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 21

글씨와 놀다. 매거진 '글씨 21'

갤러리21

[Gallery]

2018-12-24
다전 박승비 개인전

  陽陽陶陶양양도도


* 본 전시는 2018년 12월 13일(목)부터 12월 19일(수)까지 

'백악미술관 2층'에서 개최되었으며, 

갤러리21에서 3개월 간 연장 전시됩니다.  


 

글씨에 뜻을 두어, 자유롭게 즐기는 경지

- 다전(多田) 박승비(朴升丕)의 예술세계 -

 

현대를 흔히 영상매체의 시대라고 부른다. 백남준 같은 예술가는 일찍이 이러한 흐름을 간파하고 비디오 예술이라는 당시로서는 생소한 예술분야를 개척해 선구자가 되었다. 영상기표와 문자기표를 갈라놓는 매체적 특성들 가운데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전자가 지배적으로 이미지에 의한 대상 재현적 미메시스(mimesis)의 언어임에 반해 후자는 지배적으로 문자에 의한 사건 서술과 대상 묘사에 치중하는 디에게시스(diegesis)의 언어라는 점이다. 미메시스와 디에게시스의 구분은 플라톤에게서 유래하는 오래된 개념이다. 미메시스는 사건의 직접적 제시인 보여주기(showing)’라는 개념에 연결되고, 디에게시스는 화자-서술자에 의한 간접적 사건 서술이라는 의미에서의 말하기(telling)’라는 개념에 연결되어 사용된다. 영상의 탁월한 대상 재현성에도 불구하고 영상지표는 문자기표를 결코 대체하지 못한다. 이 대체 불가성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문자언어가 지닌 디에게시스적 성질과 기능의 차원에서이다.

 

영상매체의 시대라는 표현이 단순히 영상의 지배적 문화형식화라는 의미 이상의 차원, 다시 말해 인간이 세계를 그림으로 바꾸고 그 그림을 정복하는 시대라는 의미 차원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 공식을 다소 바꾸어 영상시대란 인간이 세계를 이미지로 바꾸고 그 이미지를 소유하는 시대로 파악할 수 있다. 그 시대는 시각쾌락의 시대, 시각에 의한 세계 소유의 시대, 시각의 권력화 시대이다. 이러한 시대에 서예는 어떠한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영상시대의 서예는 시각의 노예가 아니라 시각쾌락의 시대에 대한 반역이다. 그 반역이 아니고서는 인간 존재의 확장과 심화가 불가능하고 존재의 부단한 확장과 심화를 시도하지 않는다면 서예는 어디에서도 그 심미적 차원을 확보하고 유지할 길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전(多田) 박승비(朴升丕)는 학부에서 서양화를, 대학원에서는 동양화를 전공하였고, 개인전을 3차례 가진 바 있는 화가이다. 이번 전시가 서예로서는 첫 개인전이다. 따라서 아직 서예 분야에서 작품세계의 전모가 확실히 드러났다고는 할 수 없고, 작가론을 쓰는 것은 더욱 시기상조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전시를 통해 집중적으로 발표한 여러 편의 작품들은 그 개성과 서예적 완성도에서 주목을 끌기 충분한 요소를 구비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필자는 이번에 선보이는 작가의 작품 가운데 왕탁을 임서한 초서 작품과 개성이 드러난 여러 점의 한글작품에 특별한 애착을 갖고 있다.

 

전시의 제목인 양양도도(陽陽陶陶)’에 주목하게 된다. 작가의 서예적 지향점이라고도 생각되는 이 말을 풀이하자면 뜻을 얻어, 자유롭게 즐기는 경지정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에게는 회화작업에서부터 선보였던 형식을 이루는 붓질의 운동이 곧 서예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에겐 붓의 움직임에 의한 이미지의 흐름과 율동이 곧 의미의 궤적이다. 그뿐이 아니다. 다소 동떨어진 듯한 여러 개의 이미지들이 병치를 통해 전체적 인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 분산된 전체를 꿰뚫고 지나가면서 하나로 이어주는 것이 바로 작가로서의 역량이 아니겠는가.

  

이번 전시를 통해 박승비의 작품이 열어 보였던 세계, 또는 표현들과 연관해 보게 된다. 이전까지 작품에서 보았던 과도하게 깊이를 추구하는 것이나 긴장으로부터 한 발 물러나 있는 듯한 느낌이 있다. 필자는 이러한 작가의 전이를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이완이나 단순함의 그것이 아니다. 묶여 있거나 뭉쳐 있는 그 어떤 것이 마침내 풀어지는 듯한 과정을 보게 된다. 박승비의 서예는 이제 유연하다. 자신을 홀로 떠돌게 하던 그 괴리로부터 또는 절대적인 그 배수(背水)의 진()으로부터 벗어나 수용(受用)의 큰 그릇 하나를 넌지시 내보이고 있다. 그 유연성이 더 많은 것을 보게 하고 있고 깨닫게 하고 있다. 이 유연성이야말로 서예작품을 보는 즐거움을 주는 진정한 서예의 깊이가 아니겠는가. 즐거움과 깊이가 함께 있는 굴신자재(屈身自在), 그것이 거기에 있다. 그것이 바로 서예의 자율성(自律性)이고, 이번 전시를 통해 작가가 추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 後素文房에서 김정환(서예평론가) -

 

 



전시장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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郭店楚墓竹簡 老子 甲 204×266cm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形 高下相盈 音聲相和 

前後相隨 是以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不居 夫唯不居 是以不去 

郭店楚墓竹簡 老子甲一部 

歲華戊戌立冬於笑笑軒多田朴升丕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이라고 알고 있지만 이것은 추한 것일 수도 있다. 모두가 선()한 것이라고 아는 것도 선하지 않은 것일 수 있다. 본래 있음과 없음은 서로를 낳고 어려움과 쉬움도 서로를 의지하며 이루어진다. 길고 짧음도 서로 비교되는 것이고 높고 낮음은 서로 포함되어있는 것이다. 소리는 서로 조화를 이루고 앞과 뒤는 서로 따르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무위로 일하며 말하지 않고 가르침을 행하는 것이다. 만물을 움직이더라도 억지로 시작하지않으며 하고나서도 내세우지 않고 공로를 이루고도 그곳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공로가 떠나지 않는다.

곽점초묘죽간노자갑 일부를 쓰다.

때는 무술년 입동에 소소헌에서 다전 박승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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鳳 45×27cm 캔버스에 아크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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至樂 42×27cm



夫得是至美至樂也得至美而遊乎至樂者謂之至人

戊戌立冬多田朴升丕

무릇 그 경지에 들어가게 되면

 지극한 아름다움과 지극한 즐거움을 얻게 되고 

지극한 아름다움을 얻어 

지극한 즐거움의 경지에서 노니는 사람을 지인이라 한다.

무술년 입동에 다전 박승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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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않은 길 45×76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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常樂 35×24cm 캔버스에 아크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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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위한 序詩 49×64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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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41cm 캔버스에 아크릴

世上傳 龍興雲雨潤 萬物 戊戌 多田

용은 세상에 전해지기를 구름을 일으켜 비를 내리어 만물을 적셔준다고 한다.

무술년 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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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41cm 캔버스에 아크릴


傳說上之神鳥雄叫鳳雌叫凰通稱鳳皇 戊戌冬多田朴升丕

, 전설상의 신조다

숫컷은 봉, 암컷은 황으로 부르나 보통 봉황으로 일컫는다

무술년 겨울 다전 박승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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陶陶 50×29cm 화평하고 즐거운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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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善若水 44×42cm









박승비 (朴升丕 Park, Seung Bee)

E-mail : imfineph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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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138-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