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전시는 2018년 12월 8일(토)부터 12월 14일(금)까지 '이화아트갤러리'에서 개최된 바 있으며, 갤러리21에서 연장 전시됩니다.
다시, 전각이란 무엇인가. 1. 18세기 조선의 어느 날. 실학자 유연(柳璉)과 이덕무(李德懋) 사이에 이런 일이 있었다. 평소 전각 잘하기로 이름난 유연의 집에 들렀던 이덕무는 그의 전각하는 모습을 꽤나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유연은 돌을 쥐고 무릎에 받치고서 어깨를 비스듬히 하고 턱을 숙인 채 눈을 깜빡이며 입으로 후후 불면서 먹 자국에 따라 누에가 뽕잎 갉아먹듯 새겨 들어가는데 마치 실처럼 가늘면서도 획이 끊어지지 않았다. 입술을 모으고 칼을 밀고 나가는데 눈썹을 찡긋찡긋하며 힘을 쓰더니, 이윽고 허리를 받치고 하늘을 쳐다보며 ‘휴~’ 하고 긴 숨을 내쉬었다. 유연의 전각하는 모습을 끝까지 관찰한 이덕무는 뭔가 못마땅했는지 냉소적인 질문을 던진다. “자네는 그 단단한 돌멩이를 새겨서 무엇을 하려는 건가?”
질문의 의도가 다소 불손했지만 유연은 괘념치 않고 전각에 대한 평소의 생각을 조곤조곤 이야기한다. “무릇 천하의 모든 물건에는 각각 그 주인이 있고, 주인이 있으면 이를 증명할 믿음의 징표가 있어야 하네. 그러기에 열 집 밖에 되지 않는 작은 고을이나 백부장(百夫長)까지도 부절(符節)이나 인신(印信)이 있었던 것일세. 주인이 없으면 흩어져 버리고 신표가 없으면 어지러워지거든.
내가 무늬 있는 좋은 돌을 얻었는데 결이 반질반질하고 크기가 사방 한 치로 옥처럼 빛이 난다네. 손잡이 꼭지에다 쭈그리고 앉아 새끼에게 젖을 물리고서 으르렁대는 사자를 새겨 놓으면 나의 서재를 지키고 문방의 사우(四友)를 보호할 걸세.
또 ‘아조헌원 씨류명연(我祖軒轅 氏柳名璉)’이란 여덟 글자를 아름답고 우아하게 종정문(鍾鼎文)과 석고문(石鼓文)의 서체나 조전(鳥篆)과 운전(雲篆)의 서체로 새긴 다음 서책에다 찍어서 나의 자손들에게 물려준다면 흩어져 잃어버릴 우려가 없어 수백 권이라도 다 보전할 걸세.” 유연의 말을 끝까지 들은 이덕무는 다시 뼈 있는 질문을 던진다. “그대는 화씨(和氏)의 벽(璧)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야 천하의 지극한 보배이지.” 이덕무는 자신이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을 그제야 꺼내놓는다. “그렇다네. 옛날 진시황이 6국을 병합한 후 그 옥돌을 깨뜨려 도장을 만들었네. 위에는 푸른 용을 서려 두고 옆에는 움츠린 붉은 용을 새겨 자신이 천자(天子)라는 증거물과 사해(四海)를 진정시키는 상징물로 삼고, 몽염(蒙恬)으로 하여금 만리장성을 쌓아 지키게 하였네.
그러고는 하는 말이, ‘2세, 3세로 내려가 만세(萬世)에 이르도록 무궁하게 전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 말을 들은 유연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다가 어린 아들을 무릎에서 밀쳐 내려놓으며, 애꿎은 아이에게 화풀이라도 하듯 이렇게 말한다. “어찌 네 아비의 머리를 희게 만드느냐?” 이 짧은 일화는 연암 박지원의 「유씨도서보서(柳氏圖書譜序)」에서 인용한 내용이다. 연암은 유연과 이덕무 사이에 있었던 일화를 인보의 서문에 기록해 18세기 지식인들의 전각에 대한 인식을 후대에 전해주었다. 유연의 입장은 이랬다. 인장의 공능이 사회의 질서를 바로잡아주는 중요한 신물(信物)임은 물론, 책을 가까이하는 문인이 가질 수 있는 한묵(翰墨)의 취미이자, 자신의 책을 후손에게 온전히 전해줄 수 있는 도구로서의 기능을 갖추고 있다는 견해였다. 이에 반해 이덕무는 진시황 때 인장으로 만들어 만세에 전하게 했다는 화씨벽의 고사를 들고 나왔다. 진시황이 중원을 통일하고 황제위에 오른 뒤 인장을 만들어 ‘2세, 3세로 내려가 만세(萬世)에 이르도록 무궁하게 전하라.’ 했으나 정작 영원할 줄 알았던 진나라는 2세 황제에 그치고 말았고, 이 인장으로 말미암아 중국의 역대 왕조가 겪어야 했던 온갖 곡절을 기억해야 한다는 지적이었다. 이야기는 유연이 이 말에 수긍했다는 뉘앙스로 끝을 맺었다.
2. 옛사람이 남긴 이야기는 그 시대를 반영한다. 유연과 이덕무 사이에 오갔던 짧은 대화에는 18세기 조선 지식인들의 전각에 대한 인식이 여과 없이 투영되어 있다. 그들은 전각을 사회적 신물(信物)이자 한묵의 취미, 혹은 문방의 도구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그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우리 시대의 전각은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할까를 반문할 수밖에 없다. 그간 우리는 왕조시대로부터 제국을 거쳐 민국의 시대까지를 겪었으며, 전각 분야에서도 그만큼의 경험을 축적하였다. 북학의 시대에 고증학과 더불어 수입된 다량의 인보를 통해 전각 또한 서화와 더불어 중요한 분야로 인식하여야 온당함을 자각할 수 있었고, 20세기를 전후해서는 중국과 일본의 동향에 발맞추어 걸출한 전각가를 여럿 배출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사승 관계에 의한 여러 제자 군을 형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의 시점에서 전각 분야는 예술계의 전면에서 조금씩 뒷전으로 물러나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전각이 일부 서예가들만의 전유물이 된지는 이미 오래되었고, 그마저도 자신의 서예를 돌에 옮겨 새기면 전각이 되는 줄 오인하는 작가들도 아직 많다. 그럼 다시, 전각이란 무엇인가. 필자는 전각을 동양이 가진 고급문화의 하나로 정의해야 한다고 본다. 전각은 인문학과 문자학을 위시한 하나의 학문이기도 하며, 서예와 조각이 결합된 예술 분야이기도 하다. 결국 학문과 예술이 작은 공간에서 만난 동양의 고급문화로 자리 잡아야 한다고 본다. 현재까지 전각을 예술과 학문의 분야로 전승하고 있는 나라는 한국ㆍ중국ㆍ일본 등에 불과하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이 세 나라는 젓가락으로 식사를 하고, 오랜 기간 같은 문자를 공유해 왔다. 서예와 전각에서도 서로의 민족성이 투영된 역사를 쌓아왔다. 이제 다시 동아시아적 시각에서 우리의 전각을 다시 들여다볼 때가 되었다.
이번 전시는 한국에서 전각이라는 단일 분야로 매우 오랜만에 갖는 이례적인 기획전이다. 우리 시대 전각가들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아 오늘의 현상을 들여다보고, 앞으로 가꿔나가야 할 전각문화의 방향을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되어줄 것으로 기대한다. 이러한 취지에 흔쾌히 동참해 주신 원로 전각가들을 비롯한 정예작가들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성인근 · 글씨21 편집주간
[ 찬조출품 ] 김양동 / 박원규 / 백영일 / 여원구 / 황석봉 (가나다 순)
| 김양동
明德致遠 循導有爲 65cmX65cm
| 박원규
守口
| 백영일
松下刻印 43x93cm
| 여원구
| 황석봉
山山水水Ⅰ,Ⅱ 23x53cm
[ 초대작가 ] 김동성 / 김동훈 / 김백녕 / 김상년 김성덕 / 김영배 / 김진희 / 민승준 손창락 / 신철우 / 신현경 / 윤시은 윤종득 / 이두희 / 이완 / 이정 / 이정호 장운식 / 전병택 / 정재석 / 최재석 (가나다 순)
| 김동성
해바라기 30x30cm
| 김동훈
| 김백녕
다시 흐르는 물 78x104cm
| 김상년
竹 30x39cm
| 김성덕
채근담구 42x53cm
| 김영배
時雨黎民福 和風仁者聲 60x135cm
| 김진희
가시리 25x32cm
| 민승준
有容乃大 45x76 cm
| 손창락
民惟邦本 本固邦寧 48x110cm
| 신철우
民惟邦本 本固邦寧 48x110cm
| 신현경
佛像(南無阿彌陀佛) - 20×70cm
| 윤시은
天靑日白 135x35cm
| 윤종득
野竹 48x90cm
| 이두희
열린창문(정세훈 시인) - 6x6cmx4
| 이 완
산수도 39x27cm
| 이 정
歲月不待人 62×62cm
| 이정호
도깨비 肖形印 신현득 선생 시(도깨비 家族) 50x80cm
| 장운식
큰 도는 물과 같다 40x40cm
| 전병택
得志 40x80
| 정재석
訥齋 先生 詩 70x176cm
| 최재석
고사리 손뼉소리- 28x40cm
※ 도록 구매 안내 ※ <한국전각, 정예작가21인 초대전> 도록 구매를 원하시는 분께서는 02-2138-0104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글씨21' 앱을 설치하시면 좋은 정보를 신속하게 공유하실 수 있습니다.
앱 설치하기 >>> 안드로이드(삼성, LG) 글씨21 앱 설치
앱 설치하기 >>> 아이폰(ios) 글씨21 앱 설치
온라인 전시문의
02-2138-0104
|