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 21

글씨와 놀다. 매거진 '글씨 21'

문인화

[Column]

2017-09-13
박선영의 <캘리그래피 천일야화>05

 손글씨 서체 개발과 조합형 캘리그래피 서체의 대두에 관하여

 

최근 글자꼴 개발의 경향은 디지털 환경이 생산하는 딱딱하고 기계적인 느낌에서 손맛 또는 인간미가 느껴지는 부드럽고 감성적인 느낌을 선호하는 것으로 바뀌는 듯하다. 옛 목판체 등을 되살린 옛멋글씨, 서예가들의 글씨를 활자화한 필 시리즈 등은 물론이거니와 여태명, 정병례, 신영복, 강병인, 백종열 등 유명 작가의 글씨를 서체화하는 것은 이제 흔한 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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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효봉서체 / 상쾌한 아침 / 고암새김-나무 / 백종열체 / 신영복체 / 담운체 

 


손글씨 서체개발

 

동서양을 막론하고 활자의 시작은 손글씨를 모방하는 것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꼭 누구의 글씨체라 이름 붙이지 않아도 서체개발에서 손글씨는 예전부터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쳐왔다. 기업전용서체도 예외는 아니어서 기존의 명조형과 고딕형 서체개발 외에 캘리그래피(손멋글씨)를 적용한 서체가 만들어지고 있다. CJ‘CJ손맛체’, 롯데마트의 다용도 캘리체등이 그것이다. 이들 서체는 삼성생명 ‘SLI파트너H1’이나 네이버 나눔손글씨와 비교했을 때 용도가 더욱 구체적인데, 식품회사의 특성을 살려 자사의 식품 패키지와 그 주변에 사용할 수 있게 디자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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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1 CJ패키지 전용서체(CJ손맛체) / 롯데마트 통큰서체(다용도 캘리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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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2 삼성생명(SLI파트너H1, SLI파트너H2) / 네이버 나눔체(나눔 손글씨)


기존 작가의 글씨를 서체로 만드는 것은 일정 부분 규칙성을 담보로 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탈 네모꼴 구조로 만들고 리듬감을 넣어도, 문장이 길어지면 일률적으로 보일 여지가 크다. 이를 탈피하고자 제한적으로나마 글자 모양을 선택할 수 있는 약간의 옵션 기능을 넣어 손글씨의 느낌을 더욱 살리고, 풍부한 표현을 가능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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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3-1 ‘봄날체피쳐링(Featuring) 옵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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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3-2 ‘CJ손맛체글립(Glyph)기능 중 세 가지 버전(Basic, Glyph Style 1, Glyph Style 2)

 

봄날체’, ‘백종열체’, ‘CJ손맛체등이 그 예인데, ‘봄날체의 경우 피쳐링(Featuring) 옵션을 넣어 조사나 어미에 주로 사용되는 빈도수가 높은 글자(64)를 선택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변화를 꾀했다. ‘CJ손맛체의 경우는 글립(Glyph) 기능으로 패키지디자인에 필요한 단어(108)2종의 다른 스타일로 개발해 3종의 효과를 누릴 수 있도록 했다. 모두 서체의 일률적인 모습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였지만 변화가 가능한 글자 수가 적어 제한적인 사용에 그쳐 아쉬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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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3-3 ‘강병인의 영묵체가변폭과 시각중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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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3-4 포천시 고유서체인 막걸리체상세 부분

 

최근 발표된 서체들은 글자폭이나 획의 흘림을 다양하게 살려 진일보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중 하나인 2015년 출시된 강병인의 영묵체는 글자의 자소나 구조에 따라 글자폭(Width)의 변화가 다양하고 글자마다 굵기와 밀도가 달라 기존 손글씨 서체보다 좀 더 자연스러운 느낌을 준다. 또한, 글자의 무게중심을 가운데로 맞춤으로서 안정적이며, 많은 양의 텍스트에서도 무리 없이 잘 보일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지역 고유서체 중 눈에 띈 것은 김대연의 캘리그래피를 바탕으로 만든 포천시의 고유서체인 막걸리체’(2014)인데, 포천시의 설명에 의하면 포천막걸리의 부드럽고 깊은 맛을 표현한 서체라 한다. 갈필 느낌과 중성 획의 흘림을 살려서 붓글씨의 자연스러움을 볼 수 있으며, 자형마다 기울기와 가로세로 두께를 다르게 적용해 개성 있는 서체로 완성했다. 포천시는 막걸리체를 무료로 배포 중이며, 토속적인 느낌의 향토음식점 간판에 많이 쓰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조합형 캘리그래피 서체의 대두

 

기업이나 지자체 전용 서체의 캘리그래피 사용은 기업의 브랜드나 지역의 이미지를 좀 더 자유로워 보이게 도와준다. 하지만 서체화 과정의 한계로 기존 캘리그래피 원도보다 많이 다듬어져서 글씨의 맛이나, 표현의 적합성은 어느 정도 약해진다 하겠다. 기존 작가의 글씨를 서체로 개발하는 것은 일정 부분 규칙성을 담보로 하므로 서체의 변화가 작아지고 일률적으로 특성이 바뀌어 보일 여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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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4-1 릭스코(폰트릭스) 조합형 캘리그래피 서체 샘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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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4-2 캘리스토어 조합형 캘리그래피 서체 샘플


그에 반해 자유로운 캘리그래피와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는 방식이 있다. 타이핑해서 쓸 수 있는 설치식 폰트가 아닌 벡터 파일(illustrator 8.0) 이미지를 조합해 사용하는 방식인 조합형 캘리그래피 서체가 그것이다. 혹자는 붓 느낌의 커스텀 폰트 소스라고도 하지만, 조합형 캘리그래피 서체는 일러스트 파일화된 자소를 분리해 사용하기 때문에 크기와 기울기 변화가 자유롭다. 한 자소당 30개 정도씩 주어지는 샘플들은 실로 다양한 자음과 모음의 조합을 만들어낼 수 있으며, 디자이너의 역량에 따라 결과물은 천차만별이다.

 

조합형 캘리그래피 서체의 등장으로 디자이너는 리듬감, 붓의 동선, 공간배열, 크기와 각도 등 캘리그래피와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이해가 더욱더 필요하게 되었다. 물론 조합형 캘리그래피 서체의 종류에 따라 다르겠지만, 캘리그래피 사용과 구성의 질적 차이는 디자이너의 손에 상당 부분 넘어갔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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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5-1 조합형 캘리그래피 서체(캘리스토어 맛글체)의 다양한 자모음 조합 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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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5-2 자모음 크기 변화 적용 예시


조합형 캘리그래피 서체의 제작은 네이버의 로고제작카페에서 이벤트로 진행하기도 하며, 이미지뱅크 회사의 새로운 사업 카테고리에 들어가 있는듯하다.

블로그에 개인이 올린 엉성한 수준의 조합형 캘리그래피 서체도 많지만, 몇몇 회사에서 출시한 조합형 캘리그래피 서체는 디자이너에게 손쉬운 캘리그래피 소스를 공급할 뿐 아니라 전각과 먹그림도 들어가 있어 어느 정도 쓸만한, 일정수준 이상의 작업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지금처럼 캘리그래피 시장이 혼탁해지고, 좋고 나쁨의 구분이 뒤섞여 있는 상황에서 안정적인 소스의 공급은 최악을 피해 가는 방법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고만고만한 조합형 캘리그래피의 사용은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면 외부 의뢰 감소를 불러오고, 결국 다양한 캘리그래퍼의 출현을 막아 독이 될 가능성도 있다. 물론 조합형 캘리그래피를 만든 캘리그래퍼에게는 새로운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합형 캘리그래피 서체의 사용으로 캘리그래피의 저변이 확대되어 캘리그래피 작업은 늘어남에도 불구하고 경쟁력 있는 캘리그래퍼는 오히려 줄어드는 기현상이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기우일 것이다.

 

조합형 캘리그래피 서체 공급사에서는 사용자 등록 절차를 통해 서체가 무분별하게 복사되는 것을 막고 있다. 하지만 수십, 수백 개의 획을 가진 캘리그래피 서체의 특성상, 매일 쏟아져 나오는 캘리그래피를 사용한 결과물의 홍수 속에서 무단사용과 복사를 과연 선별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우리는 붓으로 글씨를 쓰면 지나치게 경외시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풍토에서 조합형 캘리그래피는 붓으로 쓰면 다 좋아하는 낮은 수준의 기대를 충족시키는데 꽤 괜찮은 방법이다. 그러나 조합형 캘리그래피 서체의 경우 작가들의 자유로운 캘리그래피와 비교했을 때 희소성이나 표현의 적합성이 어느 정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 하여도 지역의 간판이나 농산물 브랜드 등에서는 저렴한 제작 비용으로 효율적인 효과를 거둘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기능적인 가독성과 붓질의 형태를 넘어 감동을 주는 글씨가 나올는지 모르겠다.

 

상용 일러스트의 클립아트나 스톡 사진이 있다고 해서 일러스트레이터나 포토그래퍼에게 일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글씨는 특성상 따라 쓰기 쉽고, 시장이 좁아 어느 정도 영향이 있을 수 있다. 또한, 캘리그래퍼들 역시 서체와 경쟁하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만의 색을 찾아 스스로 경쟁력을 높이도록 더욱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미 있는 작은 파이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캘리그래피가 생활 속의 문화로 안착할 수 있도록 한 단계 도약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교육으로의 집중이 아닌 새로운 상품화 시장의 개발과 다양성이 살아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글, 그리고 캘리그래피의 인기와 더불어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단지 한글을 디자인 요소로 차용했다고 해서 우리의 전통 미학이 살아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한글의 아름다움을 활용했다 하면서도 후줄근하고, 촌스러운 디자인을 수없이 많이 봤다. 한글로 만들었다고 무조건적인 박수를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한글의 멋이 살아있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만이 자격이 있다. 이는 한글캘리그래피를 만들고 쓰는 사람뿐만 아니라, 부리고 사용하는 사람들의 시각이 높아져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실적인 어려움에도 한글 디자인과 캘리그래피, 더 나아가 한글문화의 발전을 위해서는 더 많은 실험과 다양한 작품에의 적절한 사용이 함께 이뤄져야 할 것이다.

 

 자료 제공 : 네이버, 롯데마트, 산돌, 윤디자인, 직지소프트, 초롱테크, 캘리스토어, 포천시, 폰트릭스, 폰트뱅크, CJ

 

 



박선영(야림) 그래픽디자이너, 캘리그래퍼

996크리에이티브랩 소장, ) 한국캘리그라피디자인협회 이사, 전 한국시각정보디자인협회 이사로 활동했다. 동양적인 문화요소와 조형을 현대적인 디자인 언어로 융화시키는 작업에 관심이 많은 그는 독립적인 프로젝트 활동 및 출판과 한글 관련 프로젝트와 전시에 참여하고 있으며, 서울예술대학교에서 우리 문자의 조형을 강의한다. 논문 <캘리그래피(손멋글씨)의 조형적 표현과 활용에 관한 연구>(2005)를 발표했고, 이탈리아 Utilita Manifesta/ Design for Social 2010에서 작품이 선정된 바 있다.

http://yarim.blog.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