 신임 학회장의 임기는 2019년 1월부터 2년간이다. ※ 학회 회원가입 안내 : https://k-seoye.jams.or.kr/2018.12.14글씨21 편집실
[Interview]
원로에게 길을 묻다 - 초정 권 창 륜
권창륜(1943생) 호(號)는 초정(艸丁), 단샘 등이며 경북 예천에서 권동진 어른과 윤수향 여사의 4녀 1남 중 네번째로 태어났다.서예를 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이름을 들어보지 않은 이가 없을 것이다. 현대 서예계의 거장이셨던 일중 김충현, 여초 김응현 두 스승에게 사사 받았고 그들의 수많은 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돋보였던 실력과 이론을 겸비한 인물이다.세한송백 歲寒松柏 34x47cm서예의 각 서체를 두루 섭렵하고 사군자, 전각, 문인화 등 다양한 서예의 분야를 개척했다. 또한 중국이나 일본 등에서도 인정되는 우리 서단의 대표적 서예가임은 틀림이 없다.실사구시 實事求是 163x35cm초정 권창륜과 여초 김응현일중 김충현 사시규흥 四時佳興 40x31cm1968년(28세) 제17회 국전에서 특선하면서 청년서예가로서 존재감을 알리게 되었다. 나아가 1977년(37세) 26회 봄 국전에서 석문명 필의로 창작한 작품이 대통령상 없는 최고상인 총리상을 수상하면서 서예, 문화계에 집중적인 조명을 받게 된다. 인터뷰 장면무학희해 舞鶴戱海 137x35cm황룡가화 黃龍嘉禾 70x65cm1977년 4월, 조선일보 - 제26회 봄 국전 국무총리상지금 그 작품을 봐도 37세 때의 작품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의 필력과 작품 구성이 뛰어남을 알 수 있다. 현재를 사는 젊은 청년 서예가들 뿐 아니라 서예인 모두에게 큰 자극이 될 만하다. 추수위신 秋水爲神 185x35cm한때 대한민국 서단에 파란을 일으켰던 촉망받던 청년작가가 세월이 흘러 어느덧 원로라는 이름으로 후학들에게 권창륜의 서예 이야기를 전해 주고자 한다.현재 70대 중반의 노령임에도 올곧은 몸과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선생께 살아온 세월과 서예, 후배들에게 들려주고픈 이야기들을 들어보았다. 그의 묵직한 글씨처럼 응축된 50년 서예인생의 역정 속으로 들어가 보자.인터뷰 성인근(편집주간)
[Column]
성인근의 글씨를 읽다-5
아름답다는 것의 발견 영화이야기로부터 시작해 보자. 이창동 감독이 각본을 쓰고 연출한 《시》라는 작품이다. 2010년 5월에 개봉한 이 보석 같은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다. 이창동 감독, 《시》 포스터, 2010년영화에서 종욱이 할머니(윤정희)는 동네 문화원에서 우연히 \'시\' 강좌를 수강하며 난생 처음 시와 마주하게 된다. 문화원에서 시를 가르치는 강사는 김용택 시인으로 ‘김용탁’이라는 이름으로 영화에 등장한다. 그는 동네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첫 강좌에서 ‘본다’라는 주제를 말하며 주머니 속에서 사과 하나를 쓱 꺼내며 말한다. 강의하러 오면서 사과를 준비할 정도로 준비성이 많은 강사가 어디 있겠냐며 너스레를 떨면서. “여러분은 지금까지 사과를 몇 번이나 봤어요?천 번? 만 번? 십만 번? 아니요, 여러분은 지금까지 사과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사과를 알고 싶어서, 관심을 갖고, 이해하고 싶어서, 대화하고 싶어서 본 적이 없어요. 무엇이든 진짜로 보게 되면 뭔가 느껴지는 게 있어요. 샘에 물이 고이듯이, 종이와 연필을 들고 그 순간을 기다리는 거예요. 흰 종이의 여백, 순수한 가능성의 세계, 창조 이전의 세계, 시인에게는 그 순간이 좋아요.” 문화원의 두 번째 강좌에서 종욱이 할머니와 김용탁 시인 사이에는 또 이런 문답이 오간다. 《시》 스틸컷-1“시를 쓴다는 것은 아름다움을 찾는 일이예요.” “선생님, 시상(詩想)은 언제 찾아와요?” “시상이 언제 찾아 오냐구요?”“네, 아무리 시상을 얻으려고 해도 도무지 오지 않아요.” “시상은 찾아오지 않아요. 내가 찾아가서 빌어야 해요. 그래도 줄똥 말똥 해요. 그게 얼마나 귀한 건데 함부로 주겠어요? 그러니까 내가 찾아가서 사정을 해야 돼요.” “어디로 찾아가요?”“그거... 그거는... 어디를 정해놓고 찾는 게 아니고, 그냥 찾는 거예요, 돌아다니면서. 시상이 ‘나 여기 있소’라고 문패 걸어놓고 기다리고 있겠어요? 분명한 건 내 주변에 있다는 거예요. 멀리 있지 않고. 지금 내가 있는 자리, 거기서 얻는 거예요. 설거지통 속에도 시가 있어요.” 서예를 한다는 일도 시상을 찾는 일처럼 ‘아름다움에 대한 찾아 헤맴’의 시간이 필요하다. 문학을 포함한 모든 예술에서 작가는 항상 ‘무엇을’ ‘어떻게’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여기서 ‘무엇을’이 표현의 대상이나 목적이라면 ‘어떻게’는 그 방법에 해당한다. 무엇보다 창작에 있어 첫 번째 직면과제는 바로 ‘무엇을’이며 시로 말하면 시상에 해당한다. 서예가들도 창작의 목적과 방법을 수천 년 고민해 왔다. 하나의 사례로, 지금부터 1,300년도 더 이전 사람인 손과정(孫過庭)은 붓을 들기 전 선결과제로 다섯 가지 조건을 들었다. 1. 마음이 편안하고 세태에 간여하는 바가 없을 때. 2. 지기(知己)로부터 은혜를 입어 감사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 때. 3. 날씨가 청명하고 기후가 더 없이 편안할 때. 4. 양질의 지필묵이 있어 나의 흥취를 유발할 때. 5. 홀연히 영감이 동할 때. 손과정(孫過庭, 646~691), 『서보(書譜)』 상권. 중요한 고전일수록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맨 뒤에 있는 경우가 많다. 다섯 가지 조건 가운데 앞의 네 가지는 일상에서 어쩌면 흔히 만날 수 있지만, ‘홀연히 영감이 동할 때’는 매우 관념적이지 않은가. 여기서 ‘영감이 동할 때’는 시로 말하자면 ‘시상이 올 때’와 흡사한 지점일 것이다. 그러면 종욱이 할머니의 질문처럼 그 영감이나 시상은 언제 찾아오는가? 해답은 역시 ‘본다’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김용택 시인은 ‘본다’라는 시각만을 대표적으로 언급했지만 어떤 대상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져보면서 느끼는 과정에서 이전과는 다른 세계를 만나는 체험, 그 지점에서 영감과 시상은 다가오는 것이리라. 《시》 스틸컷-2 “샘에 물이 고이듯이, 종이와 연필을 들고 그 순간을 기다리는 거예요. 흰 종이의 여백, 순수한 가능성의 세계, 창조 이전의 세계, 시인에게는 그 순간이 좋아요.” 성인근 ․ 본지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