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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화

[News]

2019-09-03
통일신라 명필 ˝김생金生˝ 친필 6건 찾았다


불교고고학자 박홍국 위덕대박물관장은 92일 창녕 인왕사조성비와 산청 단속사 신행선사비 등과 영남지방의 5건이 김생의 친필로 추정된다고 주장을 제기했다. 통일신라시대 최고 명필로 알려진 서예가 김생(711~?)은 삼국사기를 비롯한 여러 역사서에서 명필로 기록되지만 김생의 필적을 집자하여 새긴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와 板刻한 전유암산가서」로 짐작할 뿐 친필이 남아있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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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암 신라비 탁본상태


이번에 수도암 신라비, 창녕 인양사 조성비, 산청 단속사 신행선사비, 경주 이차돈 순교비, 경주 무장사지 아미타불조상 사적비, 김천 갈항사지 동탑 상층 기단 명문 등 6건에 대해 김생의 것이라 주장을 제기한 박 관장은 지난 5월 증산면 청암사 부속 암자인 도선국사비에서 김생의 글씨로 추정되는 글자 54자를 판독했다고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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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항사 석탑기 낭공대사비 서체비교.JPG



박 관장과 함께 비석을 분석한 정현숙 원광대 서예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은 “200여 자 가운데 약 54자를 판독했는데 그중 형태가 명확한 글자를 살펴보면 김생의 해서·행서 집자비인 봉화의 태자사비 글자와 거의 같다고 말했다.

 

원화삼년「元和三年」 부분 탁본 및 디지털 탁본.JPG

「비로자나불」, 「金生書」, 元和三年」 부분 탁본 및 디지털 탁본


이후 박 관장은 지난 4-5월 발견해서 보고한 김천 수도암비 뿐 아니라 같은 김천의 갈항사 석탑기, 경주 무장사아미타여래조상 사적비, 산청 단속사 신행선사비, 경주 이차돈 순교비, 창녕탑금당치성문기비 등 6건이 모두 김생의 진적이다.”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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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 수도암 신라비의 조사와 김생 진적」, 박홍국, 논문 도판 일부


박 관장은 학술지 신라사학보최신호에 실은 논문 김천 수도암 신라비의 조사와 김생 진적에서 김생 출생 시기는 삼국사기에 실린 711년이 아니라 740~750년 무렵으로 생각되며, 그에 따라 8세기 후반과 9세기 초반에 작성된 비문 글씨들을 김생의 실제 필적으로 인정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그가 김생이 태어난 시점을 늦춰 잡은 이유는 수도암비에 등장하는 원화삼년(元和三年 ,808)이라는 연호다. 이번 주장에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원화삼년’4글자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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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행선사비 탁본(부분)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제공


김천 갈항사 석탑기의 명문은 갈항사 동탑 상층기단 우측 면석에 새겨져 있다. 785~798년에 새겨진 것이며, 해서와 행서가 섞여있고 서체가 낭공대사비와 유사하며 서품이 높다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이유에서 김생 친필 금석문으로 가장 먼저 제시한 명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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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창녕 치성문기비 탁본(부분,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우)창녕 치성문기비(부분)


또한 보물 제227호 창녕 탑금당 치성문기비는 810(원화5, 헌덕왕 2)에 세웠으며 삼면에 글씨가 있다. 이 비석의 탁본을 보면 사진의 글씨보다 획이 굵어 보이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다. 남면과 서면에는 단정한 해서풍의글씨가 대부분이고, 동면에는 행서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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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행선사비 ‘無’자 / 김천 수도암 신라비의 조사와 김생 진적」, 박홍국, 논문 도판 일부


산청 단속사 신행선사비는 원화 8(헌덕왕 5813)에 세워졌다. 한쪽 면에만 글자를 새긴 비석이다. 비문을 지은 사람은 金獻貞이며, 書者東溪沙門靈業이다. 새겨진 글씨의 서풍은 왕희지와 흡사하다. 필자는 신생선사비의 필체가 힘, 절제, 자유분방한 등이 왕희지보다 더 높은 경지에 올랐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신행선사비의 서자인 靈業은 김생 글씨 집자비인 낭공대사비에 재현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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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희지 난정서와 신행선사비의 ‘氣’자 비교


박 관장은 靈業이 김생, 최지원과 더불어 신라 명필 3인 중 1명으로 해동명적에도 올라있으며 靈業의 생애에 대해서 한 문장의 기록도 찾아볼 수 없는 이유는 靈業이 곧 김생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통일신라시대 최고 명필로 기억되는 김생은 그 명성과는 달리 남겨진 친필 비문 조차 없다. 김생의 글씨를 集字하여 새긴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板刻전유암산가서에 의지하여 그의 필력을 짐작 할 뿐이었다. 이번 박 관장의 논문을 통해 제기된 김생의 친필 금석문을 통해 한국 금석문 연구가 더욱 활발해 질것으로 전망된다.

 

자료제공 : 박홍국 위덕대박물관장

참고자료 : 2019.8.31, 「김천 수도암 신라비의 조사와 김생 진적」, 박홍국, 신라사학보/신라사학회  

2019. 9. 3

글씨21 편집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