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전시는2020. 5. 5(화) ~ 5. 11(월)까지 아트센터 일백헌에서 개최되었으며, 갤러리21에서온라인 전시로 6. 18(목) ~ 8. 17(월)까지 두달 간 연장 전시합니다.
글씨21 담론
전시장 전경
김백녕 개인전을 보면서 느낀 감회
김 수 천(원광대학교 서예문화연구소 소장)
20년 만에 붓을 새로 잡았다고 들었다. 시흔의 나이를 넘어 갑자기 첫 개인전을 한 이유가 궁금해진다. 김백녕(金白寧)은 최근 개명을 했다. 그가 대학을 다닐 때 이름은 김범수(金範洙)였다.
김백녕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나온 삶을 알아야 한다. 그의 인생역정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그는 20대에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 동아미술대전 입선, 한국서예청년작가전 등 다수의 공모전에 출품할 정도로 앞날이 촉망되는 젊은 서예가였다.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던 그가 홀연히 모습을 감춘다. 그는 대학원에서 서예학으로 석사를 한 뒤, 학교를 옮겨 철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았다. 그 후 철학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철학 강의를 한다고 들었다. 지금은 서예가가 아닌 동양철학 전공자로서 활동하고 있다. 이는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서예인의 모습은 아닌 것 같다.
그의 모습이 점점 희미해져가고 있을 무렵 서울에서 초대전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코로나19로 인해 위축되어 사람만나는 것조차 두려운데 김백녕의 전시는 꼭 가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서울을 향했다. 그가 전시를 하는 북촌 아트센터 일백헌은 개관 전 수리공사를 할 때 우연히 들린 적이 있다. 한옥을 개조하여 만든 아트센터는 한국적 정서를 느끼게 하는 편안한 곳으로 휴식할 수 있는 마당도 있고, 전시장이 몇 개의 방으로 나뉘어져 작품을 감상하는 재미를 더해준다.
작가는 전시를 하기 위해서 많은 고민을 한다. 더욱이 첫 개인전을 하는 작가는 더욱 더 고뇌가 컸으리라 본다. 관전자들은 작가가 들인 시간과 노력과는 달리 작품에 머무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짧은 편이다. 그러나 관람의 시간이 빠르다고 하여 성의 없이 보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스쳐지나가도 작품에 대한 인상은 머리 속에 들어오기 마련이다. 그것은 인간이 구유하고 있는 직관(直觀)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전시장에서 김백녕의 작품을 보는 순간 찰나적으로 작가의 세계가 느껴졌다.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첫 눈에 들어오는 작품이 <물>, <10>, <영문자 알파벳>이었다. 똑같은 글씨를 일 이 십자씩 썼는데도 표정은 제각각이다. 옆방으로 가니 큰 글씨로 쓴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서론에 나오는 짧은 문구로 쓴 대작(大作)이었다. 꾸밈없이 구애받지 않고 쓴 글씨가 마치 선승(禪僧)의 글씨처럼 느껴졌다. 큰 공간을 지배한다는 것은 내공을 필요로 한다. 오랫동안 글씨를 쓰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작품이 단조롭거나 허전하지 않은 것은 그가 학창시절 열심히 갈고 닦은 서예실력이 바탕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고, 그 위에서 다져진 철학공부와 큰 연관성이 있을 것이다.
큰 거실로 발길을 옮기니 기암절벽에 새긴 암각화와 같은 작품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시선을 당기는 작품이 <태박(太樸)>이었다. 원초적 카오스를 뜻하는 <태박>은 응축된 필획으로 표현되어 원초적인 에너지로 다가왔다. 이 작품을 보면서 작가와 한참동안 우주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세계를 살기도 하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현존하고 있는 큰 세계를 동시에 산다. 인간에게 불어닥치는 힘겨운 일들, 괴로움, 좌절감에도 마음의 평형을 유지하고 웃음을 잃지 않고 산다. 그 힘의 원천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저마다 마음속에 존재하는 원형적인 에너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태양이 크다고 한다. 그러나 우주의 가장 큰 별 방패자리(UY)는 태양의 50억 배, 지구의 6,500조 배에 달한다고 한다. 그것은 허블망원경으로 입증된 사실이다. 그러한 어마 어마한 크기를 지닌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별들이 우리 인간과 함께 공존하고 있다. 별과 우리는 하나가 되어 함께 호흡하며 살고 있다.
김 작가의 작품 <태박>이 우주와 공명을 일으켰나보다. 그 앞에서 우주에 대한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말이다. 아티스트가 존경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눈에 보이는 세계만을 살지 않기 때문이다. 진정한 예술가는 세속의 삶을 살면서도 우주와 같은 큰 정신이 존재한다. 서예와 예술을 한낱 시각적인 조형예술로만 보는 것은 한없이 작가의 모습을 초라하게 만든다.
언젠가 「독서신문」에 실린 서예가 김충현(1921~2006)의 서예론을 보면서, 깊은 감회에 빠진 적이 있다. “재주나 소질만 갖고는 안 되는 거야. 천상(天象) 지지(地誌)를 알아야 한학의 진면목을 알 수 있듯이 시를 쓰고 글씨를 하려면 그것이 우러나올 샘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논리 아닌가. 인간의 신체구조나 정신세계는 그것이 하나의 소우주(小宇宙)야. 대자연과 소우주가 합치될 때 창출되는 것 그건 고도의 선경(仙境)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이를테면 그 경지까지는 못 가더라도 이러한 호흡과 맥을 알아야 진정한 서도를 할 수 있다 이 말이야.”
이 글을 보면서, 큰 예술은 소질과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우주와 합일하는 큰 정신세계를 향한 도야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방마다 작품의 분위기가 달랐다. 서로 다른 성질을 한 작품이 걸려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일관된 특성이 있다. 작품 전체의 모습은 그의 개성적인 삶만큼이나 일상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의 글씨는 한군데 머물러 있지 않다. 한글이든 한문이든, 숫자이든, 영문자 알파벳이든, 쓸 때마다 달라지는 구조를 하고 있다. 여기에서 작가의 예술세계를 느낀다.
늘 상 하던 일을 반복하는 것을 관행(慣行)이라고 한다. 관행은 반복이고 습관이며 행동의 패턴화다. 김 작가의 작품에서는 그러한 습기(習氣)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작가의 삶과 일치된다. 그의 삶은 일반적으로 보아온 모습이 아니다. 글씨 또한 습관적인 반복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서론에 보면 늘 상 변하는 글꼴이 명필의 조건이다. 왕희지의 <난정서(蘭亭敍)>가 명필임을 설명할 때 ‘지(之)’자 20자가 모두 다르다는 것을 강조한다. 추사 김정희의 글씨도 마찬가지다. <세한도(歲寒圖)>도 같은 자를 동형반복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다름의 글꼴이 강조되는 것은 역대 서예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중히 여기는 조형세계다. 작품을 할 때 같은 자가 반복되면 어떻게 해서라도 다르게 표현하기 위해 자전에서 이체자(異體字)를 찾는다. 이러한 견지에서 본다면 글씨가 늘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은 서예의 보편적 가치라 할 수 있다.
동형반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미(美)를 넘어선 또 다른 차원이다. 이것을 규명하는 것은 김백녕의 작품이 주는 가장 큰 가치이자 의미라고 생각한다. 김작가는 철학전공자로서 현재 대학에서 동양철학 강의를 한다고 들었다. 동양철학에서는 우주변화의 원리를 중요하게 다룬다. 따라서 작가는 글씨의 글꼴이 왜 항변(恒變)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 같다. 김백녕의 작품제작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기대된다.
현재 한국의 서예는 작가와 작품은 많은데, 그에 대한 이야기가 빈곤하다. 작품전은 많지만, 품평이나 비평이 거의 부재된 상태로 전시회만 무성하다. 전시에 들인 공력(功力)만큼 작가의 작품에 대해 담론하는 분위기가 이루어져야 한다. 한동안 서단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김백녕을 시작으로 서예작품과 작가에 대한 풍성한 담론이 펼쳐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