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박(質朴)과 고아(高雅)
<七十而已展>으로 본 이종선의 작품세계
임종현(서예가)
한글서예의 새로운 풍격과 아취 가득한 작품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한얼 이종선 선생(이하 존칭생략)이 고희를 맞아 갤러리 kote에서 11월 17일부터 25일까지 대규모 전시를 한다.
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 서예가로서 평생 이룬 자신만의 서풍으로 쓴 작품들을 七十而已展(칠십이이전)이라는 이름으로 관객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七十而已展라는 전시명에서 알 수 있듯이 작가는 자기가 살아온 세월이 특별한 것은 아니고 다만 칠십일 뿐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작가의 겸양일 뿐이고 전시되는 150여 점은 이종선 이라는 서예가의 현재를 보여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그의 서예 역정과 그의 이상향을 향한 분투를 회고하고, 그 속에서 앞으로의 행보도 예측해보는 중요한 길목에서의 전시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의 서예작품의 모든 분야, 즉 한글작품과 한문작품 국한문 혼서작품 및 사설작품을 망라하여 전출하였으니 이번 전시는 작가가 자신의 전부를 드러내 놓은 것이나 진배없다.
아울러 서예 인생에서 희비를 같이 했던 오거서루(五車書樓)의 지기(知己)와 중국 샤오싱(紹興)의 난정서법가협회 회원 5명의 애정 어린 축필이 실리니 그의 고희전과 고희연이 소중한 인연들로 인해 더욱 아름다워질 것이다.
한얼 이종선이 살아낸 시절은 우리 현대사에서 격랑의 시대였다. 그가 태어나던 해는 6.25 전란이 채 끝나지 않은 시기였다.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휴전을 맞았으나 한반도는 이미 사람이 살아갈 만한 터전이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궁벽한 곳이었던 용인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전쟁의 후유증과 더불어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도 일일이 거론하지 않아도 다 알만한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이 있어 왔고, 그에 따른 민초들의 어려움은 고스란히 그의 유년시절에 각인되었다. 장성해서는 서예와 전혀 상관없는 사업을 하면서 승승장구 했으나 갑자기 찾아온 실패의 국면에서 우연히 서예를 맞닥뜨렸고, 이렇게 만난 서예는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돌려놓았다. 물론 어릴 적부터 두드러진 필재 때문에 인근에서는 제법 이름을 날렸지만 그런 서예가 그의 직업이 되고 평생을 다해 달려갈 목표가 될 줄은 짐작을 못했던 일일 것이다.
이렇게 서예를 시작한 이후로 많은 스승을 만나 가르침을 받다가 소헌 정도준 선생을 만나 대한민국미술대전과 동아미전에서 초대작가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세상에 필명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러나 서단에 필명을 드러내면서도 아직은 온전히 자신의 색깔을 내지 못하다가 본격적으로 그의 성정이 글씨에 오롯이 담기게 된 것은 2002년의 첫 번째 개인전부터이다. 이때에 시도한 판본체의 비정형적 장법과 조형은 세상의 찬사와 냉소를 같이 받았지만 결국 그의 끊임없는 천착으로 지금의 완성도 높은 작품세계로 진입하였으니 그만의 특징적 예술세계의 서막이 된 것이다.
꽃 또는 절벽-박시교
2022, 종이에 먹, 41×34cm
한얼印存
2012, 21×90cm
작품세계를 들여다보면 앞에서 말한 대로 네 가지로 나누어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비록 네 가지로 나누어서 보더라도 질박(質朴)하면서도 아아(雅雅)로움을 잃지 않는 서예적 특성은 서로 깊숙이 통하고 있다.
한글서예는 작가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분야인데, 이것도 몇 종류로 나누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궁체와 한문서예의 행서를 연마하여 나온 민체흘림, 그리고 정격의 고체와 작가만의 특성이 드러난 자유로운 형식의 판본류가 있다.
한문서예는 논리적인 해석이 가능한 해서와 애끓는 안진경(顏眞卿)의 삼고(三稿)를 바탕으로 삼고 그 위에 이왕(二王)의 표일(飄逸)한 아름다움까지 담아낸 행서 그리고 오창석(吳昌碩)을 가져오되 아아한 획의 구사를 전제로 한 전서, 평담미(平淡美)를 추구한 예서와 문기(文氣) 어린 초서까지 넘나들고 있으니 일반적으로 한글 서예가로 불리는 것이 이상할 정도이다.
한글서예부터 자세히 살펴보면, 우선 궁체는 여성적인 곡선과 우아함에 머무르지 않고 꾸미지 않는 강직한 세로획을 첨가하여 강건함까지 보유한 궁체를 구사한다. 이러한 점은 전해지는 궁체 자료에서는 보이는 것인데도 근래의 궁체를 쓰는 이들이 부드러운 곡선에 집착하여 획력이 부족해지는 상황의 우려와 방향 제시의 사고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지만 일중 선생의 유훈을 잘 계승해 나가는 것이라 여겨진다. 이렇게 한글궁체의 엄숙함에 집중하여 사뭇 옷깃을 여미게도 하지만 윤택함 또한 놓치지 않는다. 또한 다른 서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변화가 적은 등서체(謄書體)로 시작된 궁체에서도 잔잔한 흐름을 주어 전통적인 궁체의 전승에만 매몰되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 보인다.
둘째로 민체흘림은 그만의 풍격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앞에서도 잠깐 거론했듯이 한얼의 민체흘림은 한문서예의 행서를 연마하고 거기에 한글의 자모음이 갖고 있는 특성을 대입시켜 만들어진 획과 조형이다. 그렇다면 그의 일상에서의 서예에 대한 연찬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는 한글서예가들 중에서 보기 드물게 한문서예를 많이 연마해왔고, 지금도 그것을 쉬지 않고 있다. 특히 안진경의 해서와 행서는 그의 서예 전반에 녹아 들어가 있는데 한글민체에 두드러지게 보이는 요소로는 안진경의 삼고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서예사를 통털어 보배로 여겨지고 있는 비분강개(悲憤慷慨)의 성정(性情)으로 쓴 삼고, 그 속에 활달하면서도 외척(外擲)하지 않고 내함(內含)하는 조형의 포용성, 예상을 뒤엎는 자유로운 변화, 이러한 요소들을 한글민체에 담아내려고 무진 애를 썼을 것이고, 그 결과를 지금의 서체로 보여주는 것이다. 거기에 근래에 이르러서는 대소, 강약의 변화와 판본류인 한문고체에서 보여주는 자유로운 장법까지 사용하면서 한글흘림의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師竹友石記-自撰
2022, 종이에 먹, 40×34cm
두시언해 <漫興>구
2022, 종이에 먹, 35×137cm×2
셋째로 고체라고도 불리는 판본류의 글씨이다. 이 부분은 정격인 형태, 즉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형태를 비교적 잘 지니고 있는 글씨들을 말한다. 이러한 작품들은 그가 학서기(學書期)와 작가로서 활동하던 시기의 초반에 많은 연찬(硏鑽)이 있었던 연유로 굳센 필획이 있어도 한가롭고 우아함을 잃지 않는 작품들을 많이 쏟아내었다. 특히 작가는 초기부터 지금까지 광개토호태왕비(廣開土好太王碑)를 깊이 파고들었다. 이를 통해 그는 고체에 질박미(質朴美)와 더불어 호방한 기세까지 얹게 되었다. 이렇게 광개토호태왕비에 대한 천착은 지금의 작품이 나오는 것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또한 고체가 변화를 주기 어려운 서체임에도 불구하고 먹의 많고 적음과 윤갈을 이용하여 역동적인 장법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작품들을 제작하면서도 그의 마음속에서는 자신의 성정을 고스란히 담을 수 있는 고체류의 글씨를 갈망하고 있었고, 2002년의 첫 번째 개인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실험을 통해 얻어낸 글자의 크기에 얽매이지 않는 자연스러운 자형과 장법의 서체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 서체는 무질서 속에서 질서를 찾아내는 과정이었다. 다시 말해서 다양한 획들의 사용으로 인해 생길 수 있는 개개의 획들 속에 장력을 가진 부분들을 집어넣어 흐트러지지 않게 하였으며, 위에서 흔들린 것은 밑에서 잡아주고, 좌에서 넘어진 것은 우에서 받쳐주고 있고, 위에서 커진 것은 아래에서 작아지며 전체를 흐트러지지 않게 하고 있다. 이렇게 작품에서 사용한 장치들은 그의 이성적 사고와 고뇌에서 나왔지만 그 이성의 영역을 넘어서 그동안의 서예적 노력과 그의 깊은 학양(學養), 그리고 조화로운 이성 등 모든 것이 총화되어 나온 산물일 것이다.
남조(南朝)의 왕승건(王僧虔)은 <필의찬(筆意贊)>에서 “반드시 마음으로 하여금 붓을 잊게 하고, 손으로 하여금 글씨를 잊게 하여, 마음과 손이 함께 정감에 도달하고, 글씨에는 쓸데없는 생각이 없어야 한다. 이것은 구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하여야만 비로소 밝혀질 수 있는 것이다.(必使心忘于筆 手忘于書 心手達情 書不忘想 是謂求之不得 考之卽暢)”라고 하였다.
한얼은 자기 글씨에 대해 묻는 이들에게 그저 쓴 것이지 특별한 의도를 갖고 쓴 것이 아니라고 한다. 획의 견고함을 위해서 무엇 무엇을 참고하였고, 조형을 위해서는 누구의 서풍을 연구했으며, 또 자유로운 장법은 역대의 서품들 중에서 무엇을 보고 착안했는지, 혹은 이 모든 것들을 자기의 고난의 시간을 통해 스스로 추출했는지 설명하지 않고 그저 썼을 뿐이라고 한다. 그렇게 말하는데도 그의 글씨는 여느 서예가들의 그것과 다르고, 당대의 누구의 것과도 다르다. 이처럼 그의 새로운 이치와 기이한 형세는 자형의 엎어지고 위를 보고 평평하고 구부러진 모든 것들이 법 안에서 평생을 노닐다가 옛날의 법을 넘나드는 경지에 저절로 다다른 것이지 무슨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감장새 작다하고-이택
2022, 종이에 먹, 16×28cm
한문서예는 한글서예의 토양이 되었지만 그것만으로 평가되어서는 안 될 것이고, 한문서예 그 자체만으로도 험절(險絶)과 문기를 모두 갖춘 그만의 서예로, 서예미학적 특성과 우수성을 확보한 상태이다.
그의 해서는 한문서예가들이 주로 구사하는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시대의 험절하면서 기교 가득한 그런 것이 아니라 조금의 방심도 허락하지 않는 완벽한 조형을 갖춘 안진경의 해서를 주로 쓰고 있다. 이렇게 그의 해서는 지나친 기교를 자제하여 엄정함을 띠고 있지만 그의 성정이 배어들어서인지 온화함까지 갖고 있다.
또한 만당(晩唐)의 충신이자 개혁적 서예가인 안진경이 이를 악물고 쓴 삼고의 행서는 젊은 이종선을 온전히 빨아들였을 것이다. 이로부터 그의 서예적 미감은 안진경을 통해서 얻게 되었으며, 안진경을 통해 사물을 보고 서예를 판단하게 되었다. 그의 행서 전반에 흐르는 원융(圓融)한 획법과 내함의 자형은 안진경의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인 결과물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머물지 않고 왕희지와 왕헌지를 쉼 없이 파고들어 그들의 전아(典雅)하면서도 표일한 그리고 왕헌지에게서 보이는 방일(放逸)함까지 흡수하여 자신의 작품에 녹여 보이고 있다. 이러한 점은 많은 것을 배척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신의 속에서 혼융(混融)하는 품성이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이렇게 혼융된 그의 행서는 스승은 물론이고 그 누구와도 닮지 않은 그만의 서체가 되었던 것이다.
전서작품은 소전(小篆)이 주를 이룬다. 기본적으로 석고문(石鼓文)과 오창석이 석고문을 연구하여 쓴 서령인사기(西泠印社記)를 임서하여 얻은 획과 조형을 기반으로 기교를 최대한 자제하면서도 그 속에 과하지 않은 감성을 더한 평담미의 전서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예서는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으로 그러하듯이 한예(漢隷)가 바탕이 된다. 사신비(史晨碑)‧을령비(乙瑛碑)‧ 예기비(禮器碑) 등 예서의 완비된 형태의 전아함을 수용하고, 먹의 발묵과 모필의 다양한 효과가 더해졌다. 예서도 전서와 마찬가지로 평담미를 추구하여 왔는데, 앞에서 거론했듯이 광개토호태왕비에 대한 수용과 천착으로 한예가 갖지 못한 고졸하면서 웅강한 예서까지 구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근래에는 마치 전서에서 예서가 나오던 시기의 예서와 같이 정격이 아닌 상태의 글씨, 즉 형태를 흐트러뜨리고 속도의 절주도 다소 심하게 처리하는 작품을 보이고 있으니 그의 서예가 어디까지 갈지 헤아리기가 쉽지 않다.
다음으로 그의 초서는 과거 동진(東晉)의 이왕이나 당(唐)의 손과정(孫過庭)처럼 표일한 초서와 회소(懷素)와 장욱(張旭)으로 일컬어지는 광초(狂草), 명말 청초에 쏟아져 나온 명가들의 방일함, 이런 것들과는 다른 특성이 있다. 초서이지만 거친 내면을 가진 붓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 그러나 그 표효를 덮고 있는 외형은 소담스럽기까지 할 정도로 천연덕스럽다. 이러한 이유는 그의 내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것이다. 언젠가 필자가 다른 지면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한얼은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독서광이다. 이러한 그의 독서열은 그의 작품에 도도한 서권기(書卷氣)를 넣어주는 젖줄이 되고 있으며 그렇기에 그의 초서에 문기가 가득한 것이다.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이른바 국한문 혼서로 된 작품들에서 보이는 그의 무애(無涯)한 조형관과 그것을 해결해 나가는 즉흥적 판단력은 다른 이들의 그것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지금까지 많은 작가들의 시도가 있었지만 이만한 완성도까지 보여준 이는 몇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혼서체는 문자의 특성이 많이 다른 한글과 한문을 아무 거리낌 없이 섞어 놓은 듯 하지만 강약과 대소, 참치(參差) 등의 운필기법을 적절히 사용하여 문장을 꿰어놓아 각각의 글자 뿐 아니라 전체화면으로 볼 수 있도록 하는 하나의 전형을 만들었으니 그의 서예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될 것이다.
그의 서예 전반에 흐르고 있는 험절과 온화함, 외부의 시선에 핍박받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는 굳센 의지, 형세에 지지 않으며 나머지는 문기로 채워나갈 수 있는 학양, 이것들이 지금의 한얼을 만들었다. 또한 일반적으로 읽어내려고 했던 그동안의 한글서예에서 그의 혁신적인 작품들은 읽는 재미 뿐 아니라 보는 재미를 제공했으니 그의 공이 지대하다 하겠다.
그의 작품은 종이 위에 쓴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동안 써온 금석문이 전국적으로 상당수 있는데 그중 구례 연곡사 사적비와 달마사 대웅전 현판 등은 그의 대표작이라 할 것이다.
한얼 이종선에 대해 말하면서 그의 서품만 가지고 얘기하는 것은 그의 일부만을 논하는 것이다. 한국 현대서예사에서 가장 기억해야 할 만한 사건인 서예진흥법의 국회통과를 주도한 사실 만으로도 그의 추진력과 행정적 능력은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7년여 동안 주야를 불문하고 그 많은 회의 자료와 발표 자료들을 혼자서 만들었고, 수많은 발표회를 주관하였다. 이러한 그의 능력을 서예계는 빌렸고, 그의 주도로 서예진흥법을 얻은 것이다.
뿐만 아니다. 그의 행정적 역량은 한국서학회 이사장을 맡으면서 더 발휘되었다. 미국과 러시아를 비롯한 해외에서의 한글서예전시를 주도하였으며, 그곳에서 한글서예의 아름다움으로 많은 외국인들을 매료시켰으니 한글 전도사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했던 것이다. 아울러 문경시와 함께 제작한 <서예로 담아낸 아리랑 일만수>는 아리랑 전문가와 국문학자, 그리고 온 서예계가 동원된 거대한 역사였다. 이러한 일들을 무리 없이 추진하여 완결해낸 그의 공적 또한 잊혀서는 안 될 일이다.
한얼의 따뜻한 가슴은 많은 이들과의 정감어린 교분으로 이어진다. 한국의 서예가들은 물론이고, 서예를 하지 않는 일반인들과도 우정은 차고 넘친다. 너무 많은 교분은 촌음을 아껴야 하는 서예가에게는 방해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한얼은 그들 모두에게 정성스럽다. 이러한 그의 맘 쓰임은 멀리 중국에서도 매한가지다. 서예교류전을 통해 알게 된 중국 샤오싱의 난정서법가협회 회원들과 20년 가까이 형제처럼, 혹은 친구처럼 지내며 흉금을 감추지 않고 살고 있다. 이렇게 한결같은 그의 마음에 그들도 마음의 문을 열고 한중 양국의 서예교류에 대해 상의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한중서예의 발전에 더 큰 기여를 할 것으로 본다.
필자와 한얼은 젊은 서학도 시절 만나 서로의 서예술에 대해 흉금을 터놓고 얘기하는 사이의 형과 동생으로 30여 성상(星霜)을 보냈다. 애주가로 소문난 그와의 자리는 늘 술이 같이 했다. 오죽하면 수을(水乙)이라는 자호(自號)를 썼겠는가! 술을 알고 술 속에 자신을 던질 줄 알고, 다시 술에서 벗어날 줄도 아는 그는 진짜 술꾼이다. 그동안 그와 잔을 부딪힌 양만 해도 어지간한 연못은 이루었을 것이다. 비루한 나를 서예가들이 모인 술자리마다 동생이라고 소개하며 이끌어 주던 정이 넘치는 형이었다. 대한민국미술대전의 개혁을 외치며 흥사단에서 세미나를 열 때는 한얼은 세미나의 주최자로, 필자는 개혁방안의 주제발표자로 함께 하면서 겪었던 일들, 서총을 비롯한 서단의 문제를 만날 때마다 의로운 선택이 무엇인지 같이 머리를 맞대었던 기억들, 이런 기억들로 점철된 지난 시간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간다. 훌쩍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며 李白의 글 장진주(將進酒)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朝如靑絲暮如雪(아침에는 푸른 실처럼 머리가 검더니 저녁에는 눈처럼 백발이 되네)
한얼은 그동안 이룬 것도 많고 거둔 것도 많지만 아직도 그는 해야 할 일이 많다. 그의 나이 아직 칠십이다. 莊子에 보면 “거백옥(遽伯玉)은 나이가 육십이 될 때까지 육십 번이나 살아가는 방법이 변화했다”(遽伯玉 行年六十而六十化)라는 말이 나온다. 그의 나이 육십은 벌써 넘었고, 이제 칠십이니 거백옥이 변화한 횟수에 견주면 많은 변화를 했어야 하는 나이이다. 더 멀리 보는 안목과 깊이를 가늠할 줄 아는 심미안으로 좋은 작품을 거듭 발표하여 오래도록 후학들의 지남이 되어주기를 기대한다.
끝으로 이제는 서단 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챙겨가길 바라며 詩經 大雅 行葦에 나오는 구절로 마무리를 대신한다. 壽考維祺 以介景福(장수하여 경사스럽고 큰 복을 비네)
환향-김대봉
2021, 종이에 먹, 60×198cm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이종선 (李鍾宣) ― 星州人
아호 │ 한얼, 수을, 醉月堂, 立菴, 惟農, 水乙, 雙六樵夫,
烏有齋, 不肯車後樓.
五車書樓主人, 一初子
출생│ 1953. 5. 9일(음), 경기도 용인
주소│(06918) 서울 동작구 만양로 26 건영APT 101-402
서실│(03147) 서울 종로구 삼일대로457 수운회관 1203호 (五車書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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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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