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空實實
金瑬淵 書展緖
艸丁 權 昌 倫
(大韓民國藝術院 會員,
國際書法藝術聯合韓國本部 理事長,
韓國書藝團體總聯合會 會長)
無空의 첫 개인전에 展出되는 書品들은 전·예·해·행·초를 두루 갖춘 다양한 필체의 향연이라 여겨진다. 그동안 연마장양한 기량과 이상을 실현해 보려는 深長한 의도가 배어있는 듯하다. 평소에 틈틈이 제작한 500여 작품 가운데에서 전시 공간의 한계 때문에 60여점만 선보이게 되었다고 한다. 무공이 서법의 실제 연찬과 더불어 서학 전반에 걸친 이론적 考究를 통하여 자기의 서예술 이상을 구현하려고 한 흔적이 역력히 드러나 보이는 玉屑들이 아닐 수 없다.
그 가운데에서도 행초와 篆籒 의 特長이 있는 듯하여 부연해 보면 행서는 動靜結合, 剛柔互濟, 方圓并用, 虛實相生이 그 要點이라는 것이 일반적 견해라고 본다.
행서는 풍부한 해서의 형질에서 비롯되어야 하며, 또한 초서의 필의를 겸비해야 한다. 그러하기 때문에 일종의 동정결합적 서체라고도 한다. 正히 해서와 季孟之間으로서 스스로 능히 跌宕頓挫하면서 弛張有致의 使轉이 요구된다. 무릇 무형적 사전, 경쾌적, 柔細的, 䟽 白的 등의 用力을 가하지 않은 듯한 虛的 방면에 歸屬한 반면에 형태를 가진 점획은 沈着的, 粗剛的, 密黑的 등의 着力을 加한 것은 모두 實的 방면에 속한다. 행서를 쓸 때 용필이 虛하지 않으면 圓活의 欠缺이 나타나고 또한 용필이 부실하면 침착하지 못한 흠이 있게 된다. 오로지 허필을 구사하면 浮滑해지며 實筆을 專用하면 형태가 笨 滯된다. 그렇기 때문에 허허실실과 이합지간의 妙理를 구사하면 자연히 풍부한 자태를 나타낼 수 있다.
古來로 章草, 今草의 名家는 각 시대별로 매우 많다.
초서에 대한 論述은 文詞가 工巧하고 華麗하여 초학자는 그 亂澀함을 이해하기 매우 어렵다. 뭉뚱그려 그 대강을 짚어 보면 무릇 자연 계와 일상 생활을 하는 가운데 일어나고 느껴지는 동정의 현상이 모두 초서의 법으로 취택할 수 있는 것 들이다. 鳥獸, 草虫 , 長松, 弱柳, 龍鳳, 枯藤, 水火, 歌舞, 戰鬪 등 여러 가지 일과 사물의 모습이 모두 초서의 영양소가 된다. 실제상으로 허다한 형상화적 비유는 초서의 필묵기교에서 떼어낼 수가 없다. 비유하건대 깜짝 놀란 토끼의 모습, 수풀 속으로 숨어 들어가는 뱀, 나무사이를 뛰어 다니는 원숭이, 용맹한 병사의 적병포획, 느릿느릿 걸어 다니는 새와 까마귀, 빙글빙글 돌면서 출렁거리는 물결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형상은 모두 초서의 경쾌한 운필과 節奏를 형용하고, 날개를 펴서 퍼덕거리다가도 날지 않고, 뛰어갈 듯하다가도 도리어 멈추는 등의 모습은 필법 가운데에서도 疾澀의 필세를 형용하는 것이며, 蟠龍, 舞鳳, 歌舞는 초서의 使轉的 필법을 형용한다는 것은 상식이라 하겠다. 사람으로 말하자면 坐臥行立, 揖讓忿爭 등은 초서의 자연적인 結体와 章法과도 관계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인들은 인정하기를 비록 초서는 “法보다 意가 많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초서를 잘 쓰는 요건은 해서의 법도에 능통하면서 篆籒에도 통달해야 한다. 초서의 용필은 方折보다 圓轉이 많으나 一味的인 원전은 점획이 불분명해져서 아니된다. “초서는 使轉을 形質로 삼고 점획을 性情으로 운필하여야 한다.” 趙構의 <翰墨志>에는 “옛 사람들은 正書에 능숙한 연후에 초서를 썼다. 대개 正·草 두 법을 겸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라고 하였다.
해서는 단아장중하고 결구가 엄밀한 체상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마치 大臣이 의관을 갖추고 廟堂에 위엄 있게 서 있는 것 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초서는 교룡과 봉황이 뛰어 오르고 나는 것과 같아 필력이 신속하게 진동하는 靈活한 필호의 迅疾로 운필하지만 끝내는 真書의 법도를 저버리면 절대로 아니된다. 옛 사람이 비유하기를 “楷如立, 草如走”라고 하였다.
해서의 법도가 아직 성립 되지도 않은 초학자가 황급히 미친 듯 부르짖고 奔走히 시도해 보지만 반드시 勢는 나타나지 않는다. 해서의 법도를 깨우치지 않고서는 초서를 익히려면 迷惑으로만 빠질 뿐이다.
초서는 使轉이 종횡으로 飛舞하기 때문에 動勢한 가운데 이뤄짐을 귀하게 여길 뿐 아니라 真 書의 凝重靜穆한 意趣가 含有되어야 한다. 초서의 堂奧之妙에 들어갈려면 침착한 고요함 속에 통쾌함이 깃들어야 한다. 초서는 필획이 많이 생략되어 매우 간단하기 때문에 용필 방면의 공부가 절실히 요구된다. 下筆하면 반드시 根源이 명확해야 되며, 운필이나 필획에는 物象의 體態와 動靜이 들어와 있지 않으면 저속한 글씨로 전락되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초서의 용필은 예서의 厚重古朴한 필의의 바탕위에 篆 籒 의 婉轉圓渾的 필법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형태의 초서는 자연히 輕飄浮薄의 폐단이 없게 된다.
“선현들의 초서 대가는 반드시 篆籒에 통달했기 때문에 결구가 淳古하고 使轉이 勁逸하다.” (明, 豊坊 <書訣>)라고 한 것은 초서의 哲則이 아닐 수 없다.
無空 동학이 篆籒 작품에 심혈을 많이 기울인 듯하여 행초 필법의 대강을 들어 상호 연관성을 피력해 보았다.
역대로 전서에 행초법을 또는 행초에 전주법을 융합하여 별난 운치를 들어낸 서가로는 명의 趙宦光이 古篆과 초서를 혼융시켜서 別趣를 느끼게 하였으며, 淸의 鄭板橋가 해서와 행서에 예서 결구나 필의를 적용하여 奇趣와 神韻을 나타낸 六分半書는 매우 별난 特 長이며 秋史가 예서에 일부 초법을 사용하여 典重함에 流麗함을 가미한 逸格의 書品을 창출해 내었고, 현대의 一中 선생이 행초에 전예의 法象을 들여 화룡점정의 품격을 高揚시킨 예가 있었다.
無空이 그동안 추구한 古篆筆法이 字學과 用筆法에서 독자적 성취를 보인 것은 서법의 본질적 탐구로서 매진한 결과물이라 여겨진다. 특히 전서 작품에서 감상자로 하여금 신선한 필획의 線條美와 결구 및 장법을 느끼게 한다는 것은 甲骨, 鐘鼎 彝器의 섭렵도가 높다는 증좌가 아닐 수 없다.
속담에 “ 무의식중의 선 보다는 의식 중의 악이 낫다 ” 라는 말이 있다. 무엇인지도 모르고 어떻게 하다 보니 좋은 일이 되었다는 것은 의식불명의 혼돈의 행위라서 개선의 여지가 없고, 잘못이라고 알면서도 저지르는 악은 언제든지 개전의 심사가 들어 있다. 서법의 이치를 알고 시도하는 새로운 시도는 시행착오를 범할 수도 있지만 무한의 신국면을 열어 갈 수 있다.
서법예술의 조형, 개성, 시대성을 추구하다 보면 외형적미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을 수 있으며, 더욱 금기해야 할 것은 矯揉造作으로 인하여 天 真함과 意境美가 缺乏되어 그만 庸俗으로 빠지는 것을 경계하여야 한다.
서법예술의 높은 이상은 “雅”와 “俗”을 통일시키는 것을 일러 雅俗共賞이라 한다.
華質相半이란 서가가 추구하는 예술목표로 삼는 최대의 과제이다.
“글씨 쓸 때 각박한 뜻과 요리조리 꾸미려고 하는 마음이 없어야 아름다운 글씨가 된다.”
(米芾) 장자 (산목)편에는 “旣彫旣琢, 復歸于朴”이라 하였다.
작자의 極大的 功力이 蘊藏 되었으면 奇之極, 工之極, 巧之極, 美之極으로서 소위 “大巧若拙”, “歸朴返真” 의 경계로서 천진난만하고 平淡少奇하며, 質朴無華, 不事彫飾 하여서 순전히 자연 그대로이다.
이번의 初度 전시로서 無空 예술의 진면목을 선보이고 更上一層樓의 신천지가 펼쳐지기를 기대한다.
2020 立冬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