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대륙을 이끈 서법가들引领大陆的书法家们| 3편 증래덕(曾來德) | 중국의 서법계가 뜨겁다. 국가 차원에서 서법에 대한 전폭적인 장려정책이 진행 중이고, 서법가들 또한 수준 높은 작품으로 서단을 꾸려 가고 있다. 중국의 서법은 문화혁명의 질곡을 딛고 현재 최고의 존중을 받고 있는 분야로 거듭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의 이면에는 중국의 전통문화인 ‘서법’을 자신들만의 고유 언어이자 신선한 예술로 일궈낸 일군의 작가들의 영향이 크다. 《대륙을 이끈 서법가들》은 그들이 일궈낸 현대서법계의 역정과 진화의 모습을 작가들의 육성을 통해 들어보고, 우리 서예계에 반추해 보기 위한 기획이다. 각 성(省)과 도시별로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는 중국의 서법계를 차근차근 짚어보는 시간을 갖기로 하고, 우선 중국의 수도이자 전통 서법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베이징에서 뚜렷한 자기 색깔을 가진 네 분의 중견작가들을 만나 그들이 걸어온 길과 예술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려 한다. 그 세 번째 순서로 증래덕 선생을 만나보았다. 인터뷰는 성인근 본지 편집주간이 진행하였고, 통역은 안재성 박사(서법학)가 맡아주었다. 2018. 12. 28글씨21 편집실 江山天地五言聯 紙本...>>인터뷰 전문 보기(클릭)<<
중국 보리추 경매, 제백석 산수 12폭 병풍 최고가 갱신
지난 17일 북경의 보리추(保利秋) 경매에서 중국의 국민화가 제백석의 산수 12폭 병풍 (山水十二屛) 이 중국 위안화 9,313억 원 (한국 돈 1533억 원)에 낙찰되었다. 제백석(齊白石)의 작품 중 가장 비싼 가격으로 역사적인 기록을 남겼다. 제백석 作 - 산수12폭병제백석 作 - 산수12폭병 중 여덟폭더불어 제백석의 산수 12폭 작품은 지금까지 유통된 중국의 예술품 중에서 가장 비싼 예술품으로 기록하게 되었다. 작품은 위안화 4,5억 원으로 경매 시작하여 57라운드의 치열한 경쟁 속에 최종 8,5억에 낙찰되었고 세금포함 9,315억으로 매각되었다. 산수12폭(山水十二屛)작품은 1925년에 제작된 그림이다. 제백석이 북평지역의 유명한 의사 진자림(陣子林)에게 선물했던 것인데, 반세기 동안 제백석의 여제자 (곽수의)郭秀儀가 수장하였던 것으로 전시는 무려 20여 회에 걸쳐 이루어졌다. 12폭 산수도는 시,서,화,인 모두 깨끗하게 표현되어 있고 표구가 같으며 작품마다 제백석의 자작시가 낙필 되어있다. 현재 확인되는 제백석의 12폭 병풍 산수는 두 점이 있는데 이번에 출품된 작품과 다른 하나는 1932년에 四川의 군인 왕찬서(王纘緖)를 위해 그린 것으로 현재 중경 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다. 조맹부 作 - 반야심경또한 조맹부의 반야심경은 경매 시작가 1,2억에서부터 진행되었는데 최종 낙찰가 1,666억 원에 낙찰되었다. 세금을 모두 합쳐 1,909억 원(한국 돈 310억 원)에 매각된 것으로 전했다. 조맹부의 작품 중 박물관이 아닌 민간인이 유일하게 유통한 작품이다. 본 작품은 황제의 수장인을 비롯하여 고관대작들의 감상印 25개가 찍혀있다. 올해 9월 북경고궁박물관에서 조맹부의 대규모 전시회가 열린 바가 있어서 낙찰가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2017. 12. 20글씨21 편집실
여태명 교수, 페이스북·위챗에서 연말개인경매 개최
한국 서화작품의 시장이 침체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전업서화가들의 생계는 늘 위태로운 상태에 놓여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개인 sns를 통한 개인경매가 개최되어 화재를 모은다. 원광대 여태명 교수는 4년 전부터 매년 연말이 되면, 페이스북과 위챗(중국sns)을 통해 인터넷 경매를 열어왔다. 여태명 교수는 ‘페이스북(위챗) 친구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담아 작품경매를 시작 합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작품, 작품크기와 재료 등을 올려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여 경매시작을 알렸다. 여태명 作 - 늘 푸른 솔처럼 바위처럼 태양처럼47x42 (페이스북) 1,550,000원 낙찰이번 페이스북 개인경매에 출품된 ‘늘 푸른 솔처럼 바위처럼 태양처럼’ 작품은 2,019원에서 시작된 경매가에서 1,550,000원으로 낙찰되었고, 위쳇에 출품된 작품은 2,019원에서 시작되어 2,019,000원에 낙찰되었다. 여태명 作 - 梅經寒若發淸香66x33 (위쳇) 2,019,000원 낙찰여태명 교수여태명 교수는 원광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중국노신미술대학 객좌교수이며, 지난 2018남북정상회담 표지석의 작가로도 또 한 차례 이슈가 된 바 있다. 한국 서화시장의 침체 속에 ‘온라인 개인경매’는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내는 돌파구이다. 여태명 교수의 개인경매를 시작으로, 한국 서화시장이 더욱 발전하길 기대한다. 2019. 1. 2글씨21 편집실
중국 근서화의 대가 양옥빙 작가展 개최
월정사성보박물관 특별기획전‘중국 근서화의 대가 양옥빙 작가전’월정사성보박물관(관장: 정념스님)에서 특별기획전 중국 근서화의 대가 양옥빙(楊玉氷)작가 전시회가 지난 12월 21개막하였다. ▲ 전시장 전경 *사진출처 월정사성보박물관 근서화(根書畵)란 뿌리의 모양을 그대로 살려서 한자(漢子)를 나타낸 글씨나 그린 뿌리그림을 말한다. 근서화는 한자모양과 유사한 진달래 뿌리를 찾아내어 글씨나 그림을 만드는 공예인데, 뿌리에는 전혀 가공을 하거나 힘을 가하지 않으며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조합하여 글씨나 그림을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사진출처 월정사성보박물관 이번 전시회의 작가인 중국의 양옥빙(65)선생은 사천성 명장으로 대자연의 기묘함을 예술로 승화시켜 중국의 전통 근예기법(根藝技法)에 서예를 접목시켜 ‘근서(根書)’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인물이다.*사진출처 월정사성보박물관양옥빙 선생은 선비집안에서 자라 어릴때부터 서예를 즐겼는데 처음에는 복(福)을 부르는 다양한 상징을 뿌리로 나타내다가 점차 사람들이 좋아하는 녹(祿, 행복), 수(壽, 장수), 불(佛, 부처) 등 글씨나 문구를 표현하기 시작하면서 자연 그대로의 뿌리로 글씨를 쓰는 근서법을 창안하여 뿌리예술인 근예계의 양씨근서분파(楊氏根書分派)를 형성했다. 전시는 2019년 2월 28일까지 개최한다.<전시정보>월정사성보박물관 특별기획전 ‘중국 근서화의 대가 양옥빙 작가전’기 간 : 2018. 12.21(금) ~ 2019. 2. 28(목)장 소 : 월정사성보박물관 기획전시실주 최 : 탄허기념박물관2019.01.03글씨21 편집실
2018년 부천예술상 수상, 청운 김영배 작가
사단법인 한국예총 부천지회(회장 김정환)가 주최한 “부천예술인 송년 예술제”가 지난 12월 18일 세이브존 라비에벨에서 개최했다. 이번 송년 예술제에서는 부천지역예술과 창작활동에 공로가 지대한 예술인들을 발굴하여, 부천예술상과 공로상을 수상케했다. 이는 예술인의 사기진작과 창작의욕을 고취시키고 좋은 예술 환경을 만들어가기 위하여 마련되었으며, 국악·무용·문학·미술·사진·연극·연예·음악 등 8개 분야에 대해 부천예술상과 공로상이 수상되었다. 부천예술상 미술부문의 수상자로는 청운 김영배 작가가 선정되었다. 2018. 1. 9글씨21 편집실
기획좌담회
한·중 서예시장 분석과 대안 모색얼마 전 국회에서 서예진흥법이 통과되어 그동안 암울했던 한국서예가 다시금 솟아날 수 있는 전기(轉機)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러한 때에 국제서예가협회 중국 주석인 유정성 선생께서 한국작가들의 중국서예시장 진출에 대한 의견을 내었고, 이번 좌담회에서 구체적인 방안과 대안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자리가 마련되어 더욱 뜻깊은 좌담회라 할 수 있다.劉正成(유정성)이 안건으로 이야기 나누는 것은 이번이 세 번 째입니다. 우선 중국 서예가 발전하게 된 배경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중국의 서법 시장도 30여 년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시작이 있었고, 흥함이 있었으며, 현재는 하강하는 추세에 있습니다. 70년 말, 80년 초 당시에는 서예가의 작품은 누가 받아주기만 해도 아주 기뻐했으며, 시장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82년도쯤, 지인 한 명이 작품 몇 점을 가지고 제게 와서 보여줬습니다. 재백석의 새우 그림, 서비홍의 고양이 그림, 장대천의 산수화와 다른 그림 등을 가지고 와서 진품인가 가품인가를 물었습니다. 내가 보기에 문제없는 진품이었습니다. 그 당시 가짜를 만들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이 그림을 사온 것이냐’라고 물어보니까, 당시 중국 돈으로 400원에 사 왔다고 했습니다. 40년 전에는 돌아가신 작가들의 작품만 판매되고, 살아있는 작가들의 작품은 팔리지 않았습니다. 80년대 중기에 이르러, 86~87년도에 일본 위에티엔이라는 작가와 계공 선생이 중국미술관에서 전시회를 했습니다. 당시 계공 선생의 작품을 영보재에서 한 점에 400위안을 받았습니다. 당시 5-6년 사이에 돌아가신 분들 작품이 400위안 정도였습니다. 86년도에 계공 선생님 작품 1점 가격이 400위안 매겨졌습니다. 400위안이라는 가격은 중국 사람에게 아주 비싼 가격이었기 때문에 사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일반 작가들의 작은 작품이라도 일본 돈으로 1000엔 정도였습니다. 제가 그때 일본 작가를 따라온 제자들을 영보재에 데리고 가서 계공 선생님 작품을 사게 하였습니다. 그러는 바람에 영보재에서 바로 다음날 작품을 800위안으로 올렸습니다. 지금 계공 선생의 작품 가격은 몇 십만 위안입니다. 20-30년 사이에 가격이 엄청 올랐습니다. 한•중•일 세 나라에 서예시장의 차이점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시장은 대개 대중소비에 의존하는데, 일본과 한국 시장은 주로 자국 작가들이 골동품을 많이 선호합니다. 자신의 제자들이 스승의 작품을 사주는 것을 제외하고, 시장이 거의 형성되지 않고 있습니다. 중국의 서예시장은 경매시장이 잘 형성된 편입니다. 대형 경매장에서는 주로 작고작가나 대가들의 작품이 주로 거래되고, 작은 갤러리에서는 현재 살아있는 작가들의 작품이 주로 거래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말씀드리자면, 중국의 서예 시장에서 가장 활발한 곳은 산동성과 감숙성입니다. 산동성은 비교적으로 비싼 작품들이 판매되고, 감숙성에서는 저렴한 작품들이 거래됩니다. 왜냐면 산동성이 감숙성보다 경제적으로 좋은 편이기 때문입니다. 감숙성의 창주와 즈보지방에서 중국에서 뛰어난 작가들은 대부분이 거래됩니다. 중국에서 유명한 서예가들 중에 이곳에 가보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감수성은 산동성보다 금융 소비는 낙후되었지만 서예 시장 기반은 아주 좋습니다. 2001년도에 제가 감수성에 처음 갔을 때 반절지 한 점에 천 원 정도에 팔았습니다. 비슷한 나이 대에 작가들, 왕용, 손백상 선생님 같은 분들도 거의 비슷한 가격이었습니다. 나이 비슷한 작가 중에도 지명도가 조금 뒤떨어진 작가들은 100원 200원에도 거래되었습니다. 유명한 곽자서 손백상 선생들도 200원부터 팔기 시작했습니다. 감수성은 서예 시장 기반이 튼튼하기 때문에, 감수성 통우현이라는 지방에는 집집마다 작품을 걸려있습니다. 제가 처음 통우현에서 작품 판매전을 했었는데, 작품을 사러 온 사람들의 돈 봉투가 두툼했습니다. 집에 보관해 오던 오 원짜리 십 원짜리 돈을 가져와 작품을 사러 온 것입니다. 만약 1,000원짜리 작품을 샀는데, 다른 사람이 1,200원 준다면 바로 팔아넘겨요. 200원 남기고도 거래를 합니다. 2007년도에 퉁우이현에 화랑이 몇 십 개가 있었습니다. 그때 성장님과 한담할 기기회가 있었는데, 구분 말이 “우리 현에 화랑이 오 십 개가 있으면 최소 백오십 명이 먹고 살 수 있습니다. 화랑에서 일하는 종업원도 있어야 하고, 표구사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지요.”라고 했습니다. 당시 인구가 2-3만 명밖에 없는 작은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길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 현에 서화 판매가 번창하면서 지금은 화랑만 1,000개가 되었고, 인구도 십몇 만 명 정도로 늘었습니다. 그래서 중국 문화부에서 통우이현을 ‘서예지향’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지금 저와 같은 레벨의 작가 작품들은 한 점에 몇 만 원에 팔리기도 하지만, 너무 비싸기 때문에 잘 팔리지 잘 팔리지 않습니다. 반면 젊은 작가들은 몇 백 원에도 팔기 때문에 잘 팔립니다. 100원이나 200원의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팔아서 기초 자본을 마련하고, 그것으로 작품 활동을 계속해 갑니다. 산동지방과 감숙성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청년작가들을 양성하는 서예 시장이 많기 때문에 전업 작가로 생계가 가능합니다. 한국과 일본의 작가들은 대개 교육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학교나 사설학원을 개설하여 생계를 해결하는데, 중국은 이렇게 서예 외적인 방법을 살아가는 서예가는 비교적 적습니다. 중국의 서예 시장은 서예 발전에 큰 역할을 했으며, 한국과 일본에도 참고할게 있을 겁니다. 그래서 올해 초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국작가들의 중국 서예 진출을 제의했던 것입니다. 중국은 2005년도까지 가장 왕성했는데, 이때는 ‘예물시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예작품이 선물이나 뇌물로 쓰였던 것입니다. 근자에 중부에서 부패 척결을 내세우면서 지나치게 높은 작품 가격은 정상으로 조정이 되었는데, 일반 작가들의 작가들은 본래 가격이 그다지 높지 않기 그런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젊은 작가들이 경매시장에 진출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왜냐면 경매 회사들이 작품 가격이 높지 않은 젊은 작가들의 작품 거래를 꺼리기 때문입니다. 싼 작품은 팔려봤자 수수료가 많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요즘 젊은 작가들은 경매회사나 화랑보다 인터넷 경매를 많이 합니다. 요즘에는 인터넷 경매보다도 위쳇을 이용한 위쳇 경매를 많이 하는데, 북경 유리창에 있는 행단미술관에서 하는 행단위쳇경매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젊은 작가뿐만 아니라 저나 왕용 같은 영향력 있는 작가들이 함께 경매를 합니다. 그런데 사실 저나 왕용 같은 작가는 위쳇 판매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왜냐면 젊은 작가들과 함께 하기 때문에 가격을 높이 책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그만 작품을 출품하여 가격을 낮춥니다. 그래도 이 경매에서 명가 작품의 가격이 올라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재미를 느끼고 주목하게 되면서 젊은 작가들 작품이 덩달아 올라가게 됩니다. 이같이 한국에서도 명가는 작은 작품을 출품하고 젊은 작가들은 좀 큰 작품을 내놓아 함께 명가와 젊은 작가들이 함께 경매에 참여하는 방법은 어떨지 고려해봤으면 좋겠습니다. 김양동(金洋東)우리나라에 서예 시장..., 시장이라는 것은 소비가 형성되지요. 그런데 그 소비가 어떤 성격의 소비인가가 중요합니다. 즉 돈을 주고받는 거래의 소비인가, 아니면 그냥 도덕적으로 교환하는 소비인가? 조선시대에는 거래를 하게 되면 상인으로 천시했습니다. 더구나 서예는 선비들이 했던 것이었기 때문에 더 중시되었는데, 그러다가 일제시대가 되어 추사의 서예가 활발하게 거래되었습니다. 그것은 찾는 사람이 있고, 작품이 귀하니 값이 형성되었지요. 그러다 광복 이후 국전이 생겨나면서 한국 서단이 생겨나게 되었죠. 그러나 역시 한국에서도 돌아가신 분들의 작품은 거래가 되었지만, 산 사람들의 작품은 대 원로작가를 제외하고는 거의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배우는 문도들에 의해서 스승의 작품을 사드리곤 했지요. 그리고 80년 대 이후 90년 때 까지 경제발전으로 부가 축적되니까 글씨가 거래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한국도 마찬가지로 젊은 작가들의 작품은 돌아보지 않고 원로 중심으로 형성되었습니다. 2000년대 이후 특히 2010년 이후에는 한국경제도 분화되고 급격히 문자 환경, 문화의 미적으로 보는 관점이 변화가 많았습니다. 세대가 교체되면서 한자를 모르는 세대가 정계, 제계를 주름잡다 보니 한자서예는 자연스레 인기가 떨어지게 되었고, 그중에 반성적 의미에서 중국 경제의 부흥과 더불어 중국과의 관계성에 의해서 중국 문화를 눈여겨보던 관점 중 하나가 서예였지요. 그것은 서예의 희망이었지만, 대중의 관심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김종건(金鍾鍵)변화 중에서 가장 큰 변화를 말씀드리자면, 그전에는 디자이너들이 하나의 도구로서 캘리그라피를 찾았었고, 지금에 와서는 일반인들이 손글씨를 잘 쓰기 위해서 취미로 배우기 시작합니다. 펜이 아닌 붓펜을 쉽게 사용을 하는 거죠. 한글에서는 훈민정음이라고 하는 고체 스타일과 궁서체 스타일, 민체 스타일 등을 배워서 자신의 글씨를 만들어내는 거죠. 전에는 디자이너가 쓰는 하나의 도구였다면 지금은 취미로서도 하고, 최근에 와서는 나도 작가가 된다는 의미에 작품으로서의 글씨를 배우기도 합니다. 몇 년 전부터 또 한 가지 주목할 사항은 글씨를 하나의 힐링의 대상으로 여깁니다. 먹을 갈고, 글씨를 쓰고, 요가를 하고 차를 마시는 공간으로 활용하는데, 지금 이 공간이 바로 그러한 공간입니다. 외국인들이 그런 문화를 체험 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젊은 작가들은 중국과 일본에서 교류전을 하고 있는데요. 중국 북경중앙미술학원 디자인과 교수랑 전시를 하고 싶은데, ‘너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러면 한글 디자인인 것 같습니다. 한글 글꼴에 대한 다양성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호남미술사법대에서 교류전을 한 적이 있는데 거기에는 전통 서예가 타이포그래피 캘리그라피가 모여서 중국과 교류전을 했습니다. 여태명(余泰明)오늘 우리가 모인 것은 서예가들도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80-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에 서예 시장이 아주 활발했는데, 지금에 와서는 정말 어렵기만 합니다. 어제 국회에서 서예진흥법이 통과되면서 기대를 가지고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2000년 이후에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준비과정에서 엄청난 변화가 있었습니다. 북경에 있는 집값이 오백 배 이상 올랐습니다. 그리고 서예 시장도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굉장히 활성화가 되었고, 치바이스 작품가격이 오르다 보니 청년작가들 작품도 함께 올랐던 것 같습니다. 저는 3년 전부터 연말에 페친들에게 이벤트를 합니다. 페이스북에 일 년 동안 활동을 하고, 저를 알고 있는 페친들에게 인터넷 경매를 합니다. 어떤 때는 높은 가격으로 낙찰이 되고, 어쩔 때는 낮은 가격에 낙찰되기도 합니다. 이런 것도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보면 현판, 기념비를 만들게 되면 작품비 면목이 없습니다. 돌이나 시공비는 책정이 되는데 글씨를 쓴 것에 대한 작품비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한국 사람들이 중국에 진출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중국 사람의 중국 사람 작품을 사게 되지, 한국 사람의 작품을 사진 않습니다. 그것을 극복하는 것을 논의해야 할 것입니다.섭흔(葉欣-이에신)중국 사람들도 대개는 자기 지방의 뛰어난 작가 작품만 삽니다. 전국적으로 다 잘 팔리는 사람은 손에 꼽힙니다. 중국 시장도 한국작가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각각 먹고 살 수 있는 길은 있습니다. 오리지널 시장에 형성되지 않은 작가들이 많습니다. 어떤 작가는 시장에 걸면 잘 안 팔리는데, 자기 글씨를 좋아하는 사업자 한두 사람이 있으면 먹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시장을 무시하는 겁니다. 그러면 또 비싸게 팔게 됩니다. 그런 현상이 많습니다. 사실상 사람들이 작가들의 위치, 활동력 등 종합적인 것을 보고 구매하지 작품만을 잘 썼다고 팔리지 않습니다. 중국의 모든 작가들은 경매에서 시작할 때 0원부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은 다 표구해놓고 20원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면 표구비도 나오지 않습니다. 안 사더라도 자기 돈으로 작업을 계속합니다. 그래서 작업시간이 많이 필요합니다. 유정성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은 한국작가들이 이번에 경매장에 들어가는데, 자기 돈 아니면 주변에 아는 사람을 통해서라도 작품을 사라. 그래야 활성화가 될 것이다. 진출하려면 너무 예술적으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개인전 할 때 작품도 보면 자신의 예술세계를 보여주고 싶어 하는 작품과 팔고 싶어 하는 작품이 금방 보이잖아요?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경매에 내놓았을 때 그림처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양식이 필요하고, 큰 작품보다는 소품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큰 기대를 하기보다는 일단 시작을 해보고 여러 번 진출해야 할 것입니다. 여초선생님 작품은 중국에 많이 진출하잖아요. 가끔 보면 여초 선생님 작품을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중선생을 우리들은 잘 알지만 중국 사람들이 잘 모르기 때문에 아무리 얘기해도 사는 사람, 찾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 구당 선생님도 거의 진출하지 않기 때문에 잘 모릅니다. 초정 선생님도 잘 나가죠, 이렇게 중국에 진출하려면 젊을 때부터 많이 나가고 알려야 합니다. 2019. 1. 10글씨21 편집실
덕온공주가 손수 쓴 「자경전기」, 「규훈」 등 총 68점 환수
덕온공주 집안의 한글자료, 고국의 품으로 돌아오다문화재청(청장 정재숙)은 조선의 마지막 공주인 덕온공주가 한글로 쓴 「자경전기(慈慶殿記)」와 「규훈(閨訓)」을 비롯한 <덕온공주 집안의 한글자료>를 지난해 11월 미국에서 매입해 국내로 들여왔다. <덕온공주 집안의 한글자료>는 윤씨 집안으로 하가(下嫁, 공주가 시집을 감)한 조선 23대 임금 순조의 셋째 딸인 덕온공주(德溫公主, 1822-1844)와 양자 윤용구(尹用求, 1853-1939), 손녀 윤백영(尹伯榮, 1888-1986) 등 왕실 후손이 3대에 걸쳐 작성한 한글 책과 편지, 서예작품 등 총 68점이다.자경전기(慈慶殿記)* 자경전기(慈慶殿記): 1808년 순조가 정조비 효의왕후의 명에 따라 창경궁 자경전에 대해 쓴 책 <덕온공주 집안의 한글자료>의 귀환은 국내기관 간 협력을 통한 문화재 환수의 모범 사례로,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사장 지건길)과 국립한글박물관이 각자의 전문성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이루어낸 성과다. 국립한글박물관은 유물에 대한 정보를 발견·수집하여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제공하였고,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소장자와 접촉과 매입 협상을 통해 유물을 국내로 들여오는 데 성공했다.여사초략(女史抄略) 이번에 환수된 자료들은 조선왕실의 한글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이중에서도 덕온공주가 아름다운 한글 궁체로 손수 쓴 「자경전기(慈慶殿記)」와 「규훈(閨訓)」이 주목을 끈다. 두 책은 모두 본래 한문으로 쓰여 있던 것을 덕온공주가 한글로 번역해 작성한 자료로, 덕온공주가 쓴 것으로는 이번에 처음 발견되어 희소가치가 높다. 규훈(閨訓)* 규훈(閨訓): 여성들이 지켜야 할 덕목과 예절에 관한 책 또한, 이번에 환수된 자료에는 왕실에서 작성한 한글 편지와 왕실 여성들을 위한 한글 역사서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신정왕후(순조의 세자인 익종의 비이자 헌종의 어머니) 편지*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선 제23대 순조의 세자인 익종(翼宗)의 비이자, 제24대 헌종의 어머니 한글 편지들은 덕온공주의 어머니 순원왕후가 사위 윤의선(1823~1887)에게 딸의 근황을 묻는 편지를 비롯하여, 신정왕후(추존왕 익종 비), 명헌왕후(헌종 계비), 철인왕후(철종 비), 명성황후(고종 비) 등이 직접 쓰거나 상궁이 대필해서 덕온공주 집안에 보낸 것들이다. 이 중에는 조선 최고의 한글 명필로 알려진 궁중여성 서기 이씨(書記 李氏)가 대필한 편지도 있어 사료적 중요성이 크다.순원왕후(덕온공주의 어머니) 편지 한글 역사서에는 「정사기람(正史紀覽)」과 「여사초략(女史抄略)」 등이 있는데, 「정사기람」은 덕온공주의 아들 윤용구가 고종의 명을 받아 왕실 여성들을 위해 쓴 역사책이며, 「여사초략」은 윤용구가 당시 12살이던 딸 윤백영을 위해 여성과 관련된 역사를 발췌해서 작성한 책이다. 정사기람(正史紀覽) 이외에도 덕온공주의 손녀인 윤백영의 서예작품이 눈에 띄는데, 윤백영은 일제강점기에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한글 궁체로 쓴 서예작품으로는 처음으로 입선하였으며, 전통적인 한글 궁체를 현대적인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킨 인물이다. 환소군전(桓少君傳 이번에 환수된 68점의 한글 자료는 조선 왕실 여성들의 생활 속에서 한글이 의사소통 수단으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줄 뿐만 아니라 왕실에서 사용하였던 아름다운 한글 궁체의 면모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역사적·예술적·학술적 가치가 높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을 지낸 국어학자 이종덕 박사는 <덕온공주 집안의 한글 자료>는 기존에 소개된 단편적인 왕실 편지나 소설과는 차원이 다른 자료로서, 왕실 부마 집안의 일괄 자료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며 왕실인물의 개인적인 삶을 엿볼 수 있어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고 환수의 의의를 밝혔다. 문화재청은 <덕온공주 집안의 한글 자료>를 국립한글박물관에 이관하여 더욱 전문적으로 연구, 활용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보도자료 및 사진 출처 : 문화재청2019.01.16글씨21 편집실
김달진미술연구소 『미술인 인명사전』(2018) 발간
김달진미술연구소 『미술인 인명사전』(2018) 발간김달진미술연구소(소장 김달진)는 문화체육관광부 예술경영지원센터 지원 연구 결과로 『미술인 인명사전』(2018)을 발간하였다. 발간된 인명사전은 <한국 미술 기초자료 구축 및 활성화 사업>의 일환으로 작년 7월말부터 연말까지 진행된 연구의 결과물이다. 수록대상은 1850년부터 1977년까지 출생한 미술인 6,000명으로 작품활동을 펼치는 창작미술인 과 전시기획자, 미술평론가, 미술사가, 갤러리스트, 미술품보존과학자 등의 비창작미술인을 아우른다. 비율은 창작미술인 86%(5,157명), 비창작미술인 14%(843명)로 일반에서는 알기 어려웠던 창작미술인 외의 전문가들도 다수 확인이 가능하다. < 창작미술인 > 수록정보① 성명 ② 출생지③ 학력 ④ 전시⑤ 행정 ⑥ 레지던시⑦ 수상 ⑧ 연구(출판)⑨ 현직⑩ 작고미술인 중 작품도판< 비창작미술인 > 수록정보① 성명 ② 출생지③ 학력 ④ 행정⑤ 연구(출판)⑥ 수상 ⑦ 현직연구책임자 김달진 소장은 이번 인명사전을 통해 미술계 종사자들 뿐 아니라 일반에서도 근대와 현대, 한국과 외국 같은 시공간의 제약을 벗어나 한국미술에 대한 보다 넓은 이해를 가질 수 있길 기대한다고 설명하였다. <한국 미술 기초자료 구축 및 활성화 사업>은 김달진미술연구소에서 한국근현대미술의 연구기반강화를 위해 지속적으로 추진해오고 있는 연구사업으로서 이전까지 『대한민국미술인인명록Ⅰ』(2010), 『한국미술단체자료집 1945-1999』(2013), 『한국미술전시자료집Ⅰ 1945-1969』(2014), 『한국미술전시자료집Ⅱ 1970-1979』(2015), 『한국미술전시자료집Ⅲ 1980-1989』(2017), 『한국미술전시자료집Ⅳ 1990-1999』(2018)와 같은 결과물이 일반에 공개된바 있다. 이번에 발행되는 인명사전은 주요 국공립도서관 및 대학도서관, 국공립미술관 등 유관기관에 인쇄자료로 배포되어 해당 기관의 열람규정에 따라 확인이 가능하며, 디지털파일(PDF)은 예술경영지원센터(gokams.or.kr) 온라인 자료실과 김달진미술연구소(daljin.com) 게시판에 공개되어 국민 누구든지 다운로드 받아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보도자료 및 사진 출처 : 김달진미술연구소2019.01.16글씨21 편집실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서예문인화 교육자 과정 졸업작품전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서예문인화 교육자 과정 졸업작품전> 졸업은 학업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출발점에 선 새로운 시작이다. 이러한 새 출발점에 선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서예 문인화 교육자 과정 36기 37기 학생들의 졸업 작품전이 인사동 인사아트프라자 5층에서 개최되었다. 16일(수) 오픈 행사를 시작으로 22일(화)까지 진행된다. 인사말을 전하는 36기 회장 강형문님36기 37기 학생들은 그동안 배운 내용들을 가감 없이 전시회에서 뽐내었다. 졸업전시 작품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전문작가 수준의 작품들이 전시장을 가득 채웠다. 졸업전시를 축하하고 관람하러 온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과 멋진 작품들을 선사하였다. 서예 문인화교육자과정 김찬호 주임교수김찬호 주임교수는 격려사를 통해 “서예와 문인화는 현대 서양미술사조에서 언어를 강조한 개념미술, 반복성과 함축성을 담아내는 미니멀리즘, 서예적인 역동성을 강조하는 서체 추상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수업을 통해 이론과 실기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앞으로 서예 문인화 발전에 더욱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36기 37기의 전시를 다시 한 번 축하드리면서 건필을 기원한다.”라고 밝혔다.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서예문인화 과정은 매년 전기, 후기 M.T에서 재학생과 동문 간의 친목 및 학술 특강을 진행하여 학생들 간의 단합력과 학습의지를 높이고, 매년 해외 학술답사를 통해 서학의 깊이와 견문을 키운다. 또한 학술지 발간 세미나 개최 등을 통해 서예문인화의 소양을 갖춘 전문적인 지도자로 양성하고 있다. 현재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서예 문인화 과정 신입생을 모집 중에 있다. 1차 접수는 1월 18(금), 2차접수는 2월 15일(금)까지이다. 자세한 사항은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전시정보>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서예문인화 교육자과정 졸업작품전기간 : 2019년 1월 16일(수) - 22일(화)장소 : 인사아트프라자 5층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길 34-1)2019.1.17이승민기자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국새가 46만에 한국으로 돌아온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임정의 국새가 한국으로 돌아온다. 임정 임시의정원 의장 및 국무령을 지낸 만오 홍진 선생의 손자며느리인 신창휴씨는 최근 동아일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홍진 선생의 동상이 국회에 건립되는 날 남편이 보관해 온 임시의정원 관인을 국회에 기증할 것”이라고 밝혔다.大韓民國 三年(1921년) 一月 一日 임시정부급 임시의정원 신년축하식 기념촬영 / 이미지 출처-네이버이미지 검색이 관인은 오늘날 국회 격인 임시의정원의 각종 공문서에 찍었던 도장으로 임정 임시헌법 조항으로 볼 때 임정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국새 가운데 하나에 해당한다. 손자 며느리인 신씨가 동아일보에 공개한 이 관인은 검은색 목제도장으로 ‘臨時議政院印(임시의정원인)’이라고 새겨졌다. 손자 홍석주씨는 “할아버지(홍진)가 1945년 충칭에서 갖고 돌아왔다. 1919년부터 의정원 인장으로 쓰인 임시의정원인”이라고 설명한 문서를 남겼다. 그는 각고의 노력 끝에 이 관인을 온전히 간직해 왔으며, 1973년 미국 이민 뒤에도 조부의 업적이 제대로 평가받길 바라며 여러 차례 관인을 한국에 기증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2016년 87세로 눈을 감았다. 1919년부터 쓰인 \'임시의정원印\' / 이미지 출처-동아일보아내인 신씨에 따르면 남편 홍씨는 이 도장을 목숨처럼 지켰다. 6.25전쟁, 일본유학(교환교수), 미국 이민 등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남편이 6.25정쟁 피란 당시 도장주머니를 베개에 돌돌 말아 넣고 잠을 잘 때도 그 베개만 썼다. 가족들에게도 도장이 어디에 있는지 알리지 않았다.”고 전했다. 홍석주씨가 가족에게 남긴 도장과 문서 원본에는 “영구 가보로 보관할 것, 햇볕과 습기에 쬐이지 말 것”이란 당부사항과 설명이 빼곡했다. ‘임시의정원인(臨時議政院印)’이라고 새겨진 가로 5cm, 높이 6cm의 검은색 목재 도장에는 ‘1919년부터의 의정원 인장’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홍씨는 이 문서에 “임시의정원인은 1919년 4월 임시의정원 수립 때부터 유일한 도장으로 임시정부 및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상징한다”며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적었다. 만오 홍진 선생의 손자며느리 신창휴씨18일 미국 동무 모처에서 동아일보와 채널A에 단독 공개한 임시정부 의정원 관인 등 도장 4개를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 사진 출처-동아일보‘홍진(洪震)’이라고 새겨진 옥돌로 만든 작은 도장에는 ‘관용’ 및 ‘공문서’에 쓰였다는 말도 있었다. 이 외 만오 선생이 1919년 4월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 법관과 변호사로 일하며 썼던 그의 본명 홍면희(洪冕熹)가 새겨진 도장, 또 다른 호 ‘만호(晩湖)’가 새겨진 도장도 1점씩 있다. 임시정부 연구의 권위자인 한시준 단국대 교수는 “임정에서 행정부 수반(국무령)과 입법부 수반(임시의정원 의장)을 모두 지낸 분은 홍진 선생이 유일하다”며 “가장 오랜 기간 의장으로 활동하며 의회정치의 기틀을 닦은 분”이라고 설명했다. 1943년 중국 충칭에서 열린 재중자유한인대회에서 총주석 자격으로 연설하는 만오 홍진 선생의 모습. 한시준 단국대 교수 제공 / 사진 출처 - 동아일보1877년 명문가 후예로 태어난 홍진 선생은 1904년 법관양성소를 졸업하고 평양에서 변호사로 일했다. 1919년 3·1운동 직후 동지들을 규합해 인천에서 13도 대표자 대회를 개최하고 한성정부를 조직한 뒤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해 9월 한성정부를 법통으로 통합 임시정부가 출범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1921년 5월에는 이동녕 손정도에 이어 임시의정원의 3대 의장으로 선출됐고 이어 1939, 1942년에도 의장에 선출됐다. 한 교수는 저서에서 “홍진 선생이 이념과 당파를 초월한 인물이었기에 좌우익 세력이 참여한 통일의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34회임시의정 /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이미지검색만오 홍진 선생은 임시의정원의 마지막 의장이었고 임정 환국 뒤 의정원을 계승한 비상국민회의 의장으로도 선출됐다. 홍진 선생의 후손이 의정원 관인을 보관하게 된 데에는 이 같은 사연이 있다. 홍진 선생이 1945년 12월 1일 환국하면서 가져온 의정원 문서는 손자 홍석주 씨가 보관하다가 국회에 기증해 1974년 국회도서관이 발간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최초로 규정된 ‘대한민국 임시약헌’(헌법) 개정안 초안(원본)과 건국강령, 광복군 작전보고 등 귀중한 자료들이었다. 임시정부 문서는 이들 자료 말고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의정원 문서를 온전하게 보존해 후대에 남긴 것 역시 홍진 선생의 큰 공헌으로 평가된다. 홍진 선생은 1946년 9월 9일 병환으로 숨을 거뒀고 장례식은 9월 13일 김구 선생, 이승만 박사를 비롯해 각계 인사가 운집한 가운데 성대하게 거행됐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서 1923년에 사용한 태극기/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이미지 검색홍석주씨가 가보로 지켜오던 이 관인은 중국 상하이에서 첫 임시의정원 회의가 열린 지 100주년이 되는 올 4월 10일에 맞춰 기증될 것으로 전망된다. 문희상 국회의장실은 “임정 100주년을 맞는 올해 국회도서관에 임시의정원의 마지막 의장을 지낸 홍진 선생의 흉상을 건립한다”며 “상징적 의미가 큰 4월 10일 전 관인이 고국에 돌아올 수 있도록 흉상 건립을 서두르고 있다”고 밝혔다.2019. 1. 21글씨21 편집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